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이게 이런 식으로도 연결되어 랭크 업이 가능하구나, 싶었다. 그렇다면 심은찬 자신의 상태도 보정을 받아 랭크 업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심은찬은 빠르게 류서오의 상태 창을 확인해 보았다.
[이름: 류서오
스타성: B+
가창력: A
퍼포먼스: A
외모: B+
멘털: B+
특성: 포커스 온 미(주목도/B), 네가 하면 나도 한다(경쟁 시 특화/A)]
멘털이 C+ 랭크였던 모양이었다.
멘털 랭크 업을 했을 뿐인데 연달아 두 개의 능력치도 상승하니 보너스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처음 퀘스트 대상이었던 정민유의 능력치가 하나만 올라갔던 건 포인트나 수치가 채워지지 않아서였던 걸까.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만약 정민유 역시 또 다른 능력치를 올릴 수 있다면 동반 랭크 업을 노려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심은찬은 정민유의 상태 창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다. 비활성화되어 있던 그의 능력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좋을 텐데. 참 아쉬웠다.
류서오의 상태 창을 살펴보던 심은찬의 눈길이 특성 쪽에 멈췄다.
경쟁 시 특화되는 특성이 있는 건 의외로 납득이 갔다. 그동안 함께 지냈던 시간을 되돌아보면 확실히 류서오는 조용하면서도 지기 싫어하는 기질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특성으로까지 있는 것인 줄은 몰랐다. 생각보다 그 기질이 강한 거 아닐까, 하는 추론을 마쳤다.
문득 심은찬은 다른 멤버들의 상태 창을 보면서 느꼈던 위화감을 깨달았다. 심은찬의 상태 창처럼 보정 전 항목이 따로 없이 그냥 현재 능력치의 랭크만 표시되어 있었다. 뭔가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대체 뭘까.
더 깊게 생각하기 전 심은찬은 자신의 머리를 어루만지던 류서오의 손길이 멈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은찬아.”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심은찬을 불렀다.
“이제 일어나.”
“넵.”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냐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는 게 잘 느껴졌다. 심은찬은 류서오의 무릎을 베고 있던 머리를 바로 치켜들었다.
우연인지 현우영과 눈이 마주쳐 무슨 일인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해 보라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을 마시고 고개를 돌리는 걸 봐서는 정말 별 용건이 없는 모양이었다.
연습은 그 이후로도 한참을 이어졌다.
내일 오후에는 음악 방송과 팬 사인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앨범 판매 개시한 후 3일째 되는 오늘.
B the 1의 7번째 싱글 Get Ambitious 앨범 판매량은 10만 장을 넘었다.
* * *
음악 방송 직후에 잠깐 쉬다가 팬 사인회를 진행해야 했다.
“형 저희 팬사컷은 몇 장이에요?”
문세별이 매니저에게 하는 질문이 들렸다. 각자 다른 일을 하던 멤버들의 귀가 쫑긋 서는 게 느껴졌다. 매니저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
“대면이 90장.”
“……90장요?”
듣던 심은찬이 놀라서 되물었다.
90장이라니.
컴백 후 첫 번째 팬 사인회는 보통 많은 인원이 몰리기 때문에 컷 수가 높다는 건 알고 있는데 90장이라니. 말도 안 됐다. 심은찬은 빠르게 계산을 해 보았다. 앨범 한 장당 가격이 14,500원이었다. 만오천 원이라고 해도 90장이면…….
심은찬은 눈을 깜빡였다.
팬 사인회라고는 하지만 한 명당 길어야 2분 남짓한 시간을 얘기할 수 있었다.
시급으로 따지면 정말 말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 시급까지 갈 것도 없었다. 분당 62만 원꼴. 1초에 만 원씩을 지불하는 거였다. 그저 자신들과 이야기하기 위해. 얼굴을 보기 위해 그런 거액을 지불하는 거였다.
아낌없이 지불한다는 생각 역시 아이돌의 관점에서였다.
돈이 썩어 나는 것도 아니고 그 돈이 아깝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액을 기꺼이 쓰면서 오는 거였다.
이전에도 생각을 하긴 했지만 팬들은 자신들을 보러 오기 위해 엄청난 돈을 쓰고 있었다. 한창 집에 처박혀 있던 이전 생에서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팬들은 팬 사인회에 참가하는 것도 그냥 하는 게 아니었다.
헤어와 메이크업, 심지어 팬 사인회를 위해 옷도 새로 구입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뿐이 아니라 개인 선물을 준비하는 건 또 별도였다.
이전 생에서 한창 활동하던 시기에는 이런 걸 잘 몰랐다. 무심해서 신경을 안 썼다는 게 아니라 설마하니 그렇게까지 수고와 노력을 했을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탓이었다.
그만큼 팬들은 이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매회 앨범을 많이 사서 자주 오는 팬도 있을 테지만 그렇지 못한 팬들도 있다. 아이돌에게는 매번 있는, 특별할 거 없는 팬 사인회일 테지만 팬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이번 한 번의 팬 사인회가 마지막이자 유일한 만남인 경우도 있었다.
팬 사인회에 참석해 주는 팬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최선을 다했었지만 지금은 거기에 더해 어떤 의무감까지 생겼다.
심지어 이번에는 그때보다 팬사컷이 말도 안 되게 높았다.
심은찬은 현우영을 쳐다보았다.
현우영은 팬 사인회가 이번이 처음이었다. 뭐라도 알려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아마 알아서 잘하긴 할 테지만 말이다.
“우영아.”
“예?”
“팬 사인회 처음이니까 좀 알려 줄 게 있어서요.”
그는 현우영의 옆에 앉아 입을 열었다.
벤치 형식의 의자이긴 했는데 성인 남자 둘이 앉기엔 조금 좁았다. 서로의 허벅지가 맞닿아 따끈한 체온이 천 너머로 느껴졌다. 현우영은 좀 불편한 것처럼 닿은 부분을 쳐다보았지만 심은찬은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금방 끝나니까 좀만 참아라.
“이제 우리 대면 팬 사인회 할 건데요, 명심해야 할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우선 팸팸들이 무슨 말을 했을 때 ‘아, 진짜요’나 ‘아, 정말요’ 금지.”
“아.”
현우영이 한마디를 하더니 곧 입을 다물었다.
“지금 ‘아, 진짜요’ 하려고 했죠.”
심은찬은 눈을 가늘게 뜨며 현우영을 쳐다봤다. 다시 한번 강조하듯 “그거 절대 안 돼요.”하고 말을 이었다.
“그 대답이 제일 무성의한 거예요. 밈도 나올 정도니까 정말 하면 안 돼요. 뭐하면 팬이 말한 거를 똑같이 따라서 되물어도 좋아요. 그것도 안 되긴 하는데 ‘아, 진짜요’보다는 나으니까요.”
강조하듯 검지를 펴서 얘기한 심은찬은 손을 내려놓았다. 자리가 좁아서 손 두기가 마땅찮아 현우영의 허벅지 쪽에 살짝 걸쳐 두었다. 바지 너머로 현우영의 다리가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했다.
현우영이 스킨십을 유달리 싫어하는 것 같진 않았었다. 그런데 이렇게 닿는 걸 싫어하면 팬 사인회 때 어떻게 하려고 이러나 걱정은 되었지만 지금 얘기할 만한 건 아니었다. 설마 팬들이 손깍지 하자고 할 때 못 하겠다고 정색하진 않겠지.
“동영상이나 사진을 찍는 팬들도 많을 거예요. 그러니까 절대 무표정으로 있지 말아요. 얼굴 근육이 떨려도 웃어요. 팬 사인회 끝난 다음에야 무표정해도 좋은데 팬들 있는 공간에서는 안 돼요.”
“예.”
현우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순순해서 제대로 알아들은 건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제 말, 잘 들은 거 맞죠?”
“예.”
눈앞의 현우영은 갑자기 yes봇이 된 것 같았다.
심은찬은 그의 눈동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원래대로라면 저 말만 하고 일어나려고 했는데 알아들은 게 맞는 걸까 확신이 서지 않아 계획에는 없던 말을 덧붙였다.
“음, 체감이 안 될 때는 이렇게 생각해요. 우리 팬사컷 들었죠? 돈으로 따지면 어마어마한 액수에요. 초당 만 원꼴이니까. 돈 받은 값은 해야 한다, 이렇게요.”
“예.”
“진짜 알아들은 거 맞아요?”
“예.”
“……아, 진짜.”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현우영이 예스봇이 되어 버렸다. 심은찬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지켜보고 있다는 의미로 검지와 중지를 세워 자신의 눈과 현우영의 눈을 번갈아 가며 가리켰다.
“얘들아 이동하자.”
정민유의 말에 멤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팬 사인회 장소로 움직였다. 장소는 차를 타고 20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주차장에서부터 기다리는 팬들이 여럿 보였다. 차에서 내려 이동할 때마다 셔터 음이 들렸다.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자 억눌린 소리와 멤버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드디어 팬 사인회 현장에 도착했다.
차례에 맞춰서 의자에 주르륵 앉은 팬들이 보였다.
팬들이 준비한 동물 모양 머리띠를 쓰기도 하고 그들이 물어보는 말에 대답을 하기도 했다. 심은찬은 멍멍이 귀에 조화가 달린 머리띠를 한 상태에서 얼굴에 체인을 둘렀다. 어느 팬이 선물해 준 머니 건을 작동시키니 그 안에서 심은찬의 사진이 박힌 가짜 지폐들이 쏘아졌다. 잘못해서 그걸로 도준서를 맞히긴 했지만 말이다.
“어, 죄송해요. 일부러 아닌 거 알죠?”
“네. 잘 알죠. 여러분, 보셨죠. 제가 이렇게 삽니다.”
능청스러운 도준서의 멘트에 팬들이 와르르 웃었다.
인덱스로 표시된 부분을 펼쳐서 사인을 하는데 이름이 적힌 경우는 없고 보통 별명을 적어 놓는다. 그중에서 ‘공주’라고 표시된 부분이 있어서 이게 누굴까 싶어 펼쳐 보니 현우영의 사진이 나왔다.
“우영이가 공주예요?”
“네? 아, 네, 네!”
“우와. 우영이 부럽네. 우영아 이것 봐.”
심은찬이 현우영을 부르며 적어 놓은 메모를 손으로 가리키자 그가 순간 입을 벌리더니 웃었다.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셔터 음이 마치 박수 소리나 폭포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심은찬은 바로 눈앞의 팬에게 주의를 돌렸다.
“저도 멋진 별명 만들어 주세요. 누나.”
“은찬이는 팬들 많이 있잖아.”
“누나는 한 명뿐이잖아요.”
눈을 마주치며 웃자 앞에 있던 팬이 숨을 삼키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별명이 생각 안 난다며 어떡하냐고 끙끙거리는 팬에게 꼭 지금 말해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할 때 즈음엔 시간이 다 되어 새로운 팬의 차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