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61)

#36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고 양쪽 다 채광이 끝내주게 좋았던 덕분에 별도의 조명이 없어도 충분할 정도였다.

이전 생에서 찍었던 어두컴컴한 어둠의 자식들과는 확연히 다른 뮤직비디오가 될 것이 분명했다. 기분 좋은 설렘에 심은찬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먼저 도착한 촬영 팀은 이미 B the 1이 오면 바로 촬영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맞춰 놓고 있었기 때문에 대기 시간 없이 그들은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돈이 많은 기획사의 경우엔 여러 콘셉트로 며칠에 걸쳐서 촬영을 한다고는 하지만 소소소기획사 포텐하이의 B the 1은 그렇지 못했다. 총 세 개의 다른 콘셉트를 오늘 하루 동안 촬영해야 했다. 그러려면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촬영 시작합니다!”

그 소리에 맞추어 대열에 맞추어 서자 잠시 뒤 익숙한 반주가 흘러나왔다.

그동안 연습했던 걸 되새기며 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뮤비 촬영은 예상했던 것보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단체 안무 신은 다 끝났고 개인 촬영을 순서대로 하는 중이었다. 끝난 멤버고 아직 촬영 전인 멤버고 쉬는 사람 없이, 땀이 흘러 메이크업이 망가지지 않도록 이마에 티슈를 붙인 채로 모니터링에 열중하고 있었다.

두 번째는 처음의 제복보다는 조금 더 러프하게 셔츠에 검은 슬랙스 복장이었다. 다시 단체 안무 컷을 찍고 그 이후에 단독 숏을 찍는 것을 반복했다. 마지막은 조금 더 편안한, 색이 다양한 사복 차림이었다.

뮤직비디오 촬영을 하는 내내 누구 하나도 불평하지 않았고 지친다며 대강 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한 뮤비 촬영은 새벽 2시가 훌쩍 넘긴 시간까지 계속되었다. 마무리가 되었을 때에는 스태프고 멤버들이고 전부 녹초가 되었다. 심은찬은 이 늦은 시간까지 고생한 스태프를 향해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했고 다른 멤버들도 그런 심은찬을 따라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했다.

인사는 꼬박꼬박 빼먹지 말고 해야 한다. 인사를 잘해서 마이너스 될 일은 없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멤버들은 거의 실신 상태로 차에 타자마자 잠들었고 심은찬 역시 마찬가지였다.

숙소에 도착해서 저마다 제일 먼저 씻겠다고 아우성을 칠 때 류서오 혼자 유유히 들어가 제일 먼저 씻고 나와 침대에 누웠다. 그걸 보며 다들 허탈하게 웃었고 공평하게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했다.

심은찬이 오늘도 제일 꼴찌였다.

벽에 기대앉아 순서를 기다리던 심은찬은 씻고 나오는 현우영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오늘 고생했어요.”

“예, 은찬 형도요.”

“피곤하죠. 내일은 재킷 촬영 있으니까 얼른 들어가 쉬어요.”

조금 앉아서 쉬었다고 그래도 기운이 좀 났다. 웃으며 말하던 심은찬은 생각해 보니 오늘 현우영에게 칭찬을 제대로 안 했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 헤메코 되게 잘 어울렸어요.”

현우영의 시선이 심은찬에게 돌아왔다.

“예, 형도. 오늘 멋지셨어요. 음. 수세미……, 아니. 호박 같았어요.”

“……. ……네?”

심은찬은 순간 제가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호박 같으셨다고요.”

“아니. 그건 들었어요.”

반복해 말하는 현우영의 말을 가로막은 심은찬은 미간을 찌푸렸다.

현우영은 솔직한 편이다. 에둘러 말하는 것보다는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이라는 건 알고 있는 사항이었는데 지금 건 좀, 아니 꽤 많이 센 발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현실적인 나이가 현우영보다 많다고 해도 아닌 건 아니지 않은가.

“호박? 지금 호박이라고 했어요?”

“예? 예. 호박요. 아. 애호박 말고 단호박요.”

현우영은 어디까지나 매우 평연한 어투였다. 애호박이고 단호박이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떤 호박이든 그게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호박은 호박인데.

심은찬은 오늘 제가 현우영에게 뭘 잘못했나 우선 되짚어 보았다. 아무리 반추해 보아도 짚이는 데가 없었다.

특히나 오늘 헤메코는 근래에 했던 것 중에 정말 잘됐는데. 그걸 보고 호박이라니.

“호박 같다는 말이 가진 보편적인 의미가 뭔지는 알죠?”

속사포처럼 터져 나오려는 감정을 누른 심은찬이 천천히 또박또박 물어보자 현우영이 입을 다물고 눈썹을 슬쩍 위로 올렸다.

“단호박은 귀여워요.”

“…….”

심은찬은 입을 다물고 현우영을 쳐다보았다. 아니 노려봤다는 표현이 더 맞을는지도 몰랐다.

심은찬은 여태껏 자신이 현우영을 보면서 생각했던 단어들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고 있었다. 조각, 화보, 축캐……. 그런데 현우영은 그런 심은찬에게 호박 같다고 했다. 호박. 호박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사람에게 호박 소리를 들을 만큼 못난이는 아니었다.

“단호박 본 적 없으세요? 이만한 크기에 옹골종골하게 생겼는데요.”

“아니, 그건 저도 알거든요.”

목소리가 곱게 나가지 않았다.

“제 얼굴 어디가 호박처럼 생긴 건데요.”

“단호박요.”

그놈의 단호박.

“단호박이든 애호박이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요. 잘 봐요.”

괜한 오기가 생겨서 벌떡 일어나 현우영 쪽으로 얼굴을 디밀었다. 현우영은 잠시 주춤하는 듯하더니 가만히 심은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문제는 심은찬도 현우영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정말, 말도 안 되게 잘생겼다.

이해민도 잘생겼다고 생각했지만 현우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압도적이었다. 이 정도면 잘생겼다기보다는 아름답다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짙은 눈썹과 진한 쌍꺼풀. 선하게 생긴 눈매에 중심부의 콧대는 오똑하고 곧았다. 입술 역시 적당한 크기에 붉고 도톰했는데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잘생길 수가 있는 건가 의문이 들었다. 젖은 머리 역시 일부러 이렇게 세팅을 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아니, 어떻게 모공도 안 보일 수가 있지. 인간 맞나.

이쯤 되니 진짜 CG로 만든 인간 같았다. 아무리 봐도 현실감이 없었다.

……그래. 이렇게 생긴 현우영 눈에는 심은찬이 호박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싶은 납득이 어느 순간 들었다.

현우영의 상태 창이 떠오른 것도 그것과 동시였다.

[너…… 그런 거 좋아하니?(독특한 심미안/A)]

처음 봤을 때는 뭔가 했는데 이런 것 때문인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러니까 그런 거였다. 다른 사람과 느끼는 미적 기준이 좀 색다르다는.

특성으로 타고나길 그런 거라는데 뭘 어쩌랴.

랭크도 A던데 하필이면 안 좋은 곳을 스쳤네.

심은찬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가 현우영의 다른 능력치들을 떠올려 보고 그 생각을 철회했다. 그 정도 능력이라면 이 정도 페널티쯤은 받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진 탓이다.

“우영아.”

“예.”

한 뼘 정도의 거리를 두고 나지막이 현우영의 이름을 부르자 고분고분 대답했다.

“어디 가서 얼굴만 믿고 그런 말 하면 안 돼요.”

그래. 현우영이 자신을 호박이라고 생각하든 말든 아무렴 어떠냐. 나만 아니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

“은찬이 형. 호박이라고 한 건-”

“네에. 단호박이라고 했다고요. 알겠어요. 단호박 귀여운 건 모르겠지만 나쁜 의미로 한 건 아니라고 했잖아요.”

현우영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심은찬이 자신의 말을 믿는지 아닌지 가늠하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은 많이 힘들었을 테니까 얼른 들어가서 쉬어요. 세안도 꼼꼼하게 잘 했죠? 오늘 메이크업 빡세게 해서 제대로 안 지우면 나중에 피부 트러블 생겨요. 이리 와 봐요.”

심은찬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화장 솜에 토너를 적셔 건넸다. 현우영이 그걸 물끄러미 봤다.

“이걸로 문질러 닦아요.”

“이걸로요?”

“네. 이렇게……. 에이, 시범을 보여 주는 게 낫겠네요. 이리 와 볼래요?”

심은찬은 설명을 하다 말고 직접 현우영의 얼굴에 화장 솜을 문질렀다. 키가 조금 큰 편이라 그런지 좀 힘들었다. 심은찬이 의자에 앉아 보라고 하자 현우영은 고분고분 그 말을 따랐다.

확실히 의자에 앉으니 눈높이가 달라져 훨씬 수월했다.

지금에서야 새삼스럽지만 현우영에게는 상대방의 눈을 바로 쳐다보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았다. 말하고 있을 때에도 살짝 부담스러운데 가만히 화장 닦아 줄 때 그러려니 좀, 아니 상당히 신경 쓰였다.

“좀 부담스러우니까 그렇게 계속 쳐다보고 있지 말고 눈 좀 감아 봐요.”

“예.”

현우영이 얌전히 심은찬의 말을 따랐다. 눈을 감은 현우영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슥슥 빗어 뒤로 넘기자 매끈한 이마가 드러났다.

어째 얘는 두상도 예쁜 것 같다.

심은찬은 흠, 하고 숨을 내쉬며 머리의 윗부분을 몇 번 더 더듬거리며 만졌다.

현우영의 기다란 속눈썹이 살짝 흔들리는 게 보였다. 너무 만져 댔나 싶어서 손을 떼어 냈다.

다시 봐도 무슨 연장 시술이라도 한 것처럼 풍성하고 짙은 속눈썹이었다. 뜨고 있을 때도 속눈썹이 길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감으니까 정말 어마어마했다.

속으로 새삼스럽게 감탄을 하며 어디 덜 닦인 부분이 있나 보면서 화장 솜을 쥔 손을 움직였다. 얼굴 전체를 한 번씩 꼼꼼하게 다 닦은 심은찬은 화장 솜을 확인했다.

“눈 떠 봐요. 여기요. 묻어져 나온 부분 있죠. 이것까지 닦아 내려고 이걸 하는 거거든요. 앞으로는 요령 알았을 테니까 세안 후에는 꼭 하세요.”

심은찬의 말에 이번에도 현우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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