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61)

#33

저렇게 열정적으로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사람의 마음을 역시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은찬은 이전 생에 심각한 우울증에 걸린 적이 있었지만 그게 타인을 향한 조롱이나 멸시로 이어진 적은 없었다.

저런 이들에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기에 더욱 관심을 껐다.

고작 손을 움직이는 걸로 그들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다는 만족감을 주기 싫었다.

심은찬 정도의 망돌 멤버도 이 정도인데 정말 잘나가는 아이돌은 어느 정도로 그런 사람들이 들러붙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그 사람들도 불쌍한 사람들이지만 엄연히 피해를 받는 사람이 있는 상황에서 굳이 그것까지 감안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 우리, 다음에 또 웃는 얼굴로 만나요. 안녕.”

약 한 시간 정도 페이스 앱을 하던 심은찬이 웃으며 방송을 종료했다.

설렁설렁하게 한다고 해도 한 시간 동안이나 말을 하다 보면 조금 힘이 들긴 했다.

물을 가져다 둘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가려는데 때마침 안으로 들어오려던 현우영과 마주쳤다. 심은찬이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일이에요? 나한테 일 있어요?”

“아뇨. 그건 아니고 준서 형이 제 침대에서 잠드셔서요. 아무래도 여기서 자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하셔서 왔어요.”

원래는 정민유와 이해민이 같은 방을 썼는데, 이해민이 팀에서 나간 후 자연스럽게 현우영이 그 방을 함께 쓰게 되었다. 페이스 앱을 하는 심은찬을 피해 방에서 나간 도준서가 그 방에 놀러 갔다가 그대로 잠든 모양이었다.

“그래요? 안 일어나요?”

도준서가 오늘 연습을 많이 하긴 했지. 그렇다고 같은 지붕 아래 있는데 오기 힘들 정도는 아닐 텐데. 도준서가 한번 잠들면 깨우기가 힘든 편이긴 하다. 그래도 방법이 영 없는 건 아닌데. 심은찬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현우영에게 정민유도 함께 있었나 물어보자 그는 야식으로 먹을 걸 사러 나갔다고 대답했다.

심은찬이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니까 그렇죠. 준서는 깨울 때 방법이 있어요. 잘됐네요. 우영이도 이참에 알아 두면 좋으니까.”

“……? 예?”

심은찬은 말을 하는 대신 웃으면서 손짓했다. 그러자 현우영이 두말없이 심은찬의 뒤를 졸졸 따라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알을 막 깨고 나온 오리처럼 느껴져서 푹 웃었다.

“……아이고. 완전히 푹 퍼졌네.”

정민유의 방에 도착한 심은찬이 방 안을 들여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도준서는 정말 푹 퍼져 있었다. 마치 푹 퍼진 반숙 계란 노른자처럼 침대에 누워 숙면을 취하고 계셨다.

“도준서. 준서야.”

다가가서 일단 도준서의 이름을 불러 봤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예상은 하긴 했었다.

“제가 깨워 봤는데 절대 안 일어나셨어요.”

“음. 그렇죠. 이럴 때는요. 잘 봐요.”

심은찬이 도준서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준서야. 일어나. 치킨 먹어.”

“……으.”

심은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도준서가 감은 눈을 움찔거렸다. 보통 이 정도면 일어날 텐데 오늘은 꽤나 피곤한 모양이었다. 심은찬은 잘 떠지지 않는 눈을 해서 으으, 하고 소리를 내는 도준서에게 쐐기를 박았다.

“닭 다리 심은찬 거. 너는 가슴살 먹어.”

“아, 으. ……선 넘지 마.”

도준서가 상체를 일으키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야. 치킨은?”

“너 깨우려고 말해 본 거지. 준서 너 관리 안 하냐.”

심은찬이 도준서의 어깨를 찰싹 때렸지만 그는 잠에서 덜 깬 듯 뒷머리를 긁적이기만 했다. 심은찬은 한쪽에서 이 상황을 전부 지켜본 현우영에게 말했다.

“봤죠? 준서는 이런 식으로 깨우면 돼요. 치킨이 제일 효과가 좋고 그다음이 보쌈. 그다음이 곱창.”

“야, 너는 뭘 가르치고 있는 거야. 누가 들으면 무슨 내가 음식에 미친 놈인 줄 알겠다.”

“그러면 좀 깨울 때 일어나든가. 우영이가 너 깨우다가 지쳐서 우리 방으로 자러 왔잖아.”

도준서의 항의를 가볍게 누르는 심은찬에게 현우영이 말을 걸었다.

“그런데 꼭 가까이에서 말해야 하는 건가요?”

“네? 아, 그거. 그거는 준서가 간지럼을 잘 타서 그냥 제가 재미있으려고 한 거고 우영이는 그렇게 안 해도 괜찮아요.”

“야, 심은찬. 간지럼 잘 탄다는 것도 은근슬쩍 알려 주냐?”

“간지럼 잘 타는 게 뭐. 그게 부끄러운 일이야?”

“아니, 그건 아닌데. 의도가 불순하잖아, 의도가.”

도준서가 투덜거렸다. 심은찬은 코웃음으로 가볍게 넘겼다.

“그럼 준서 수거해 갈 테니까 편하게 쉬어요.”

손을 흔들며 인사를 고한 심은찬이 방 밖으로 나왔다. 하품을 하며 심은찬을 따라 나오는 도준서가 심상하게 물었다.

“근데 너 우영이한테 아직 말 안 놨어?”

“으응, 뭐. 새삼스럽게 그러냐.”

“아니. 그냥 두루두루 말 놓고 지내면 좋잖아. 친해진 기분도 들고.”

“존대 써도 친할 수 있거든.”

“뭐 그렇긴 한데.”

심은찬이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자 도준서가 슬그머니 물러났다.

그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식을 사러 나갔다던 정민유였다.

정민유가 들고 있는 비닐봉지에서 어렴풋하게 인스턴트 떡볶이 로고가 보였다.

“준서야. 야식 먹자.”

“아싸. 갈게, 형!”

“야, 도준서! ……혀엉.”

심은찬이 어이없어하자 정민유가 웃으며 대꾸했다.

“오늘 열심히 해서 이 정도는 먹어도 괜찮아. 은찬이도 올래?”

“아뇨. 전 괜찮아요. 형, 준서 떡만 못 먹게 해 주세요. 쟤 떡살인 거 형도 아시잖아요.”

“어, 뭐. 응, 그래, 알겠어. 은찬이도 오늘 수고했어. 쉬어.”

정민유가 대답하는 모습을 보아 하니 말릴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 거실에서 도준서가 뽀시락거리며 정민유가 사 온 야식을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아이돌의 제1 미덕은 누가 뭐래도 비주얼이다. 관리가 안 되는 아이돌은 아이돌이 아니다. 연차가 쌓이거나 코어가 있는 그룹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B the 1에게는 절대 용납되지 않는 단어였다.

오늘은 어쩔 수 없어서 넘긴다지만 다음부터는 좀 제대로 잡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자리에 누웠다.

앨범 콘셉트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생각해 봐야 했다.

이전 생에서 화제가 됐던 그룹들의 콘셉트들을 생각해 봤다. 그것들을 무작위로 끌어다 쓰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좀 있을 테지만 참고 정도는 할 수 있을 터였다.

노래가 청량 콘셉트는 아니니까 선택할 수 있는 폭은 대충 정해져 있기는 했다.

이전에 활동했을 때에는 무난하게 정장 콘셉트로 갔었는데 B the 1과 비슷한 시기에 컴백을 했지만 인지도가 더 있던 팀과 콘셉트가 겹쳤던 일이 떠올랐다. 그러다 보니 무대 반응도 뜨뜻미지근했었다. 물론 그때는 멤버 수도 적었으니 더 그랬을 수도 있었지만 좀 더 큰 한 방이 필요했다.

정장에서 조금 더 한발 나가서 제복으로 콘셉트를 잡는 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 시스템을 좀 이용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콘셉트 적용 시 팬들 반응 예상도 같은 거.”

심은찬은 작게 구시렁거렸다. 이왕 회귀를 했고 미션을 클리어하는 거라면 어느 정도 더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가 곧 접었다. 만약에 가능했다면 시스템 쪽에서 먼저 알림 창을 띄웠을 거였다.

핸드폰으로 여러 다른 그룹들의 콘셉트 사진을 보던 심은찬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들고 말았다. 눈을 뜨고 보니 어느새 날이 환해져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2층 침대의 위층을 쓰는 도준서를 살펴봤다. 야식의 영향인지 아주 행복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쿼카 닮았네.

찍어서 깨면 보여 줘야겠다 싶어진 심은찬은 각도를 잘 맞춰 사진을 찍었다. 찰칵 소리에도 도준서는 꿋꿋이 계속 잤다.

힘들긴 했을 테니 조금 더 자게 놔둬야겠다고 생각하며 방을 나왔다.

전신에 뻐근한 근육통이 느껴졌지만 만족스러웠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충실함에 기분이 좋지 않을 리가 없었다.

바로 이런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물론 과정이 중요하고 결과는 별로 중요치 않다는 말은 아니다. 회귀한 상태로 살려면 연말에 대상을 타야 했으니까.

하지만 말이 연말 대상이지. 아직 팀 이름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나마 곧 방영 예정인 드라마가 있지만 그걸로 이름을 알린다고 해도 좋게 봐 준 사람들을 그룹의 팬으로 끌어들이기가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대본을 바꾸었으니 반응이 어떤 식으로 달라질지 몰랐다.

머리가 복잡해짐을 느끼던 심은찬은 화장실로 가서 정신도 차릴 겸 세수를 했다. 세면대 바로 앞에 달린 거울을 보니 제 얼굴이 비치었다. 성형 전의 얼굴이.

봐도 봐도 참 신기했다. 자신의 기억보다 나쁘지 않은 얼굴인데 그때는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그렇게 못생겨 보였더랬다.

이전 생으로 돌아가는 건 절대 사절이다.

뼈를 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대상을 타야 했다.

심은찬은 새롭게 각오를 다지며 양치를 시작했다.

멤버들이 모두 일어나 소속사로 향한 건 그날 오후 느지막한 때였다.

콘셉트 회의였다. 이제 슬슬 헤어스타일이나 메이크업 방향 같은 것도 의논을 할 시기였다. 포텐하이는 멤버들의 의견을 중시하는 편이었다.

다들 생각해 놓은 바는 있었는지 하나둘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아무래도 정장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는 중이었다. 한참 가만히 듣던 심은찬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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