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61)

#30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제가 하지 않아도 될 걸 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선 긋는 것 같아요. 제가 해 드리는 것도 아니고, 한 팀이잖아요. 형들에게는 멤버 교체 후에 있는 컴백 무대고 저에게는 데뷔 무대예요. 열심히 해야죠.”

처음 만났던 현우영의 인상에 가까웠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면 편할 텐데도 조용조용 똑 부러지게 제 생각을 말했다.

선을 긋는다.

확실히 그 말이 맞았다.

열심히 하는 건 당연했다. 다른 누구의 무대가 아닌 현우영의 무대니까.

심은찬은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놓친 부분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그것도 그렇긴 하네요. 그럼 고맙다는 말 취소?”

“……와.”

심은찬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현우영은 일순 말문이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막혀할 거면 받고요, 감사 인사.”

“예?”

“아. 그거구나. 에이. 고맙단 말을 더 듣고 싶은 거였으면 얘기를 하지.”

“예? 아뇨. ……아니, 말이 왜 그렇게 돼요?”

심은찬의 장난스러운 말에 현우영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는 뭐라고 반박을 할 듯하다가 픽 웃으며 그만두었다.

심은찬은 일부러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현우영에게 진심으로 감탄했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면 끝날 일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 제 생각을 표현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혹시나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고 혹은 못마땅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결과까지 생각 못 하는 사람이거나 혹은 어떤 결과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거나. 여태까지 그가 봤던 현우영이라면 전자는 절대 아니었다.

심은찬은 현우영을 흘긋 쳐다보았다.

대충 정리를 끝낸 두 사람은 함께 숙소를 나섰다.

연습실에 도착하자 연습하고 있던 멤버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쉴 틈도 없이 바로 대열을 갖춰 선 심은찬은 곡에 맞춰 안무 연습을 시작했다.

“은찬아, 팔 각도!”

허허실실 하는 문세별이었지만 연습을 할 때에는 가차 없었다. 아차 하고 생각했을 때 바로 날아드는 지적에 심은찬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한동안 제대로 연습할 시간이 없어서인지 역시 디테일한 부분에서 틀리는 일이 잦았다.

무대 뒤에서 천 번을 연습해도 무대에서는 그 실력의 절반 정도 보여 줄 수 있다.

연말에 대상을 노리려면, 정말 실감은 안 나는 목표치이긴 했지만, 어지간한 연습으로는 부족했다. 다섯 번 연속 안무와 함께 실제 라이브처럼 연습을 하자 숨이 차올랐다.

헐떡거리는 숨을 참으며 바닥에 앉았다.

본격적인 컴백 준비에 돌입했다.

* * *

촬영도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

물론 중간에 죽는 역을 맡은 심은찬에 한해서지만.

아직은 날이 추웠기에 야외 촬영은 고되었다. 그래도 일단 야외로 나온 만큼 촬영 가능한 모든 신은 소화해야 했다. 해가 떠 있을 때 찍을 수 있는 부분을 다 촬영하고 날이 어두워지자 심은찬은 분장을 새로이 했다.

심은찬이 맡은 역인 연운의 마지막 신을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심은찬과 별개로 세트장에서 촬영하던 다른 주연 배우들도 이번 촬영을 위해 이쪽으로 이동했다.

“은찬아.”

한참 얼굴에 상처 분장을 하고 있을 때 박윤우가 다가오며 인사했다.

대답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에 눈으로 반가움을 표시했다. 시간이 지나 분장이 끝난 심은찬을 보며 다들 한마디씩 했다.

“으, 아프겠다.”

“완전 진짜 같아.”

분장받느라 몰랐는데 관객이 어느새 오은서와 김재연까지 포함해서 서너 명으로 늘어 있었다.

“다들 저 기다리셨어요?”

“그렇지.”

다들 친해진 덕분에 격의 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중 박윤우가 말했다.

“남는 건 사진이라고, 사진 한 장 찍자, 은찬아.”

“아, 네에.”

“나두.”

주요 배역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핸드폰 카메라를 보며 포즈를 취했다.

“뭐야, 사진 찍어? ……와. 은찬이 얼굴에 그게 뭐야. 분장했어?”

뒤늦게 등장한 김휴인이 웃으며 다가왔다가 심은찬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인사하는 심은찬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그의 얼굴에서 시선이 떨어질 줄 몰랐다.

“진짜 실감 나게 해 주셨다. 안 아파?”

“아프긴. 분장인데, 형.”

“한번 만져 봐도 돼?”

“살살 만지면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심은찬이 눈을 깜빡이며 대답하자 김휴인은 검지가 아주 살짝 닿을 정도로만 뺨에 댔다.

“와. 느낌 이상해.”

찰칵.

핸드폰의 카메라 셔터음이 들렸다.

박윤우가 두 사람의 사진을 찍은 듯 핸드폰을 든 채로 웃었다.

“역시 연운이랑 길영이가 사이가 좋아.”

확실히 드라마에서 두 사람의 투 샷이 많긴 했다.

“근데 오늘 너무 긴장된다.”

“그러게. 오늘 그분 오시잖아. 형은 어때요?”

“……사실 아까 나 청심환 먹었어.”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고 보니 촬영장 내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다르게 약간 긴장되어 있었다. 오늘 왕 역으로 특별 출연하는 배우가 출연했다 하면 천만 관객으로 흥행 보증 수표 역을 톡톡히 하고 있는 중견 배우 김문호였기 때문이다.

감독은 그가 출연한다는 사실을 바로 오늘 아침에서야 통보했다. 당연히 현장에서 술렁거리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그 김문호라니. 심지어 특별 출연이라니. 몇몇은 재차 확인하기도 하는 와중 심은찬만이 태연했다. 이전 생에도 있던 일이기 때문이다.

김문호의 등장으로 커뮤니티는 완전히 뒤집어졌었다. 전체 분량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의 등장이었지만 그 카리스마는 압도적이었고 화제성 역시 단번에 끌어모았다.

드라마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던 그가 드라마에 특별 출연을 결심하게 된 이유 역시도 알고 있다.

감독과의 특별한 인연 때문이었다.

“은찬이는 그 선배님이랑 같은 신 촬영하지? 긴장되겠다. 힘내.”

그들의 응원에 심은찬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자신의 오라버니를 죽게 한 범인을 찾으려던 우하연은 그 배후에 권력을 찬탈하려는 집단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왕에게 알리려 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권력층이 우하연을 없애려 자객을 보낸다. 우하연의 입을 막고 왕을 암살해 그 빈자리에 왕권 계승 2위를 앉히려는 계획이었다.

이 사실을 제일 처음 알게 된 연운은 자신이 좋아하는 우하연에게 가지 않고 마지막까지 자신의 본분인 화랑의 길을 선택하며 왕을 호위하다가 결국 죽게 된다. 무술을 하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사전에 합을 맞춰야 했는데, 아이돌이라 몸 쓰는 게 익숙했던 심은찬은 비교적 습득이 빨랐다.

무술 감독에게 다시 한번 주의 사항을 안내받으며 동선 체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일시에 잦아들었다. 무슨 일인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보니 김문호가 보였다.

그는 이미 분장을 끝낸 이후였는데 다들 인사를 하고 악수를 나누기에 바빴다.

심은찬도 김문호 쪽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처음 뵙겠습니다. 심은찬이라고 합니다.”

“아, 이번에 같이 촬영하는! 반가워요. 선생님은 뭘. 낯간지럽게. 그냥 선배님이라고 해도 충분하지.”

그는 매우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좀 쉬셨다가 촬영 들어가실까요?”

“무슨. 일하러 왔으면 일을 해야지. 바로 들어가죠.”

감독의 제안에 김문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고 그 한마디에 바로 촬영으로 들어가게 됐다.

아이돌 이전에 심은찬은 김문호를 알았다. 물론 개인적으로 안다는 말이 아니고 배우로 말이다. 그가 출연한 영화 중에 심은찬이 재미있게 봤던 것도 있었다.

그의 연기는 매우 폭이 넓었다. 사이코패스 살인범, 자신의 딸을 죽인 범인을 뒤쫓는 평범한 이웃 사람, 지질한 방구석 백수. 하나같이 실감 나는 연기를 선보였다. 그런 사람과 함께 드라마 촬영을 한다니. 무척 신기했다. 하지만 그 감정에서만 끝나선 안 됐다.

잘해야 했다.

이전에도 적당한 마음으로 촬영을 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 배역이 김문호인 건 확실히 뭔가 달랐다. 연기를 처음 하긴 했지만 그 서투름이 드러나면 안 됐다. 적어도 김문호에게 비교했을 때 그 기에 밀리거나 꿀리지 말아야 했다. 시청자는 바보가 아니다. 그러니 잘 해내야 했다.

조명을 최대한 낮춘 곳에서 대기하던 심은찬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신 52 첫 번째 촬영 들어갑니다!”

클랩 스틱 맞부딪치는 소리를 듣자 전신에 가벼운 긴장이 들어갔다.

시작이다.

* * *

“네놈들은 누구냐. 얼굴을 보여라.”

“죽을 사람에게 보일 얼굴은 없소. 알 것도 없고.”

심복으로 데리고 나왔던 이들 중 한 명이 속절없이 쓰러졌다. 검을 쥐지 못하는 자였으나 왕이 아끼는 신하였다. 잠행을 나가는 왕을 혼자 보낼 수 없다고 따라 나온 충신이기도 했다. 끝까지 왕의 앞을 지키며 피하라고 하던 신하이기도 했다.

피가 묻은 검을 앞에 두고서도 왕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무엄하다. 감히 짐을 어디까지 능멸하려 하는가.”

조용하지만 묵직함이 담긴 목소리에 괴한들이 멈칫하는 찰나.

“……윽!”

“으헉.”

괴한 두 명이 쓰러지고 서길영과 연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냐.”

“전하.”

즉시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화랑, 부족하나마 전하를 모시겠습니다.”

“이런 상황에 예를 갖출 필요는 없다. 일어나라.”

왕의 명령에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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