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29/61)

#29

“아뇨. 그랬나 봐요. 죄송해요.”

“거기서 사과를 하면 더 열받거든요.”

“죄송, 아니……, 음. 네.”

현우영은 곧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더 형이에요.”

“예.”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유치해지는 건 자신 쪽이라는 사실에 심은찬은 입술을 씰룩였다.

얼른 먹고 가자고 생각한 심은찬은 조금 더 빠르게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밥을 절반 먹었을 때부터 이미 배가 불렀지만 다 먹으려 노력했다. 그럼에도 결국 두어 숟가락 정도는 남겨 버렸다.

진짜 정말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음식물이 목 바로 아래까지 찬 기분이었다. 씹는 건 또 왜 이렇게 귀찮은지.

곧 연습실에 가야 하는데 너무 과식했나 싶었다.

“그것만 드셔 가지고 되겠어요?”

결국 예상했던 말을 들었다.

심은찬은 물을 조금씩 나눠 마시며 답했다.

“많이 먹었는데요.”

“형은 제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제일 적게 먹어요.”

“과장은.”

“정말이에요. 제 초등학생 여동생도 형보다는 많이 먹어요.”

아무리 그래도 심은찬이 초등학생보다 적게 먹을 리가 없다.

“아무 말이나 하죠? 나중에 동생 만나면 확인해 볼 거예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던 심은찬이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현우영은 자신을 보는 심은찬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았다.

“초등학생? 동생이요? 여동생이 초등학생요?”

“아, 네. 동생들이 저랑 나이 차가 좀 나요.”

그럼 조금 전에 말한 동생 취급의 최저점이 초등학생이었냐.

하다못해 중학생 정도로 생각했던 심은찬은 거한 충격의 여파에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왜 그러세요?”

“……어.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할 말은 많았지만 굳이 꼬집어서 지적하는 게 더 나잇값을 못 하는 것 같았기에 꾸욱 참았다. 그리고 그사이에 현우영은 심은찬이 먹었던 접시들을 모아 설거지통에 담고 있었다.

“제가 할게요.”

“아니에요. 식사하신 후에 바로 움직이시기 힘들잖아요. 앉아 계세요.”

그거야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밥을 먹은 건 자신인데 현우영이 치울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가 자신보다 나이가 적긴 하지만 그걸 이유로 이런 대우까지 받을 이유는 없었다. 심은찬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아요. 먹은 건 저니까. 우영이는 저 먹을 때까지 기다려 주기도 했고요.”

심은찬이 그렇게 말하며 싱크대 앞에 서려고 했으나 현우영은 요지부동이었다. 대체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고 했으나 현우영이 한발 더 빨랐다.

“은찬이 형, 이건 오해하지 말고 들어 주세요.”

“뭔데요?”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나 싶었다.

“설거지는 제가 직접 하는 게 속이 편해서요.”

“……네?”

“은찬이 형이 못한다는 게 아니고 저희 집에서도 제가 전담으로 하거든요. 지금 숙소에서도 설거지는 제가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건 제가 할게요.”

이것저것 말하고는 있지만 한마디로 그거다.

다른 사람에게 설거지를 맡기는 게 불안하다.

겨우 설거지인데 누가 하든 별 상관도 없는 게 아닌가. 그래서였을까. 괜스레 그런 말이 튀어나온 건.

“근데 저도 설거지 잘해요.”

“…….”

심은찬은 확실히 봤다.

현우영의 눈빛이 바뀌는 걸.

“그래요?”

솔직히 괜한 치기였다는 걸 인정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얜 대체 뭐지, 싶은 감상이 먼저 들었다.

아이돌 연습생 시절을 겪어 온 제게 경쟁은 익숙했다. 그런데 그 경쟁의 종목 중에 설거지는 없었다. 현우영은 심은찬을 가늠해 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고작 설거지잖아. 뭘 이렇게 경계하는데.

“왜요. 못 믿겠어요?”

손을 뻗어 그릇을 잡자 현우영이 그걸 쳐다보았다. 심은찬이 잡은 그릇에 손을 올리는 게 보였다. 이건 그건가. ‘이건 내 설거지다. 이제 와서’, 뭐 그런?

“아뇨.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제가 더 어리니까요.”

현우영의 원래 의도는 그런 게 아니었지만 심은찬은 그 말로 깨달았다.

현우영은 어렸다. 심은찬이 회귀하기 전의 나이로 따져 본다면 7살이나 연하였다.

7살이나 어린 사람을 상대로 어른스럽지 못하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바로 기운이 빠졌다.

“그럼 미안한데 부탁 좀 할게요.”

“예.”

심은찬이 한발 물러서며 한 말에 그제야 현우영의 표정이 풀어졌다.

쏴아아. 물 흐르는 소리와 함께 덜그럭거리면서 그릇끼리 내는 작은 소음이 들렸다. 묵묵히 설거지를 하는 현우영의 등판을 보았다. 정말 크고 듬직했다. 그 크고 듬직한 몸으로 작은 싱크대에 구겨져서 설거지를 하는 모습이 좀 우스꽝스럽긴 했다.

설거지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기도 뭐한데 도와줄 게 없나 주변에서 기웃거리던 심은찬은 철통같은 현우영의 방어막에 가로막혔다. 싱크대 자체도 너무 작았기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결국 심은찬은 뒤로 조금 물러나야만 했다.

가만히 현우영의 넓은 등판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설날에 안 온다고 가족들이 뭐라고 안 해요?”

“동생들은 좀 서운해하긴 하는데 데뷔가 더 중요하긴 하니까요. 부모님도 그냥 열심히 하라고 하시죠.”

심은찬은 작게 “흐음.”하는 소리를 냈다.

기존 멤버들이야 이해민이 그렇게 나가고 나서 컴백에 이를 가느라 자진해서 설날 휴가도 반납하고 연습한다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현우영은 입장이 달랐다. 다른 날도 아니고 한국 2대 명절 중 하나인 설날 아닌가. 집에 다녀온다고 해도 눈치를 주진 않을 텐데도 자진해서 남았다. 심은찬이 물어봤을 때에도 불만이나 아쉬운 기색 하나 없이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라는 태도가 무척 고맙게 느껴졌다.

그냥 모른 척 지나갈 게 아니라 고맙다는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심은찬의 핸드폰이 울려 댔다.

모르는 번호가 창에 떠 있었다. 김휴인이 연결해 준다던 사촌 형의 전화일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심은찬은 현우영에게 잠깐 자리를 비운다고 얘기한 후 방으로 돌아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심은찬 휴대폰입니다.”

-아. 여보세요. 심은찬 씨 휴대폰 맞죠? 안녕하세요. 아인이, 아니 김휴인 배우 사촌인 정진욱입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

-갑작스럽게 연락드린 거라 놀라셨죠……? 휴인이가 연락을 하고 뭐 어쩐다 그런다기에 번거롭게 그러지 말고 바로 제가 연락드린다고 했습니다.

정진욱은 시원스레 웃으며 대꾸했다. 잠깐 대화한 것이지만 느낌이 김휴인과 어딘지 모르게 닮았다.

-휴인이한테 대충은 전해 들었는데, 저희 카페 대관 때문이죠?

심은찬은 김휴인의 빠른 눈치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네에. 갑작스러우시겠지만 우선 검토를-”

-괜찮습니다. 쓰세요.

턱 나온 대답에 심은찬은 제 귀를 의심했다.

이렇게 갑자기 승낙을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뭐 잘못 이해를 하고 있나 싶은 의심이 들어 바로 대답을 못 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그가 말을 이었다.

-휴인이가 누구 부탁하는 건 처음이라서요. 이런 건 들어줘야 휴인이 면이 살죠. 안 그래요?

“……감사합니다.”

심휴인 덕분에 이렇게 쉽게 대관을 할 수 있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얼마나 좋게 이야기를 해 줬으면 그럴까 싶어 가슴 한편이 찡해졌다. 그와 동시에 이렇게 쉽게 일이 풀린다는 게 믿기지 않아 한숨을 섞어 이야기하자 정진욱이 웃었다.

-나중에 저희 가게 홍보 많이 해 주세요. 오셔서 빵도 좀 사 주시고요.

“그럼요. 당연히 그래야죠.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 쪽에서, 어, 저희 소속사 쪽 통해서 대관 계약서 관련해서 연락 다시 한번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바로 매니저에게 연락을 넣었다.

뮤비 촬영 장소로 좋은 곳을 찾았다고 말하자 곤란한 기색을 보였으나 심은찬이 사진 몇 장을 보내 주자 바로 반색했다. 그렇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뮤직비디오의 배경으로 나올 폐공장은 어떻게 해도 어둡고, 다른 의미로 빤한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매니저는 즉시 다른 사람들과 논의해 보겠다는 대답을 하고 통화를 끝냈다. 이 정도 반응이면 이쪽으로 바뀔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한숨 놓았다고 생각하며 방 밖으로 나간 심은찬을 기다리는 건 수건으로 손을 닦고 있던 현우영이었다.

“미안해요. 잠깐 통화 좀 하느라고요. 설거지는 다 끝났어요?”

“예. 지금요.”

“고마워요.”

“고마우시긴요. 설거지는 제가 좋아서 하겠다는 거였는데요.”

현우영은 새삼스럽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며 답했다. 심은찬은 그런 반응이 돌아올 걸 예상하고 있었다. 입술을 말아 물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거 말고요. 남아서 연습해 줘서.”

현우영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타이밍은 좀 어긋나긴 했지만 현우영이 설에도 숙소에 남아서 연습하는 것에 대한 고마움은 꼭 표하고 싶었다. 타이밍을 놓쳤네, 말 안 해도 알겠지 하는 걸로 핑계 대며 어벌쩡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현우영은 심은찬이 말하는 바를 알아차렸는지 잠깐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시선을 마주쳤다.

“은찬이 형. 다른 멤버 형들에게도 고맙다고 하실 거예요?”

아.

짧은 질문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잠깐 머뭇대는 사이 심은찬은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현우영의 목소리는 따지는 게 아니라 단순히 사실 확인을 하는 것처럼 담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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