소설리스트

57화 (57/61)

#57

“술 마시고 싶었을 텐데 말 들어줘서 고마워요. 앞으로도 잘해 봐요, 우리.”

“예. 은찬 형도 수고하셨어요.”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며 싫어할 줄 알았는데 얌전하게 있는 게 또 의외였다. 정말 술 안 마신 게 맞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좀 더 현우영에게 다가가 킁킁 냄새를 맡아 봐도 딱히 술 냄새가 나진 않았다.

술을 안 먹었는데 왜 이렇게 고분고분하지.

정신을 차려 보니 현우영이 몸을 굳힌 채 있었다. 갑자기 개처럼 냄새를 맡았으니 좀 당황스럽기도 하겠지 싶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아니. 술 진짜 안 먹었나 싶어서요.”

“……아뇨.”

현우영이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피곤하죠. 잘 자요.”

손을 살살 흔들며 인사를 하고 빠르게 방으로 들어간 심은찬은 침대 1층에 누워 있는 도준서를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도준서가 1층을 쓰기에 다행이었지 2층을 썼다면 더 힘들 뻔했다.

배를 드러내 놓고 자는 도준서를 보며 이불을 곱게 덮어 주었다. 내일 스케줄이 있다는 건 빈말이 아니었다. 컨디션 조절을 위해 지금이라도 빨리 자야 했다.

심은찬은 코스모스로 팬들에게 밤 인사를 남기고 정말로 자기 위해 눈을 감았다.

내일은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았다.

* * *

“……이건 뭐야.”

심은찬은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을 찌푸리며 허공을 보았다.

어제 1위 축하 뒤풀이를 하고 잠들었는데 일어났더니 이런 게 떠 있었다.

[히든 퀘스트 클리어!

감춰져 있던 미션 ‘음악 방송 1위’를 달성하셨습니다.

보상으로 랜덤 특전 퀘스트를 드립니다.

▷눌러염♥]

심은찬은 허공에 뜬 알림 창을 보며 잠시 멍하니 있었다. 지금 제 눈에 보이는 게 정말인지 아닌지 가늠할 시간이 필요했다.

저 아래 있는 ‘눌러염♥’이라는 글자가 시선을 강탈했다. 특히나 저 하트가.

일단 준다니까 받는데 이렇게 열받게 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심은찬은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가벼운 한숨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1층을 내려다보니 도준서는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비활동기에 접어들었다고는 해도 오후에는 스케줄이 있기 때문에 여유가 있는 지금 빨리 해결해 두는 편이 낫겠지 싶었다. 합리적인 판단 아래 봐도 봐도 약 오르는 글자를 눌렀다.

글자 자체가 슬롯머신이 돌아가듯 빠르게 돌아가더니 어느 순간 딱 멈춰 섰다. 기분 탓인지 기계음으로 된 효과음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멈춰 선 글자를 확인한 심은찬은 제가 제대로 본 건가 하고 미간을 찌푸려 보았다.

[★☆★☆잠들어 있는 특성에게 기회를!★☆★☆

다음 멤버의 특성을 활성화할 수 있습니다.

대상: 정민유

▷더 보기…….]

결코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심은찬은 제가 봤던 정민유의 상태 창을 떠올렸다.

[번득이는 ■■■(A) 비활성화.]

그래, 확실히 비활성화 상태의 특성이 있었다. 그걸 아깝다고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아쉬움이 있는 것과 그걸 실제로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별개였다.

“……이게 된다고?”

조용한 공간에 심은찬의 작은 혼잣말만이 울렸다.

* * *

비활동기라는 건 그냥 음악 방송만 안 한다 정도가 아닐까.

그런 의문이 순수하게 들었다. 물론 그걸 불평을 하는 건 절대 아니었다. 단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니까.

B the 1의 단체 스케줄을 제외하고도 심은찬 개인이 소화해야 하는 스케줄로 거의 활동 시즌과 비슷한 수준으로 바빴다. 잡지 촬영도 있었지만 특히나 방송 게스트 섭외도 줄을 이었다. 이전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아침에는 정민유의 특성을 활성화할 수 있는 특전 퀘스트를 진행했다. 퀘스트 성공 조건은 ‘정민유와 밥을 같이 먹는다.’라는 거였다. 뭐가 이렇게 쉬운가 했는데 밥이라는 단어가 함정이었다.

쌀밥을 먹어야만 퀘스트가 성공했다.

그리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민유는 밥보다 빵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전까지는 그냥 빵을 자주 먹네, 정도로만 알고 있었지 이 정도로 빵을 좋아하고 자주 먹는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해장을 해야 한다며 아침에 초코 우유와 더불어 식빵으로 토스트를 만들어 먹는 정민유와 덩달아 그걸 먹는 문세별, 그 덕에 따끈하고 바삭하게 구운 토스트를 먹던 심은찬은 내심 이렇게 쉬운 퀘스트가 있을까 싶었는데 완료가 되지 않았다.

오류가 났나 싶어 알림 창을 뚫어져라 봤지만 역시나 변할 기미는 안 보였다.

스케줄을 하면서는 사전에 미리 녹화 일정을 알고 있는 팬들이 보내 준 샌드위치와 과일 도시락을 먹었다. 그래도 역시 퀘스트 완료 메시지는 뜨지 않았다. 대체 뭔가 싶어서 다시 한번 퀘스트를 읽던 심은찬은 ‘밥’이라는 단어에 뭔가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로 퀘스트가 요구한 건 정말로 밥이 아닐까, 하는 가설이.

그날 저녁에 바로 실행해 보려 했으나 저녁은 전날 음주로 속이 허하다는 이유로 보쌈을 먹기로 결정이 됐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고 나서야 심은찬은 우리 팀은 이렇게까지 밥을 안 챙겨 먹었던 건가 새삼스러운 자기반성을 하게 됐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아침.

‘한국인은 쌀밥이지!’라는 슬로건을 이마에 새긴 것처럼 주장을 하는 심은찬 덕분에 전 멤버가 모여 아침밥을 먹게 됐다. 음식 먹는 것에 그렇게 흥미가 없는 심은찬이 나서서 된장찌개를 끓였다는 점에서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된장찌개 맛이 그럭저럭이었다는 점은 만든 장본인인 심은찬도 놀라웠다.

요새는 그냥 물에만 풀어도 된장찌개를 완성할 수 있게 된장이 참 잘 나오는구나, 하고 감탄을 하며 정민유를 흘끔거리며 쳐다보았다.

“민유 형도 드세요.”

“어. 그래야지. 사진 좀 찍고.”

심은찬의 재촉에 감상이 남다른 듯 한참을 된장찌개를 쳐다보던 정민유가 핸드폰으로 사진을 여러 장 촬영했다. 그 이후에야 비로소 수저를 들었다. 흰 쌀밥을 푹 퍼서 하얀 김이 솔솔 나는 것을 입 안에 넣자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렸던 퀘스트 완료 창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대전의 성성당 본점으로 가서 아래의 목록을 구입하세요.

부추사라다빵 5개, 튀긴 팥빵 3개.

4월 28일 15시 20분부터.]

바뀐 알림 창에는 다음에 할 퀘스트가 떠올랐고 심지어 시간이 지정되어 있었다. 날짜는 다음 주였다.

대체 이게 뭐지 한 것도 잠시였다. 그래. 특성을 활성화시키는 건데 그렇게 쉬울 리가 없었다.

2차 전직이나 각성을 할 때 하는 연계 퀘스트 정도로 여기기로 했다. 그러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날짜를 확인해 보니 평일이었다. 그날 스케줄을 떠올려 보았다. 다행히 대전에 잠깐 들렀다가 오는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았다.

아침 식사를 마친 그들은 단체로 소속사 회의실에 나와 있었다.

다음 싱글 앨범에 넣을 곡 후보들 중 하나를 회의를 통해 고르고 콘셉트를 정해야 했다.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포텐하이에서 받아 온 곡들의 분위기는 저마다 달랐다. 이번 앨범이 잘됐기 때문일까. 다크한 분위기의 노래가 스피커를 통해서 연달아 흘러나왔다.

포텐하이에서는 아무래도 이번 앨범과 비슷한 분위기로 가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듯했다.

이전 생에서는 어땠는지 고려를 할 수도 없는 것이, 그때에는 7집 싱글 역시 대차게 말아먹었고 이후에 받아 온 곡들 역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때 녹음했던 곡은 이번에 들은 곡 후보 중에 없었다.

“다들 어때. 느낌 좋은 곡이 좀 있어? 각자 의견 취합하려고 모인 자리니까 기탄없이 얘기들 해 줘.”

다섯 곡의 재생을 마치고 실장이 멤버들을 향해 질문했다. 멤버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았다. 개중에 고르라면야 한두 곡으로 후보를 압축할 수 있을 테지만 심은찬은 확 하고 느낌이 오는 곡이 없었다.

멤버들 모두 골똘하게 생각하던 도중 류서오가 입을 열었다.

“저는 두 번째 곡이 좋은 것 같은데요.”

두 번째로 들었던 노래는 트로피컬 하우스 장르로 부드러운 느낌에 독특한 비트가 특징인 노래였다. 그의 취향에 확실히 맞는 곡이었고 개중 콘셉트 방향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다크 분위기를 피할 수 있는 곡이기도 했다.

“응. 두 번째 말이지. 두 번째는 나도 좋다고 생각했던 곡이다, 서오야.”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근데 나는 이번에도 전 곡처럼 좀 다크하고 힘 있는 곡이 좋을 것 같긴 하거든.”

실장이 슬쩍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확실히 이전 분위기를 이어 가는 편이 아무래도 위험 부담이 좀 적어 보이기도 했다. 소속사에서는 리스크가 적은 쪽을 선택하려 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아예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 회사였다면 B the 1은 지금까지 앨범을 발매하지 않았으리라.

심은찬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리다가 말문을 열었다.

“저는 이번엔 아예 분위기를 바꿨으면 어떨까 하는데요. 청량 쪽으로요.”

심은찬이 의견을 냈다.

연속으로 다크 콘셉트로 나가는 것보다는 그 반대의 콘셉트를 하는 편이 이미지 소비 측면에 있어서도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청량이라…….”

실장의 미간에 깊게 주름이 새겨졌다.

“……사실은 한 곡 더 받은 게 있는데 말이지.”

실장은 조심스럽게 말을 마치고 음악 하나를 재생했다. 아카펠라처럼 화음을 쌓으면서 시작하는, 디스코 팝 장르의 밝고 신나는 곡이었다. 랩도 무겁지 않고 쉬웠으며 젠체하는 느낌이 없었다. 듣자마자 바로 확 호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심은찬이 말했다.

“이 곡이 좋을 것 같은데요. 어중간하게 말고 아예 밝은 분위기라 더 좋은 것 같아요”

타이틀 곡 후보 중 제일 통통 튀는 노래였다.

“저도 그게 어떨까 싶긴 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어요.”

잠깐. 네가 좋다고 하면 안 되는데.

심은찬은 현우영의 특성을 떠올리고는 난감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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