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이쪽으로 가시면 몸을 숨기실 수 있는 장소가 나옵니다. 모시겠습니다.”
하지만 왕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 아군이 맞나 가늠을 하듯 두 사람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빛나는 눈동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때 멀찍이서 왕을 뒤쫒아 온 괴한들의 소리가 들렸다.
“안내하게. 이 상황에서 짐이 믿을 건 그대들뿐이니.”
침음을 한 번 흘린 왕이 결단을 내린 듯 말했다.
세 사람은 어둠 속을 헤치며 달렸다.
따라붙는 적 다섯이 서길영과 연운의 칼에 속절없이 쓰러졌다. 하지만 그들이 상대했던 무리들이 또다시 달려오고 있었다.
“이래선 끝이 없어.”
“그래도 해야지. 겁먹었어?”
서길영의 말에 연운이 옅게 웃었다.
화랑에 들어올 때부터 죽음을 각오하긴 했었다. 왕의 호위를 하면서 목숨을 걸 수 있다니.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다.
그러나 이 많은 사람들을 전부 상대하며 왕을 지키기에는 위험이 너무 컸다.
“…….”
연운은 고요하게 숨을 내쉬었다.
“서길영. 얼른 가.”
“……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쪽으로 가는 길은 하나뿐이다. 그러니 이 길목을 지키기만 하면 더는 접근할 수 없다. 계락에 빠져 놓친 호위 무사 쪽으로 화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인 박영주가 갔으니 왕의 호위 무사들도 금방 올 터였다. 그동안 시간을 벌면 됐다.
“모두 뭉쳐서 움직이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어. 알잖아. 전하를 모시고 얼른 가.”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내 말 못 들었어?!”
언제나 차분하던 연운이 언성을 높이며 서길영의 어깨를 세게 쥐었다.
서로의 눈빛이 교차되었다.
“꼭 갈 거야. 안 가면 화살 300발 쏘기 할게.”
다짐을 하는 연운의 말에 서길영이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300발로 되겠어. 500발은 쏴야지.”
“그래, 500발.”
이런 순간에도 나오는 농이 정말 서길영다웠다.
기척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나중에 봐.”
연운은 멀어지는 이들을 보다가 이를 사리물며 검을 고쳐 잡았다. 모습을 드러낸 무리는 7명. 정예 인원일 게 분명했다.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전부 실력자다. 죽을힘을 다해야 했다.
사내들은 길을 가로막고 선 연운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만 적막을 채웠다.
“이만하고 돌아가는 게 어떠냐고 하고 싶은데, 그럴 자들이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지.”
말을 마친 연운이 자세를 잡았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의 지시에 남은 이들이 연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챙. 챙.
검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쏟아지는 검의 세례를 피해 급소만을 골라 일격 일격을 꽂아 넣으며 한 명씩 처치해 갔다. 물론 연운도 완전히 괜찮지는 않았다. 찔리고 베여 상처에서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천만다행히도 급소만은 피해 갔다.
남은 자는 우두머리 포함 이제 셋.
승산이 보였다.
칼을 바로 잡으며 상대의 작은 움직임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두 명이 달려와 칼을 휘둘렀다.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돌려 피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
발목에 뜨거운 통증이 느껴졌다. 낭패였다. 직격으로 오는 검을 몸을 비틀어 간발의 차로 피하며 반격을 꾀했다.
“……윽.”
짧은 신음이 터졌다.
연운은 격통이 느껴지는 부분을 내려다봤다. 옆구리였다. 깊게 들어와 있던 검이 쑥 뽑혀 나가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더운 피가 천천히 옷을 적셨다.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었다.
연운은 눈만을 움직여 바로 근처에 있던 자를 베었다. 단말마를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지는 이에게서 몸을 돌려, 지근거리에 서 있던 자를 이어서 베었다. 일격을 받은 그자 역시 짚 인형처럼 무너져 내렸다.
시야가 가물거렸다. 이마에 난 상처에서부터 흘러내린 피 때문에 한쪽 눈을 제대로 뜨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손으로 닦을 여유는 없었다. 그 틈을 놓칠 자가 아니었다.
연운은 긴장을 놓지 않았다.
한 놈.
저자를 처치해야 했다. 제일 실력자로 보이는 저놈을 처치해야.
“으윽……!”
오른팔을 베였다. 순간 손에서 힘이 빠지는 걸 가까스로 참고 검을 바투 쥐었다.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반대쪽 손으로 옮겨 쥘 여유 따윈 없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의 실력은 압도적이었다.
상처만 없었어도.
연운은 이를 꾹 물었다. 아니다. 상처가 없다 한들 저 괴한의 상대가 되지 못할 거다. 몸 상태가 최적이었다고 하더라도 안 됐을 거다.
하물며 이런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는.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러면 어떻게든.
때마침 길 쪽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모습을 드러낸 자들은 왕의 호위 무사들이었다.
됐다.
안도를 한 순간.
“어……?”
목 안쪽에서 더운 것이 울컥 새어 나왔다. 어느 순간 자신이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호위 무사들의 검에 연운을 해쳤던 남자가 부질없이 쓰러졌다.
그때 느껴졌던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아아. 다행이다.
전하께서는 무사하실 거다. 이제 나도 가야만 하는데.
인사를 전하고 싶은데 말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끄륵거리는 소리만이 났다.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피 묻은 연운의 손이 흙바닥 위를 힘없이 긁었다.
자리를 떠나가는 다른 호위 무사들과는 달리 한 명이 연운 쪽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괜찮소. 이제부터는 우리에게 맡기시오. 전하는 반드시 지키겠소.”
연운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언젠가 보았던 우하연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서길영과 했던 약속이 연이어 생각났다.
눈꼬리를 따라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바닥으로 떨어졌다.
……500발은 좀 힘든데.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눈꺼풀을 호위 무사가 감겨 주었다.
온기는 천천히 식어 갈 뿐이었다.
* * *
모든 촬영이 끝난 시간은 늦은 새벽 즈음이었다.
강도 높은 액션 신과 고조되는 감정 신에 다들 녹초가 되었다. 특히 심은찬의 경우엔 컷 소리가 난 이후에도 잠깐 동안 그대로 누워 있을 정도였다.
마지막 연운 신을 촬영할 때 왜인지 모르겠지만 눈물이 흘렀다. 당연히 대본에도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감정 과잉으로 바로 컷당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너무 감정 이입을 한 탓일까. 실제로 연운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몹시 힘들었다.
“은찬 씨 수고했어요!”
“고생하셨습니다!”
잠깐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소리로 밝게 인사를 한 심은찬은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팔로 무릎을 감쌌다.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연습을 혹독하게 했는데 지금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은 적은 없었다. 탈진했다는 게 이런 걸까.
“은찬아, 못 일어나겠어?”
“……아, 휴인이 형.”
“당 부족인가 보네. 이것 좀 먹어.”
“고마워.”
심은찬은 순순히 김휴인이 건네는 사탕을 받아 입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생했어요.”
“선배님. 선배님도 고생하셨습니다.”
“뭘. 나야 오늘 하루 와서 촬영한 건데. 힘들었을 텐데 들어가서 좀 쉬고.”
김문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심은찬과 김휴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촬영장을 떠나는 그를 배웅한 두 사람도 서로 인사를 나누고 각자 차로 이동했다. 내일도 촬영 스케줄을 이어 가려면 조금이라도 빨리 들어가 쉬는 게 좋다는 걸 경험상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에 몸을 실은 심은찬은 좌석에 앉자마자 세상모르게 잠이 들었다.
* * *
촬영에 늦었다.
생각이 든 순간 번쩍 눈을 뜨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다가 얼마 전 자신의 분량은 촬영을 다 마쳤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쓰러지듯 침대에 다시 몸을 누였다. 바로 일어나는 게 맞을 테지만 딱 5분만 더 누워 있자고 결정했다.
지잉
그때 핸드폰의 진동 소리가 들렸다. 조금 더 게으름을 부리고 싶었던 심은찬은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덮었지만 연이어 들리는 진동 소리에 부스스 머리를 들었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김휴인이었다.
-은찬 안녕 은찬이가 없으니까 모두 그리워하는 중 보고 싶다
메시지뿐만이 아니라 사진까지 찍어서 보냈다.
메인 주역들이 모여 울상을 하고 있었다. 다들 살인적인 촬영 스케줄로 힘들 텐데 인사치레라도 이렇게 해 준다는 자체가 너무 고마운 일이었다.
드라마를 촬영할 때 쉬는 시간에 모두 모여서 소소하게 잡담을 나누던 일이 떠올랐다. 다들 계속된 강행군에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실수를 했어도 괜찮다며 다독거려 주기도 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아이돌이었던 심은찬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연기 팁을 알려 주기도 했다. 그것들은 연기 선배로서 절대로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연기자 동료라고는 하지만 동료이기 이전에 연기자로서 서로 라이벌 관계이기도 하다. 상대가 잘되는 만큼 자신에게도 반드시 좋으리라는 보장 역시 없다. 하나의 파이를 나눠서 먹는다고 생각한다면 절대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 만큼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심은찬의 멘털 랭크가 SS급이 아니었어도 환경 적응이 순조로울 정도로 참 많이 도와주었다.
이렇게 사진을 찍어서 연락을 보내주는 것 또한 서로에게 애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심은찬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척이나 고맙게 느껴졌다. 연락을 했어도 심은찬이 먼저 연락을 했어야 했는데.
심은찬은 바로 김휴인에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김휴인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