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61)

#27

설날 당일.

드라마 촬영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감독님의 배려로 오늘 하루 촬영을 하지 않고 특별히 쉬어 갔다. 보통은 연휴고 뭐고 없이 촬영을 해서 이런 일이 드물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어제도 촬영이 조금 일찍 끝냈다. 그렇다고는 해도 새벽 1시이긴 했지만.

부모님께 전화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모처럼 맞는 휴일을 조금만 더 만끽하고 싶었다. 침대의 포근포근함이 정말 기분 좋았다. 10분만 이러고 있자고 생각하며 이불에 얼굴을 비볐다.

지잉

핸드폰의 진동 소리가 들렸다. 조금 더 게으름을 부리고 싶었던 심은찬은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덮었지만 연이어 들리는 진동 소리에 부스스 머리를 들었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김휴인이었다.

-은찬 안녕 새해 복 많이 받고 떡국도 꼭 챙겨 먹어! 난 먹었음!

메시지뿐만이 아니라 떡국 사진까지 찍어서 보냈다.

심은찬은 메시지를 보며 웃었다.

촬영을 하면서 다른 출연진들과 상당히 많이 친해졌는데 특히나 김휴인과는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아무리 캣닙 특성이 계기가 됐다곤 하지만 실제로 김휴인의 살가운 성격 덕분에 심은찬도 깜짝 놀랄 정도로 가까워졌다. 매일 전화 통화는 기본으로 문자로 시시한 잡담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활동 분야는 다르지만 그렇기에 좀 더 속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특히나 김휴인은 심은찬이 처음 도전하는 정극에서 헤매지 않을 수 있도록 잘 이끌어 준 사람이었다. 싫은 기색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어떨 때는 심은찬보다 먼저 그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부분을 집어 주기도 했다.

심은찬이 촬영을 할 때는 빠짐없이 나와 모니터링하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매니저라고 해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촬영 스케줄이 대폭 빡빡해져 자신의 일을 소화하기만으로도 힘들었을 텐데 이렇게 친절을 보여 주는 그를 싫어할 리가 없었다.

심은찬은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얼마 신호가 가지 않아 김휴인이 전화를 받았다.

“형.”

-응, 은찬아.

“떡국 맛있겠다.”

-지금 일어났구나? 집에는, 못 갔겠고. 오늘 우리 집에 올래? 떡국 줄게.

김휴인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권유했다.

그렇게 예쁘다, 귀엽다 해 주는 김휴인이 심은찬도 좋았다. 그래서 심은찬의 인간관계 중 매우 드물게 편하게 말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 김휴인의 요구가 있었던 것도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역시 좀 어색하긴 했지만 이내 익숙해졌다.

“다음에. 오늘 우리 연습이라. 다음에 만두 많이 넣은 떡국으로 해 줘요.”

심은찬의 말에 김휴인이 웃었다.

-그래그래. 우리 은찬이가 원하는 거면 다 해 줘야지. 근데 오늘도 연습이면 다른 멤버들도 다 본가에 안 간 거야?

‘우리 은찬이’. 퍽이나 낯 간지러운 애칭이었다.

심은찬도 처음에는 적응하지 못했지만 김휴인 자체가 워낙 그런 사람이었다. 과할 정도의 친밀함을 보였는데 그게 연기가 아니었다. 심은찬에게 특히나 각별하게 대했다. 두 사람 중 어느 한쪽의 성별이 달랐다면 필시 사귄다는 소문이 났을 터였다.

“조금 있으면 뮤비 촬영이라 맞춰 봐야 해서.”

멤버들 중 심은찬이 제일 연습이 부족했다. 이전 생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생각해 보니 뭉그적거릴 때가 아니었는데. 심은찬은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뮤비 촬영? 아이구. 바쁘네 우리 은찬이.

“해야 할 일인데, 뭘.”

-기특해라.

그러잖아도 요새 늘어난 고민거리가 바로 이거였다.

뮤비 촬영. 정확하게는 뮤비 촬영 장소.

이전에 찍었던 곳은 폐공장이었는데, 촬영을 할 때에도 먼지 때문에 고생고생하며 찍었는데 조명을 뭘 어떻게 한 건지 어둑어둑해서 멤버들 얼굴에 그늘이 지고 뭉개져서 말도 아니었다. 얼마 없는 팬들도 이게 최선이냐, 애들 얼굴이 달이냐 왜 월식이 생기냐고 소속사를 욕하는 의견이 주를 이루었었다.

몰랐으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알고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 문제 역시 해결을 해야 했다.

-은찬아. 무슨 일 있어?

“응? 아니, 없는데. 왜?”

-한숨을 쉬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뮤비 생각을 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온 모양이었다.

김휴인은 편한 상대이긴 하지만 그런 부분까지 털어놓을 정도로 분별이 없진 않았다. 이 고민은 오롯이 심은찬의 몫이었다. 다행히도 김휴인은 심은찬의 대답을 듣고 그의 속내를 눈치챈 건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이렇게 깔끔한 부분이 참 좋았다.

-아, 그래. 이번에 우리 사촌 형이 베이커리 카페 한다는데 촬영 끝나면 언제 한번 같이 가자.

“베이커리 카페? 좋지.”

-엄청 커. 600평 정도거든. 무슨 식물원 콘셉트로 하는데 아직 다 꾸미진 않았나 봐. 한창 공사 중인 사진이긴 한데 사진 지금 보내 볼게. 한번 볼래?

심은찬은 연이어 도착한 사진들을 확인하고 정수리에 번개가 꽂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진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여기다.

이번 뮤비 촬영지는 바로 여기였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었다.

“휴인이 형. 염치없지만 부탁이 있는데 혹시 괜찮을까?”

-뭔데? 얘기해 봐. 우리 은찬이 부탁이라면 내가 다 들어줄게.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일방적인 부탁이었으니 망설여졌다. 심은찬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혹시 베이커리 카페 오픈하신다는 사촌 형님 연락처를 좀 알려 줄 수 있을까?”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내가 형한테 미리 얘기해 놓을게.

김휴인은 이유도 묻지 않고 흔쾌히 승낙했다. 잠깐의 텀을 가진 후 그가 다시 입을 열고 웃음기가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고민거리는 좀 해결이 됐어?

심은찬은 질문을 받고 내심 감탄했다. 김휴인은 역시 김휴인이었다. 심은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기가 막히게 빠른 눈치로 모든 걸 꿰뚫어 본 듯했다. 가끔 김휴인이 보여 주는 이런 부분에 그가 마치 초능력을 가진 게 아닐까 싶어지기도 했다.

이쯤 돼서는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심은찬은 웃으며 답했다.

“응. 정말 고마워, 형.”

통화를 마친 심은찬은 기지개를 한번 쭉 켰다.

김휴인이 사촌 형과 통화를 한 후 알려 준다고 했으니 그 뒤에 연락을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그 사이 뭔가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꼬르륵.

그래, 밥을 먹는 일 같은 거.

마지막으로 끼니를 먹었던 게 언제더라. 심은찬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냉장고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면서 반추해 봤다.

“……허얼.”

그러니까 얼추 18시간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렇게 배가 고팠구나.

자기는 엄청 오래 잤다.

일부러 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간헐적 단식을 하고 말았다. 이렇게까지 굶을 계획은 없었는데. 하기야 워낙 잠이 부족했었어서 다시 되돌아간다고 해도 먹는 것보다 잠을 택하긴 했을 거다.

“아무도 없나.”

숙소가 너무 조용했다.

하긴 지금 시간이면 다들 연습실에 가 있을 확률이 컸다.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일어나면 연습실로 오라는 메시지가 있었다. 깨우지 않고 재웠던 건, 멤버들도 그동안 심은찬이 얼마나 수면 부족인 상태인지 빤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주일 평균 수면이 10시간도 되지 못한 상태인 심은찬을 데리고 안무를 익히느니 차라리 좀 더 재우는 쪽을 택한 듯했다.

정말 오랜만에 폭면을 취한 상태라 그런지 머리는 좀 멍하긴 했지만 컨디션이 전에 없이 좋았다.

갈 땐 가더라도 일단 먹는 것부터 좀 해결을 하고 나서. 이 정도는 다른 멤버들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다.

그래도 일어났다는 연락은 하자.

심은찬은 정민유에게 지금 일어났으나 배가 너무 고파서 식사를 하고 가겠다는 메시지를 넣었다.

심은찬은 미친 듯이 꼬르륵거리는 제 배를 달래듯 손바닥으로 슥슥 문지르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여러 밑반찬들이 들어 있는 게 보였다. 사 온 것들도 있고 각자 집에서 보내 준 것들도 있었다. 당장은 배고파서 뭐든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반찬들을 꺼내서 쫙 늘어놓고 냉동실 문을 열어 보니 얼린 밥들이 없었다. 찬장을 열어 봤으나 공교롭게도 즉석밥 역시 똑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으로 앓는 소리를 낸 심은찬은 반찬통을 다시 다 집어넣고 찬장 한구석에 있는 컵라면을 꺼냈다. 손가락으로 비닐을 박박 긁어 뜯었지만 공복이라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인지 자꾸만 미끄러지기만 할 뿐 실패를 거듭했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을 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누구세요?”

컵라면을 들고 있는 상태 그대로 움직임만 멈춘 상태에서 소리 높여 물어보았다. 그러나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심은찬이 천천히 걸음을 떼어 현관문 쪽을 향해 갔을 때였다.

“은찬이 형, 식사하셨어요?”

“깜짝이야……. 우영이었어요? 기척 좀 내고 다녀요.”

한숨을 내쉰 심은찬은 제 말투가 썩 좋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고는 멋쩍게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연습실에 있는 거 아니었어요?”

“은찬이 형 일어나셨다고 들어서요. 숙소에 밥이 없어서. 그거 컵라면이죠?”

현우영의 손에 비닐봉지가 달랑이고 있었다. 그 안에는 햇반이 찬란하게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심은찬은 저도 모르게 “우와.”하는 소리를 내며 현우영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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