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61)

#37

“예. 고맙습니다.”

현우영의 대답을 들은 심은찬은 그의 손을 잡아 손바닥 위에 다 쓴 화장 솜을 올렸다. 멀뚱하니 있는 그의 손을 살며시 쥐여 주며 웃었다.

“쓰레기는 우영이가 버려 주세요.”

심은찬이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안에서 샤워를 마친 정민유가 나왔다. 마침 잘됐다고 생각하며 그와 교대로 욕실 안으로 들어간 심은찬은 재빠르게 탈의하고 따뜻한 물을 틀었다. 하루의 피로가 물에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 * *

금요일 저녁.

멤버들 모두 옹기종기 거실의 티비 앞에 모여 앉아 있었다.

오늘이 바로 심은찬이 출연한 <초승달 피는 여름밤 하늘 꽃>의 첫 방영 날이었다.

심은찬 부분은 스케줄상 일찍 끝났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직 촬영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심은찬은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연습실에서 연습을 하다가도 멍해 있거나 하기 일쑤였다.

점심 무렵엔 팬 소통 앱인 코스모스를 켜 보았다.

드라마 시청률 잘 나올 거라고 응원하는 메시지가 잔뜩이었다. 주르륵 훑어보던 심은찬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우리 팸팸들 점심 맛있게 먹었어요? 오늘 제가 촬영한 드라마 ‘초승달 피는 여름밤 하늘 꽃’이 첫 방송하는 날이에요. 후-하. 후-하. 긴장되네요. 팸팸들 저랑 함께 본방 사수 같이 해요!]

메시지를 보내자 팬들이 알겠다고 하며 답을 보내 주었다. 하트며 웃는 이모티콘이며. 그 모두 심은찬을 향한 응원이었다. 물론 간간이 올라오는 비아냥 섞인 메시지도 있었지만 그런 건 흘려보낼 수 있었다.

본방이 시작하기 전, 광고가 나오는 걸 보며 멍하게 있던 심은찬은 제 이름을 부르는 것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은찬이 또 맹꽁이 됐다.”

“네? 맹꽁이요?”

류서오가 한 말에 심은찬이 눈을 깜빡거리며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자 그가 심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또 뺨 부풀리고 있잖아. 이렇게.”

류서오가 심은찬 흉내를 내듯 양 볼에 공기를 빵빵하게 넣어 보였다. 심은찬은 이전에 김휴인이 말했던 걸 떠올렸다.

‘그거 버릇이야? 뺨에 공기 넣고 입술 잘근거리는 거.’

무의식중에 또 그랬던 모양이었다.

류서오는 목 뒤를 슥슥 문지르는 심은찬을 보더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진짜 긴장했나 보네. 농담해서 미안해.”

“네? 아뇨. 아뇨 아뇨. 긴장하고 있는 건 맞는데요.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어서 그래요. 형이 사과하실 이유는 없어요.”

“음.”

류서오는 심은찬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류서오는 그와 동갑인 문세별과는 달리 생각을 얼굴에 잘 드러내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래, 그러면.”

류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억. 시작한다.”

“한다, 한다. 준서야 빨리 와. 한다.”

문세별과 정민유의 소란스러운 목소리에 화면을 보니 오른쪽 상단에 있던 타이틀이 사라졌다.

주문한 야식을 받으러 현관에 나간 도준서가 비닐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야식으로 주문한 보쌈들을 꺼내자 냄새가 거실에 퍼지기 시작했다.

심은찬은 제 손끝에서 피가 싹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손가락을 주물럭거렸다. 손은 차가운데 땀은 또 축축할 정도로 나고 있었다.

SS급 멘털 일해라. 일해.

아무리 특성이 말랑거리는 강철이라고는 하지만 SS급인데 너무 일을 안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심은찬은 입술을 깨물거리며 화면을 응시했다. 편집본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출연했던 배우들과 만든 단톡에서도 긴장된다는 카톡을 주고받았는데 드라마가 시작한 순간부터 거짓말과도 같이 조용해졌다.

드라마는 화사하고 밝은 분위기로 우하연과 우하연의 오라비인 우하길의 행복한 한때로 시작했다. 색감까지 편집을 거쳤는지 심은찬의 기억에서보다 훨씬 따뜻하고 화려한 느낌이 났다.

우하길이 죽는 장면과 우하연이 범인을 찾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이 스피디하게 전개되었다.

그리고 때는 흘러 3년 후.

남장을 하고 화랑에 잠입한 우하연이 크로스 오버되었다.

당찬 포부를 가진 채 문 안으로 들어가는 우하연과 그녀를 발견한 서길영과 연운을 차례로 비추었다.

[누구야? 새로 들어온 앤가?]

[어. 그런 것 같네.]

서길영의 질문에 연운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대사할 때 어색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염려했던 것보다는 자연스럽게 들렸다.

“……헐.”

“우와.”

“……와.”

“…….”

심은찬은 화면에 나오는 게 정말 자신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장본인조차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뽀얗고 예쁜 얼굴로 화면에 송출되고 있었다. 숨이 막혀서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호흡도 멈춘 채 화면을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멤버들이 전부 자신 쪽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화면이 좀, 좀 그렇죠?”

심은찬이 머쓱하게 뺨을 문지르며 웃었다. 사기급으로 잘 나오지 않냐는 의미를 담고 한 질문이었다.

“맞아. 야, 화면이 실물을 못 따라가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정말로. 은찬아. 아니 이렇게 입체적으로 잘생겼는데 카메라가 잘못했네.”

“은찬아, 저기 나온 것처럼 긴 머리 하지 그랬냐. 잘 어울리는데.”

“……형들? 준서야? 저기요?”

이 사람들이 지금 자신을 놀리는 건가 싶은 합리적인 의문이 들었을 즈음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현우영까지 거들었다. 심은찬은 제 옆에 앉은 현우영을 쳐다보았다.

얘는 또 왜 이래.

“……다들 저 지금 놀리시는 거죠.”

“은은한 은찬이를 왜.”

“형.”

“야, 근데 이런 걸로 왜 놀려. 우리가 그렇게 못된 놈들처럼 보이냐. 진짜야.”

문세별이 하는 말에 멤버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들 이렇게 나오니 정말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일단 좀 보자. 뒤 내용 궁금해.”

류서오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다들 무언의 긍정을 하며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용은 스피디하게 진행이 됐지만 섬세하고 화려한 색감의 화면은 한 장면 한 장면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심은찬이 기억하는 이전 생의 드라마보다 더 피부는 화사하고 예쁘게, 그리고 배경은 마치 공들인 조형물처럼 나와 눈이 즐거웠다.

심은찬은 자신의 첫 등장이 끝나자 긴장이 조금씩 풀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차가웠던 손가락도 정상 체온으로 돌아왔다.

핸드폰으로 코스모스를 확인해 보니 메시지들이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다들 실시간으로 드라마를 보며 메시지를 보낸 모양이었다.

팬들이 보내 주는 응원을 보고 있자니 그들이 무척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실제로 심은찬이라는 존재와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람도 아니고 그저 화면으로 보거나 했을 뿐인데도 이렇게 무한한 응원을 보내 주고 있었다. 심지어 메시지 보내는 게 무료도 아닌데 말이다.

누군가가 이렇게 자신을 생각해 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기쁘고 감사했다.

그건 금전적인 것뿐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더 깊은 무언가가 거기 있었다.

가슴이 따뜻한 걸로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말랑거리는 무언가로.

한시라도 빨리 팸팸을 만나고 싶었다. 드라마도 물론 좋지만 그것보다 B the 1인 심은찬으로 무대에서 만나고 싶었다.

안무는 완벽히 했던가.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지 않았던가. 노래는. 랩은 어떻지? 그것도 다 만족할 만한 수준이 됐나? 조금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좀 더 연습하면 그 길이 보일지도 몰랐다.

갑자기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얼른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연습실에서 오늘보다 더 열심히 할 자신이 있었다.

심은찬은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TV를 응시했다.

화면 가득히 자신의 얼굴이 나올 때엔 민망하긴 했다. 무대와 드라마의 간극이 좀 있긴 했으나 그래도 여태까지 화보 촬영이나 콘셉트 포토 촬영을 했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못 볼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대사도 그렇고 몸을 움직이는 것도 걱정했던 것보다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심은찬을 포함한 모두가 드라마에 집중을 하느라 간헐적으로 오고 가던 대화가 잦아들었다.

뺨에 닿는 시선이 느껴져서 현우영 쪽을 쳐다보니 그가 제 옆얼굴을 보고 있었다. 한 번이 아니라 드라마가 하는 동안 몇 번이나 느껴졌다. 왜 저러나 싶었지만 현우영은 그를 보던 시선을 다시 TV쪽으로 돌릴 뿐 이렇다 할 말을 하진 않았다.

네 번째 시선이 느껴졌을 때 결국 심은찬이 참지 못하고 먼저 물어봤다.

“왜요? 무슨 할 말 있어요?”

“아뇨, 그냥.”

현우영이 선선히 고개를 흔들었다.

“예쁘게 나오긴 했는데 실물 느낌이 안 나서요.”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고민하게 만드는 대답이었다. 실물 느낌이 안 난다는 게 실물이 낫다는 얘기일까 못났다는 얘기일까. 아까 전에 했던 말도 그렇고, 현우영은 워낙 오해할 만하게 말을 하는 타입이니까 아무래도 전자일 것 같긴 한데 그래도 확실히 하고 넘어가는 게 나을까.

“네. 잘 찍어 주셨죠.”

“예. 화면으로도 예쁘긴 해요.”

두 번째다.

심은찬은 현우영의 말에 잠시 멈칫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같은 멤버한테 예쁘다는 표현을 이렇게 한다고? 싶었지만 정색을 하기에도 뭐하다. 그렇잖은가. 예쁘다고 하지 말라는 것도 웃기다. 괜히 그랬다가 과민 반응한다는 소리를 듣기 싫었다.

그렇다고 예쁘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넘기기도 뭐하고.

심은찬은 현우영 쪽을 돌아보았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