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61)

#56

새삼스럽다는 반응을 보일 법도 했지만 현우영은 그러지 않았다.

짧게 “예.”하고 대답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전부였다.

“……아이고. 형들 난리 났네. 들어가서 쉬어요. 저는 형들 챙길게요.”

심은찬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잖아도 상태들이 심상치가 않았다.

“뭐지? 하나였는데? 두 병이 어디서 나왔지……?”

심은찬 몰래 숨겨 놨던 술인 듯했다.

먼저 얼굴이 벌건 채로 잠들어 있는 정민유 쪽으로 갔다. 얼마 마시지도 못하면서 꼭 자리는 지키려 했다. 정민유를 흔들어 깨워 봤지만 역시나 허사였다. 대충 맥주 석 잔 정도 마신 것 같았다. 그 정도면 아마 아침까지 푹 잠들 터였다. 감기에 걸리면 안 되니 베개와 이불을 가져다가 자리에 깔아 주었다.

음식이 있는 상은 나중에 멀찍이 치워 둘 생각이었다.

“세별 형. 들어가서 주무세요. 내일 저희 스케줄 있잖아요. 다음 싱글 곡도 받아야 하고요.”

“응? 아. 어어. 그렇지 그렇지. 그래야지. 우리에겐 내일이 있으니까.”

이 형도 취했네.

심은찬은 속으로 혀를 찼다.

다행스럽게도 문세별은 꽤 쉽게 방으로 들여보낼 수 있었다. 한 번 비틀거리긴 했지만 이 정도면 준수했다.

그리고 그다음이.

심은찬과 류서오의 시선이 마주쳤다. 얼마나 마신 건지는 몰라도 눈이 살짝 풀려 있었다. 제일 위험한 건 류서오일지 몰랐다.

“은찬아, 심은찬. 이리 와 봐.”

류서오가 책상다리를 한 채로 제 앞을 두드렸다.

“넵.”

심은찬이 바로 대답하며 그 앞에 앉았다.

“할 말이 있다.”

박력 있는 목소리였다. 한참 동안을 쳐다보던 류서오가 겨우 입술을 뗐다.

“우리 은찬이.”

무뚝뚝하고 내성적인 편인 류서오가 평소에는 전혀 하지 않던 호칭이었기에 심은찬은 닭살이 돋았지만 간신히 티를 내지 않을 수 있었다.

“너 고생 많이 한 거 다 알아. 그런데도 옆에서 뭐 하나 도와주질 못해서 내가…….”

류서오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우리 이렇게 인기 얻은 거 사실 네 덕분이지. 네가 아니면 우리가 이렇게, 1위를 할 수 있었겠냐.”

“서오 형 그건 아닌데요.”

주정하는 사람의 상대를 하는 건 아니라고 알고 있었지만 심은찬의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형 말하잖아.”

“넵.”

그러나 바로 제지당했다. 심은찬은 빠르게 포기했다.

“우리 팀 끌어 줘서 고맙다.”

예상도 하지 못했던 말을 류서오가 하기 시작했다.

“잘해 줘서 너무 기특하고 뿌듯하고 그래. 그 말이 하고 싶었어. 해야지, 해야지 했는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더라고.”

“알죠, 알죠.”

“비겁하지만 술 힘을 빌려서라도 얘기하려고, 일부러 좀 마셨어. 그리고……. 아냐. 아무리 그래도 이건 말하면 안 되지. 못 들은 걸로 해 줘.”

마지막에는 혼잣말까지 중얼거리던 류서오가 후우, 하고 내쉬는 숨에서 달큼한 술 냄새가 났다. 거기까지 말을 마친 류서오는 심은찬을 끌어안고 등을 툭툭 두드렸다. 하는 김에인지 뺨에도 쪽 하고 입을 맞춰 와 심은찬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 평상시의 류서오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행동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몇 년을 연습실에서 함께 구르고 가족같이 지냈던 동성의 형이 하는 뽀뽀라니. 소름이, 닭살이 돋았다. 좀 너무한 반응인가 싶었으나 그렇게 느껴 버린 건 어쩔 수 없었다.

뽀뽀를 한 류서오는 만족스러웠는지 심은찬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뭐라고 말하곤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음 차례는 도준서였다.

“야, 도준서. 일어나.”

“어으으, 조금만 더.”

형들에게는 모르겠지만 동갑인 도준서에게는 가차 없는 손길로 등을 두드렸다.

“좀 더 먹을 수 있는데.”

“네 주량치고 많이 먹었어. 일어나, 얼른.”

“으어, 은찬이네?”

새어 나오는 한숨을 굳이 참지 않았다.

“오늘 1위 했다고 이렇게 풀어져 있지. 내일 얼굴 팅팅 부어서 우는소리 하려고.”

“안 해 안 해. 으흐흐. 아! 근데 아까, 서오 형이 뽀뽀하지 않았냐?”

그걸 또 본 모양이었다.

“어, 했지.”

“질 수 없음.”

“뭐라는 거야.”

수상쩍은 대사를 하며 몸을 일으키는 도준서를 피하려 했지만 손목이 먼저 잡히고 말았다. 발로 배를 밀었다가 토하기라도 하면 곤란하기 가슴을 밀어야 하나 계산하고 있을 때였다.

“도와드려요?”

방에 가서 자고 있을 줄 알았던 현우영이 나타났다.

“네, 좀 잡아 줘요.”

“어. 뭐야. 우영이네. 우영아, 우영아.”

목표를 바꾼 도준서가 현우영에게 엉겨 붙었다.

“우리 우영이가 참 잘생겼지. 막내 티는 좀 안 나긴 하지만 그래도 넌 우리 막내다. 알지?”

“예.”

현우영이 심상하게 대답하며 도준서를 잡은 팔을 바로 하려 할 때였다.

도준서의 양손이 그의 뺨을 쥐었다.

쪽.

“……어?”

“…….”

방금 제대로 들은 건가.

쪽, 소리였지. 쪽.

게다가 각도가 애매하게…….

“으악. 도준서 너 뭐 해?”

“막내 예뻐서 뽀뽀해 줌.”

“아이고, 이 술주정뱅이야……!”

실실 웃으며 대답하는 도준서의 등짝에 매섭게 스매시를 날린 심은찬은 슬쩍 현우영의 눈치를 살폈다.

“준서 형 방에 눕히고 올게요.”

“네? 어, 네.”

“은찬이 형은 그냥 계세요.”

그러나 현우영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적어도 소름 끼쳐 하거나 기겁을 하거나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도준서를 부축한 자세를 한 번 고치더니 그대로 방으로 향했다.

현우영 덕분에 뒷정리를 나름 편하게 한 셈이었다.

심은찬은 정민유 근처에 있던 상을 혹시라도 자다가 차지 않게 멀찍이 치워 주며 상념에 잠겼다.

뽀뽀였나? 지금 입술에 하지 않았나?

아무렇지도 않은가? 뭐지?

목장의 양처럼 물음표들이 떼를 지어 머릿속을 뛰어놀고 있을 때였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현우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잘 눕히고 왔어요.”

“아, 수고했어요.”

조금 전까지 왁자지껄했던 숙소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20대 성인 남성 여섯 명이 휩쓸고 간 술자리에는 맥주 1500cc 페트 세 병이 뒹굴고 있었다. 모두 술을 잘하지 못하는 덕분인지 참 저렴하고 빠르게 파했다. 이런 사람들뿐이라면 주류 회사는 아마 금방 문을 닫겠지.

맥락도 없이 그런 생각을 하던 심은찬이 곧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들어가서 자고 있을 줄 알았는데요.”

“안 잔 덕분에 정리하는 거 도와드렸잖아요.”

‘거’라니.

멤버들을 무생물 취급하는 것 같았지만 도와준 것도 있으니 가볍게 넘기기로 했다.

“은찬 형.”

“네?”

현우영의 검지가 심은찬의 뺨에 닿았다. 정확하게는 ‘찔렀다.’

이런 장난을 치는 타입으로는 안 보였는데. 혹시 현우영도 술을 마셨나 싶어 상 쪽을 쳐다보았다. 사이다인 줄 알았는데 설마 술을 섞었나?

그가 술이 취했는지를 가늠해 보았다.

현우영이 손가락이 정확히 세 번째 뺨을 찔렀을 때 심은찬이 그의 손을 잡았다.

“뭐 하는 거예요?”

“뺨이 말랑거리네, 해서요.”

“……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눈썹을 찡그렸다.

“조금 전에 서오 형이 그러셨거든요. ‘우리 은찬이 뺨도 말랑거리네.’라고.”

“아. 아아……. 난 또.”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류서오가 그런 이야기를 한 모양이었다.

“반대쪽도 그럴 텐데요.”

별생각 없이 반사적으로 대답한 심은찬은 합 하고 입을 다물었다. 현우영의 시선이 따가웠다.

“지금 말은 취소요. 습관이 되어서 그랬어요.”

“습관요?”

“팬사할 때 팸팸들이 가끔 물어보거든요. ‘오늘은 어느 쪽 뺨이 말랑해?’ 그런 거.”

현우영의 눈썹이 슥 위로 들어 올려졌다. 조용해서 그런가 분위기가 묘했다.

“어, 그러면 우리도,”

“오늘은 어느 쪽인데요?”

“네?”

“뺨요. 어느 쪽이 더 말랑거리는데요?”

심은찬은 다시 한번 현우영을 쳐다보았다. 무슨 질문이 이 모양이 됐지. 혹시 저 모르는 사이 현우영이 술을 마신 게 아닌가 심히 의심되는 순간이었다.

답을 하려던 심은찬은 잠시 간격을 두었다. 팬들이 물어볼 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현우영이 물어보니 무척 부적절하게 들렸던 탓이다.

“뭘 그런 걸 물어봐요. 그러는 우영이도 준서한테 뽀뽀당한 건 괜찮아요?”

“입술에 안 닿았어요.”

“넴?”

현우영이 무뚝뚝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조금 전에 준서 형 뽀뽀하신 거요. 입술에 닿은 거 아니라고요.”

“그랬겠죠?”

별소릴 다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도준서가 술에 취했더라도 설마 입술에 했을까. 그야 수상한 각도 탓에 의심스럽긴 했지만 정말 입술에 했으리라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

묻지도 않은 말을 술술 하는 현우영은 오늘따라 좀 이상해 보이긴 했다.

“……술 마신 건 아니죠?”

“안 마셨어요. 형이 사이다만 마시라면서요.”

“그랬죠. 정말 사이다만 마신 거 맞죠?”

“술 취한 것처럼 보이세요?”

“음. 쬐금?”

심은찬은 부정하지 않았다. 확실히 현우영의 태도가 조금 이상하긴 했으니까.

“아니면 됐어요. 오늘 수고했어요. 뒷정리 도와준 것도 고맙고요. 들어가서 쉬어요. 내일도 스케줄 있으니까 얼굴 붓지 않으려면 잘 자야죠.”

정말로 안 마신 거면 좀 억울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현우영의 등허리를 몇 번 토닥이며 인사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심은찬에게 계속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많이 억울했나?

하긴 말 잘 들으려고 술에 입도 안 댔는데 오해를 하면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하겠다 싶어졌다. 심은찬은 손을 뻗어 현우영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