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아니, 형. 근데 왜 그렇게 조심조심하세요.”
“맞아요.”
“맞아요. 저희 1위인데 안 기쁘세요?”
도준서의 말에 매니저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그야 기쁘지. 엄청 기쁘지. 근데 너무 기대를 하면, 좀 그러니까.”
“혀엉. 저희 못해도 2위인 거예요.”
말도 안 된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심은찬의 이야기를 들은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2위네. 우리 애들이 2위인 거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매니저를 보며 심은찬은 입술을 꽉 씹었다.
기뻤다. 그리고 욕심이 났다.
만약 1위가 아니어도 불과 몇 개월 전까지 팀명도 생소했을 사람이 많았던 B the 1에게는 굉장한 일이었다. 만약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상황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심은찬은 눈앞에 있는 정상이 탐났다.
심은찬은 자신이 이루어야 할 목표를 다시 한번 상기했다.
연말 대상.
시스템 창은 연말 대상에 해당하는 상 목록을 쭈욱 보여 주었고 그중 하나라도 수상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전 생으로 돌아가게 될 거라고 말이다.
지금 이룬 것들을 놓치기 싫었다.
그러려면 1위를 해야 했다.
1위를 한다고 끝은 아니지만 목표까지 가는 길목에 있음은 분명했다.
이렇게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심은찬은 창밖을 쳐다보며 아랫입술을 다시 한번 잘근거렸다.
기대는 하되 실망은 하지 말자는 이상한 다짐을 하며 무대에 오를 준비를 했다.
“얘들아. 이리 와.”
손짓을 하는 정민유 근처로 둥글게 원을 그리며 모여들었다. 머리가 닿을 듯 말 듯 한 상태로 모이자 정민유가 말했다.
“여태까지 잘했어, 얘들아. 오늘 무대도, 잘하자.”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늘 하는 일이긴 했는데 오늘따라 유독 다른 느낌이 들었다. 여러 가지 감회가 드는 듯했다. 안 그럴 수가 없었다.
심은찬은 도준서와 눈을 마주쳤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감정이 서려 있었다.
“셋, 둘. 파이팅……!”
B the 1은 팔을 뻗어 옆에 있는 멤버의 어깨를 감싸고 외쳤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무대 위로 향했다. 모든 무대가 똑같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좀 더 기합이 들어가거나 조금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무대가 있기 마련이었고 오늘이 바로 그랬다.
그들은 대열대로 맞춰 서서 음악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중간부터 노래를 틀어도 바로 춤을 출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연습한 노래였다. 익숙한 전주가 흘러나왔고 평소처럼, 평소보다 더욱 열심히 무대를 소화했다.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응원하는 팬들의 소리가 좀 더 힘을 내라는 듯 들렸다.
1위를 받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빨간 불빛이 들어오는 카메라를 응시하며 안무를 했다. 평소와 같은 무대라고 생각하려고 했지만 1위 후보라는 걸 들으니 아무래도 기합이 들어갔다.
B the 1과 교대하듯 프로젝트 K가 다음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두 팀은 스치듯 지나치며 무대 잘했다는 덕담과 무대 잘하라는 응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 잠깐의 틈을 타 심은찬은 프로젝트 K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하준수의 상태 창을 확인해 보았다.
인기가 많은 아이돌의 상태 창은 어떤지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는데 하준수가 그 대상으로 꼭 부합했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K 자체도 인기가 많은데 그중에서도 메인 멤버인 하준수의 상태 창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지 않을까. A로 도배가 되어 있을 거라고 예상을 하며 떠오른 상태 창을 재빠르게 읽었다.
[이름: 하준수
스타성: B+
가창력: B+
퍼포먼스: C
외모: A
멘털: B
특성: 여기를 봐(주목도/C+) 활성화 중.]
“……어?”
두 눈이 의심스러웠다. 제대로 본 게 맞나 싶었다.
다른 사람의 상태 창이 잘못 뜬 거 아닐까. 하지만 확실히 하준수의 상태 창이 맞았다.
한데 능력치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다.
이게 프로젝트 K 메인 보컬 하준수의 상태 창이라고?
심은찬은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로 서 있었다.
단순 비교를 해 본다면 B the 1의 멤버들 상태 창 랭크 쪽이 더 높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심은찬 본인의 상태 창과 비교를 해 봐도.
그런데 지금 두 그룹 사이의 이 인기와 인지도 차이는 뭐란 말인가.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 분명 어딘가가 달랐기에 이런 결과가 난 거다. 하지만 상태 창만 보면…….
“……대체 우리가 왜 못 뜬 거지?”
속에 있던 말을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뱉어 낸 심은찬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들은 사람은 없었다.
“은찬아, 얼른 와!”
“네, 갈게요!”
부르는 소리에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문 심은찬은 자리를 이동했다.
드디어 무대를 마치고 1위를 발표하는 순간이 됐다.
출연한 모든 가수들이 나와 모니터를 쳐다보았다. 입이 바싹 마르는 상황에서 심은찬은 가만히 모니터를 응시했다.
3에서부터 숫자가 하나씩 줄어들었다.
“1위는……!”
“축하합니다! 프로젝트 K!”
MC의 입에서 발표된 팀명은 B the 1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프로젝트 K는 앨범 판매량도 그들보다 많았고 인기도 높았다. 지지하는 팬들의 숫자도 훨씬 많았다. 축하드린다는 인사를 건네며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후.”
계단을 내려오며 한숨을 내쉰 심은찬은 그제야 제가 숨을 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기대는 많이 하고 있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프로젝트 K와 같은 후보인데도 그들을 누르고 1위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었다.
엄청난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후보에 올랐으니까 욕심이 났었다.
그걸 아니라고 할 생각은 없다.
“은찬 형.”
“아. 우영아.”
제 이름을 조용하게 불러 오는 현우영을 돌아보았다.
“오늘 무대 잘했어요. 고생했어요.”
웃으면서 현우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다음엔 1위 할 거예요.”
이건 뭐지.
말만 들어 보면 위로인데 말투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이건 위로라기보다는, 그래. 다음을 기약하는 선언처럼 보였다.
갑작스러운 발언에 심은찬은 눈을 크게 뜨고 현우영을 쳐다보았다.
아무렴 어떤가. 기죽지 않고 팔팔한 상태라서 다행이었다.
심은찬은 풋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죠? 약속한 거예요? 못 하면 벌칙 해요.”
“벌칙요?”
뜬금없는 제안에 되물어 보던 현우영은 곧 그걸 받아들였다.
“좋아요. 벌칙 할게요. 어떤 걸로 할까요?”
이걸 정말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는데. 심은찬은 어떤 벌칙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당장은 생각 안 나니까 그때 말할게요.”
“근데 제 말이 맞으면 은찬 형이 벌칙받으시는 거예요?”
“어……, 그렇게 되나요? 음. 그래요. 좋아요.”
안 하겠다 하는 것도 좀스럽게 느껴져 시원하게 받아들였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내기에 뭔가 잘못된 거 아닌가 싶었지만 이내 흘려보냈다.
“근데 벌칙이라고 하면 좀 그러니까 소원 들어주기로 해요.”
심은찬이 제안했다.
벌칙이라는 단어는 이제 신물이 난다.
“저는 괜찮아요.”
“그래요. 그럼 1위 하면 우영이 소원 들어줄게요.”
시원스레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생각해 보면 참 웃긴 상황이었다. 농담으로라도 1위로 내기를 하다니. 게다가 그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현이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일도 다 있구나 싶어 감회가 새로웠다.
N챔을 마치고 멤버들은 숙소로, 심은찬은 개인 스케줄을 하러 개별로 이동하기 위해 차를 나눠 탔다. 건물 밖에서 팬들이 B the 1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 밖에서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워낙 사람들이 많아 소리가 겹쳐 들린 데다 차분히 다시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오랜 시간 머무른 것이 아니었기에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팸팸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이내 알게 되었다.
코스모스에 들어간 심은찬은 메시지 함을 가득 채우는 팬들의 이야기에 잠시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이 하는 말은 거의 한 가지였다.
미안하다, 는 것.
1위를 시켜 주지 못해서 미안해.
좋은 무대 보여 줬는데 1위 못 시켜 줘서 미안해.
우리가 더 열심히 투표 못 해서 미안해.
거의 다 그런 메시지였다.
“…….”
말문이 막혔다.
그들이 심은찬에게, B the 1에게 미안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심은찬이 그들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해도 부족했는데.
가슴 안이 견디기 어려운 따뜻한 무언가로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하던 심은찬은 팬들에게 보낼 메시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팸팸들 안녕! 왜 이렇게 미안해해요. 미안해하지 말아요. 절대 절대!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하는 거래요.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말기! 오늘 무대 너무 만족스러웠고 우리 팸팸들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앞으로 우리 함께할 시간 많으니까 더 좋은 무대 보여 줄게요. 우리가 더 열심히 할게요. 약속해요.]
메시지를 입력하고 전송하자 그 답으로 보이는 메시지들이 쉼 없이 올라왔다.
예쁜 말 너무 고마워
은찬이가 행복하기를
은찬아 네가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으면 좋겠어
다음엔 꼭 1위 가자!
너한테 위로를 받은 만큼 네가 행복했으면 해 우리 1위 꼭 하자
빠르게 올라오는 메시지가 모두 다 예쁘고 사랑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