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컵라면 먹으려고 하고 있었는데 다행이다. 와, 쌀밥이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몰라요.”
“잘됐네요. 컵라면을 너무 소중히 들고 계셔서 밥이 싫으시면 어쩌나 했거든요.”
“……소중, 아니. 이건 그런 게 아니고요. 비닐이 안 뜯겨서요.”
“네에.”
현우영은 아직까지 가슴에 곱게 들고 있는 컵라면을 심은찬의 손에서 빼내 갔다. 멋쩍게 그런 게 아니라고 다시 한번 중얼거렸지만 현우영은 알겠다고 대답하며 가스레인지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은찬이 형은 앉아 계세요. 계속 주무시느라 힘없으실 텐데.”
“……아…….”
자느라 힘없다는 말은 그러니까 팔자 좋게 늘어져 있다고 하고 싶은 건가.
“예? 뭐라고 하셨어요?”
“아뇨. 뭐 해요?”
일단은 아니라고 하며 넘기던 심은찬은 현우영이 즉석 미역국 봉투를 뜯어 냄비에 쏟아붓는 걸 보고 눈만 깜빡거렸다. 그는 “국 데워요.”하고 대답하고는 수행 로직이 입력된 로봇처럼 바로 햇반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리기 시작했다.
삑삑.
전자레인지 작동하는 소리가 들리는 와중에 심은찬이 조용하게 물었다. 현우영은 정말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아뇨. 그냥 기분 탓인가 싶긴 한데요.”
오해할 만하게 말하는 화법은 일부러 그러는 거냐고 대놓고 묻고 싶었다. 심은찬은 말을 고르며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뭐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른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걸 굳이 걸고넘어지는 건 심은찬 자신의 신경이 너무 예민해서가 아닐까. 공복이라 신경이 날카로워졌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이전에 저녁 안 먹는 걸 알려 주지 않았다며 현우영이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 방에 찾아왔던 일이 떠올랐다. 지금은 심은찬 본인이 그런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이럴 때는 지레짐작하지 말고 직접 본인에게 확인하면 될 일이다.
심은찬은 반찬 통에서 반찬들을 덜어 놓고 다시 냉장고로 넣는 현우영의 등을 응시했다.
입술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던 심은찬은 현우영이 들고 온 비닐봉투에 눈길이 갔다. 내용물은 오직 햇반 하나뿐이었던 듯 안이 비어 있는 걸 발견한 심은찬이 입을 열었다.
“근데, 숙소에는 왜 온 거예요? 무슨 볼일 있었어요?”
“은찬 형 일어나셨다고 들었는데 숙소에는 밥이 없어서요.”
심상하게 대꾸하는 현우영의 대답에 기시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전 현우영이 숙소에 들어오면서 했던 말의 반복이었다.
조금 전에는 흘려들었는데 저 말을 액면 그대로 해석한다면, 그러니까 현우영은 다른 이유는 하나도 없고 오직 제 밥을 챙겨 주기 위해서 돌아왔다는 이야기였다.
“……그거 외에는요?”
“없어요.”
때앵-
시원한 대답에 맞춰 전자레인지가 다 돌아갔다는 소리가 났다.
“그거 때문에 왔다고요?”
“예.”
심은찬은 입을 벌린 채 전자레인지 안에서 햇반을 꺼내 드는 현우영을 쳐다보았다.
밥에는 진심인 민족답게 현우영도 그냥 그런 건가.
말을 돌리는 게 아닐까 숨긴 뜻이 있는 게 아닐까 짐작하는 건 그만두었다. 상대의 말을 꼬아서 듣기 시작하면 끝도 없었고 여태까지 알아 온 현우영은 결코 그런 타입이 아니었다. 본인이 아니라고 하는데 끝까지 의심하는 것도 시간이 아까웠다.
생각은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하고 햇반을 건네받기 위해 손을 뻗었다.
플라스틱 용기째로 줄 거라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현우영은 그걸 그대로 심은찬에게 건네는 게 아니라 밥공기에 덜어서 주었다. 숟가락도 밥을 덜 때 쓰던 게 아니고 새 숟가락으로 굳이 꺼내서 심은찬 앞에 내려놔 주었다.
“드세요.”
현우영의 권유에 심은찬은 숟가락을 들었다.
첫 술을 먹자마자 따끈하게 데워진 국도 추가로 식탁 위에 놓였다. 근사한 한 끼였다.
“목메실 테니까 천천히 드세요. 시장하시더라도 꼭꼭 씹어 드시고요.”
맞은편 의자에 앉는 현우영의 말에 심은찬은 입에 있는 음식 때문에 소리 내어 대답은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없이 네댓 숟가락을 팍팍 먹고 나서야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심은찬은 그제야 현우영의 앞에 물 한 컵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설마 이건.
“혹시 저 먹는 거 기다려 주는 거예요?”
“혼자 식사하시면 밥이 맛없잖아요.”
“음……. 뭐.”
솔직히 말하자면 심은찬은 그런 걸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긴 했다. 가끔씩 숙소에서 멤버들끼리 함께 먹을 때도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혼자 먹을 경우엔 핸드폰을 보며 먹는 게 익숙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누가 밥을 먹을 때 굳이 자리에 앉아서 기다려 주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그 배려가 새삼스러우면서도 고맙고 또 좀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조금 전에는 왜 물어보셨어요?”
“뭐가요?”
“확인하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요.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요.”
예리한 녀석.
심은찬은 현우영을 쳐다보며 우물거렸다.
은근슬쩍 넘기려고 했는데 이렇게까지 물어보는 상대에게는 그러기도 힘들었다. 애매하게 둘러대느라 위화감을 남길 바에야 차라리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조금 전에는 제가 배가 고파서였는지 신경이 날카로웠거든요. 배고프면 예민해진다고들 하잖아요. 우영이도 알죠?”
“예.”
일단 오해하지 않도록 길게 설명을 덧붙였다.
“계속 자느라 힘없다고 하는 말이 늘어져서 놀팽놀팽할 시간이 있냐고 하는 걸로 들렸어요. 지금은 그런 의미가 아니란 건 알지만요.”
현우영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그렇게 들리셨어요?”
“제가 너무 꼬아서 들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아니라고 생각하셨고요?”
“그야 우영이가 아니라고 했으니까?”
현우영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럴 타입이 아니란 거 아니까 믿어요. 돌려서 말하기보다는 바로 말하잖아요, 우영이는.”
“……은찬 형.”
그는 심은찬이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길게 한 번 쓸어내렸다.
“그때는……, 그 일은 잊어 주세요.”
“에이. 너무 강렬한 기억이라 그러진 못하고요.”
놀리는 걸 감추지 않는 심은찬의 말에 현우영이 입술을 가볍게 물며 서러운 시선을 보냈다. 그 반응에 즐거워졌다. 부끄러워할 거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반응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손가락으로 탁자 표면을 문지르는 행동조차 평소와는 다르게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뇨. 괜찮아요. 제가 한 일이니까요. 제 업보죠. ……어서 드세요. 식겠네요.”
반쯤 포기한 사람마냥 어른스러운 단어를 입에 올렸다.
심은찬은 마침 그 주제가 다시 나온 지금이 이전부터 궁금했던 걸 물어볼 기회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때 최고가 돼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던 거예요?”
“…….”
심은찬의 질문에 탁자 위를 춤추던 현우영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포부라기엔 좀 이상해서요. 갑자기 너무 이상한 걸 물어봤나요?”
현우영은 “그건 아니에요.” 하고 말은 했지만 잠시간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냥 시시한 일이에요. 말하기도 변변찮은.”
시시하고 변변찮은 일로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 의미는, 더 이상 이 주제로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굳이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파고들어 갈 정도로 중요한 일도 아니고 말이다.
“알겠어요.”
더 이상 뭐라고 하기도 뭐했기에 적당히 대꾸한 심은찬은 밥을 떠서 입에 넣었다. 서로 시간도 없는데 빨리 먹고 일어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평상시에 먹는 것보다 많은 양을 퍼서 입안에 넣었다.
“형. 잠깐만요. 천천히 드세요. 그렇게 드시다가- 어, 입술에 뭐 묻었어요.”
“응? 뭐? 어디요? 없는데요. ……에이, 농담한 거죠?”
“이런 농담을 왜 하겠어요. 기다려 보세요.”
손가락으로 닦아 보았지만 묻어져 나오는 게 없었다. 현우영이 손을 뻗어 농담 취급을 하는 심은찬의 입술을 문질렀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한 심은찬은 몸을 뒤로 물리며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이거요.”
현우영의 손에 작은 김 조각이 묻어 있었다.
“아, 진짜네. 고마워요.”
민망한 심은찬과는 달리 현우영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현우영이 휴지로 손을 닦는 걸 본 심은찬은 물을 마시며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휴지로 닦으면 됐을 걸.”
“그러게요. 버릇 같은 거라서 생각도 하기 전에 먼저 움직였나 봐요.”
“버릇? 그런 버릇도 있어요?”
참 특이하다 생각하면서 되물었다.
“제 밑으로 동생들이 세 명 있거든요.”
“……헐.”
움직이던 수저를 멈추고 반사적으로 현우영을 쳐다보았다. 심은찬의 입에서 나온 감탄은 진심이었다. 4형제라니. 정말 드문 가족 구성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하던 심은찬은 젓가락을 멈추고 현우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지금 맥락에서 갑작스럽게 나온 가족 구성원 이야기가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어, 가만. 지금 절 동생 취급한 거예요?”
“예? 아뇨. 아니, 그건 아니고요.”
현우영이 드물게 당황하고 있었다. 한 손을 뻗어 내젓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미간을 찌푸리더니 잠시 생각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