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다른 사람이 들으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상당히 의문스러운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다른 멤버들은 1위를 한 기쁨으로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하느라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맞아요. 그러실 분은 아니죠.”
어, 하고 의외인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현우영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심은찬은 잠시 현우영을 마주 보고 웃다가 이내 자신에게 말을 걸어 오는 도준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멤버들의 계산대로 숙소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배달 음식들이 줄줄이 도착했다. 이걸 다 누가 먹나 싶을 정도로 많았다. 정말, 많았다. 매니저도 그 음식들을 보며 기가 질린 듯했지만 오늘은 날도 날이니 별다른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저 다음날 스케줄도 있으니 적당히 하라는 말만 남긴 채 떠났다.
상에 제대로 올라가지 않아 몇몇 개는 바닥에 둬야 할 정도였다. 음식이 너무 많아 보고 있기만 해도 배가 불러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오늘은 마실 거야.”
“저도요.”
“헐?”
“심은찬 웬일이야.”
“민유 형! 은찬이도 마신대!”
“뭐? 은찬이가?”
유난스러운 반응들이었지만 그럴 만했다.
그동안 알코올엔 입도 대지 않던 심은찬이 자청하여 술을 마신다고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원래라면 술을 마실 생각을 하지도 않았을 테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지 않은가.
“한 잔만요.”
그렇게 말하면서 심은찬이 내민 건 손바닥만 한 높이의 컵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김빠지게 뭐 하는 거냐고 타박을 했을 테지만 워낙에 술을 거부하던 심은찬이었던 만큼 멤버들은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헐. 좋아. 그래 오늘이 좋은 날이긴 하지.”
신기해하면서도 더욱 신이 난 멤버들은 희희낙락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 그럼. 우리 리더 형님께서 건배사 한 말씀 해 주세요.”
문세별의 권유에 정민유가 잠깐 생각에 잠긴 듯했다.
“우리 진짜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다들 이렇게 함께해서 좋다. 우리 우영이도 새로 합류해서 고생 많았고, 다른 멤버들은……, 다들 오늘까지 너무 고생했어. 앞으로도 우리 다치지 말고 아프지 말고 속상한 일 있으면 참지 말고 서로 말하자. 다들 너무 수고했다. 파이팅!”
말을 마치며 잔을 들자 다들 손을 높였다.
현우영이 들고 있는 잔에는 사이다가 담겨 있었다. 심은찬이 현우영에게는 아직 이르다고 주장했기에 이렇게 되어 버렸다. 반발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현우영은 아무 이견 없이 사이다를 따른 잔을 받아 들었다.
챙, 하고 잔끼리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건배한 이들이 한 모금씩 들이켰다. 심은찬도 한 모금 목 뒤로 넘겼다.
워낙 적은 양이어서 그런지 한 모금인데도 컵에 있던 술의 절반이 사라졌다.
워낙 술자리를 좋아하는 문세별과 도준서는 차치하더라도 류서오 역시도 즐기는 듯 보였다. 배추에 보쌈을 야무지게 싸서 입에 넣었다. 내일 얼굴이 부을 게 확실했지만 지금은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다섯 종류가 한 상자에 담겨 온 치킨 역시 입에서 살살 녹았다.
시간이 지나 술이 오르자 다들 왁자지껄해졌다. 주량이 제일 약한 정민유 역시 얼굴이 벌겋게 되어서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이전 생에서는 어디 이런 분위기로 술을 먹는 걸 생각이나 했었을까.
배가 불러 조금 떨어진 곳 벽에 기대 있던 심은찬은 새삼스럽게 멤버들 한 명 한 명에게 눈길을 주었다.
이걸 위해서 회귀를 한 걸까.
만약 그렇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 시간을 위해서, 이 장면을 보기 위해서 회귀를 했다고 해도 납득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 만족하고 끝낼 수는 없었다.
이걸 확실한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목표를 이뤄야만 했다.
이뤄서, 이곳에 남아 있고 싶었다. 이걸 제대로 심은찬의 현실로 만들고 싶었다.
“혼자 뭐 하세요.”
눈만 들어 쳐다보니 그곳에 있는 건 현우영이었다.
“음, 그냥요. 생각?”
“옆에 앉아도 괜찮으세요?”
“그럼요.”
심은찬이 제 옆을 손으로 탁탁 쳤다. 현우영이 한 뼘 정도 거리를 두고 옆에 앉았다. 심은찬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심은찬이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현우영은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참 새삼 봐도 봐도 잘생겼다.
어떻게 이런 애가 우리 팀에 들어온 걸까.
컴백 무대 이후, 현우영의 직캠 영상으로 온 커뮤니티가 들썩거렸었다. 망돌이었을 때와 비교해서 대중들에게 노출되는 수준이 달라서였을까. 이해민이 팀에 있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반응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현우영에게는 바로 비주얼 쇼크라는 별칭이 붙었다.
심은찬도 인정하는 바였다.
현우영은 진짜 정말 매우 아주 너무 잘생겼으니까.
1위도 한 날이고 그동안 궁금했던 걸 물어보기에 좋은 타이밍 같았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예. 뭔데요?”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선선히 받아 주었다. 심은찬은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다른 멤버들 쪽을 한 번 본 후 입을 열었다.
“나쁜 의미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시고요. 우영이 같은 친구가 왜 우리 팀에 들어오게 됐어요?”
“하하.”
현우영은 심은찬의 질문을 들은 직후 작게 웃었다.
“그게 궁금하셨어요?”
“그렇죠. 아무래도. 우리 소속사가 대형도 아니고. 솔직히, ……우영이 정도면 대형으로 갈 수도 있었을 텐데. 포텐하이랑 계약도 하고, 그것도 중간 합류를 선택한 이유가 사실 좀 궁금했어요. 메리트가 없잖아요.”
현우영은 심은찬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것처럼 고개를 작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예쁜 쌍꺼풀 아래 있는 색이 고운 눈동자가 과거를 떠올리듯 잠시 멍하게 바뀌었다.
“제 계약 조건을 받아 주는 곳이 지금 소속사뿐이었어요.”
이건 또 생각도 못 했던 대답이었다.
“계약 조건이 뭐였는데요?”
“그만두고 싶을 때 아무 페널티 없이 그만둘 수 있는 거요. 그걸 받아 주는 데가 포텐하이뿐이었어요.”
“……네?!”
심은찬은 제 귀를 의심했다.
정말 제가 들은 게 맞나 싶었다. 그런 걸 계약 조항으로 거는 간덩이 큰 연습생이 있다고? 심지어 그걸 받아 주기까지 했어?
어지간하면, 아니 어지간이 아니라 진짜 어떤 기획사에서도 이런 조건을 받아들이는 곳은 없을 거다. 그렇잖은가. 잘 키워 놨는데 다른 곳으로 이동해 버리면 그동안 투자했던 돈도 못 건지지 않는가. 연습생으로 들어갈 때부터 계약서를 작성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그런데 현우영 정도 되는 수준의 연습생이 어째서 대형에 못 들어갔나 싶었는데.
저런 걸 계약 조건으로 내밀었다면 왜 그랬는지 납득됐다.
아무리 잘나도, 성공이 보장되어 있더라도 리스크가 큰 현우영을 굳이 잡지 않은 거다. 아이돌이 되고 싶어 하는 연습생들은 많고 스타는 그중에서 또 갈고닦아 만들면 되니까.
이런 조건을 받아 준 소속사 사장은 대체 어떤 인물인지 새삼 놀라웠다.
결과적으로는 현우영이라는 사람이 팀에 들어왔으니 잘된 일이었지만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와. 진짜예요?”
“그래도 회사에서 바로는 안 된다고 2년간은 그만두지 못하도록 최소 조항을 넣어서 계약했어요.”
“2년…….”
그래도 그렇지. 첫 계약에서 보통 7~9년 정도의 기간을 잡는 걸 생각하면 2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다. 현우영이 계약 기간을 1년이라고 안 한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심은찬은 벌어져 있던 입을 다물었다.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우영에게만 유리한 조건은 아니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현우영의 입장에서도 불안한 계약이 아닐까. 만약에 잘되지 않을 경우에, 회사에서 계약 시기 이전에 방출해 버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을 텐데. 그런 일말의 걱정조차 하지 않을 만큼 자신이 있던 건가? 아니면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던 걸까?
“그걸 저한테 이렇게 다 말해 줘도 돼요?”
“예, 뭐.”
현우영은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물론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없긴 했으나 비밀 엄수 조항이 분명히 있을 텐데 어리숙한 건지 뭔지 알 수 없었다.
“저는 말하고 다니지 않을 거긴 한데, 원래 그런 계약 조항은 말하고 다니면 안 되는 거예요.”
“물어보셨잖아요.”
“아니, 그래도요. 설마 이런 걸 말해 줄 줄은 몰랐죠.”
소리를 작게 낮추어 말하던 심은찬은 멈췄던 말을 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거예요? 그런 계약 조건으로 하는 거요.”
심은찬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표정 없이 있던 현우영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그는 곧 그린 듯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왜 대답은 하지 않고 웃기만 하지.
“소원은 은찬 형이 들어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
거기까지는 대답하기 싫다는 답이었다. 그리고 뭔가의 이유가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렇게까지 말하기 꺼려진다는데 캐물어 볼 건 아니었다. 심은찬의 궁금증은 호기심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니까 말이다.
어깨를 으쓱하면서 물러나던 심은찬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어떤 사실이 떠올랐다.
이전 생에서 현우영만 한 인재를 왜 본 기억이 없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있었다.
이전 생에서 회귀하기 한 달 전쯤 데뷔하자마자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솔로 가수.
예능에 나와 밝힌 계약 조항으로 유명해져서 누튜브에 관련 영상이 수도 없이 올라왔었다. 현우영은 유명 아이돌 그룹으로 데뷔해서 솔로 수순을 밟은 게 아니라 아예 데뷔부터 솔로로 나왔음에도 엄청난 인기를 끌어모았다.
관련 영상을 일부러 찾아서 보지 않았던 심은찬조차 그의 무대를 우연히 한 번 보고 감탄했던 기억이 있었다. 워낙 우울증이 심각했던 시기이기에 정확하게 어떻게 생겼었는지 제대로 떠올리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 남자 솔로 가수는 확실히 현우영이 맞았다.
“…….”
너가 걔구나.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현우영을 응시했다.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이렇게 같은 팀으로 활동하게 될 줄도.
이전 생에서도 포텐하이와 계약을 했었을까. 만약 심은찬이 성형을 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는 일이었을까 아니면 심은찬이 회귀했기에 새로운 분기점이 생겨난 거였을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현우영이 한 팀이라서 잘됐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심은찬은 현우영의 어깨를 짧고 강하게 툭툭 두드렸다.
“여태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잘해 봐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