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여기 온 팬들도 한 명 한 명 각자의 생활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일상을 포기하고 일부러 하루를 거의 통으로 비우고 찾아와 준 게 고맙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려는데 현우영이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왜요? 뭘 그렇게 놀라요?”
“진짜로 그렇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어요.”
현우영의 말에 심은찬은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표정을 보아 하니 과장을 하나도 보태지 않고 진짜 그렇게 느낀 걸 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심은찬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당연한 거죠. 잠깐. 그렇게 말할 줄 몰랐다는 건 제가 팬들 사랑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인 줄 알았다는 거예요?”
“예? 아뇨. 그건 아닌데. ……아니에요.”
심은찬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고개를 흔들던 현우영이 멀뚱히 쳐다보았다. 자신이 그의 뒤로 돌아갈 때까지 현우영은 심은찬이 하는 행동을 고개만 돌리며 바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왓!”
심은찬이 현우영 뒤에서 무릎 찍기로 그의 무릎 뒤쪽을 공격하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기우뚱 흔들렸다.
“아직 데뷔도 안 한 우영이도 팬들 생각을 하는데 왜 데뷔한 제가 팬들 생각을 안 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현우영은 순간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괘씸하긴. 팸팸이랑 제 사이를 의심한 죄예요.”
“아뇨, 그게, -죄송합니다.”
무슨 말을 하려던 현우영이 입을 다물고 단출하게 사과만을 건넸다. 심은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 줄게요.”하고 대꾸하는 것으로 일은 일단락되었다.
약간의 소란스러움에 멀찍이 있던 정민유와 류서오가 다가오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손사래를 치면서 장난했다고 말하자 약간의 의구심이 섞인 시선을 보냈지만 딱히 캐묻지 않았다.
“다음은 무슨 경기예요?”
“음, 승부차기라고 하던데.”
“그래요? 그럼 반응 딸 테니까 가서 저쪽 가서 앉아 있어야겠네요.”
녹화를 시작한 지 꽤 된 것 같은데 아직 점심시간 전이었다. 하긴 이렇게 저렇게 녹화를 천천히 진행해서인지 제대로 경기를 뛴 건 몇 개 없었다. 살짝 비뚤어진 이름표를 바로 잡으며 아이돌이 모인 쪽을 보았다.
다른 쪽에서 쉬고 있던 아이돌들도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먼저 자리로 돌아가는 정민유와 류서오보다 느리게 움직이던 심은찬은 현우영 쪽을 흘깃 보았다.
“참, 우영아. 음료수 고마워요.”
“아녜요.”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 일부러 천천히 걸어간 것이 분명한 심은찬을 현우영이 뒤에서 불렀다. 무슨 일인가 하고 쳐다보니 현우영이 고개를 살짝 꾸벅였다.
“조금 전에 실례되는 말씀 드려서 죄송합니다.”
이걸 또 뭐 굳이 사과까지.
심은찬은 크게 뜬 눈을 천천히 깜빡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사과는 뭘요. 됐어요. 저도 조금 전에 뒤에서 무릎 찍어서 미안했어요.”
현우영의 등허리를 툭 두드린 심은찬은 걸음을 빨리했다.
노래 경합에서 우승상으로 받은 단독 촬영권을 언제 쓰는 게 좋을지 골똘히 생각에 빠져들었다.
* * *
승부차기와 양궁에 이어 씨름 순서가 됐다.
씨름 예선전에서의 상대는 아이오넥트였다. 첫 번째 순서로 출전했던 문세별이 가볍게 상대를 눌렀다. 이대로 운빨을 받나, 싶었는데 다음 경기의 상대가 운동을 하다가 아이돌로 전향한 걸로 유명한 외국인 멤버 레도였다.
해 보고 오겠다고 나간 도준서의 얼굴은 승부욕이 차올라 있었다.
씨름인데 왜 이래. 어색한 얼굴로 도준서를 쳐다보았다. 좀 당황스러웠다. 물론 이겨서 준결승에 진출하면야 좋지만 대체 어느 부분에서 이렇게 기합이 들어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워낙 함께 지낸 시간이 많아서 저 표정을 하는 도준서에게 다른 말은 들리지 않는다는 걸 익히 알고 있던 심은찬은 가만히 그의 등을 두드렸다.
“다치지만 말고 와.”
“알겠어. 이겨서 올게.”
그런 말은 안 했거든.
그러나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은 심은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응원했다.
“준서가 씨름 사전 연습 때 엄청 열심히 했어.”
도준서가 출전해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정민유가 말해 주었다. 한동안 바빠서 거의 정신이 쏙 빠진 채로 숙소에서 잠만 자고 촬영을 나갔더니 전혀 몰랐다. 뭘 얼마나 고생을 했길래 도준서가 저럴 정도일까.
방송국에서 연습하는 장면을 촬영해 갔다고 하니 아마 자료 화면으로도 잠깐 나올 것 같은데 한번 봐야겠다 싶었다. 녹화한 분량에서 엄청 적긴 할 테지만 말이다.
레도가 서양인이라 체격이 좋긴 했지만 도준서 역시도 185센티로 작은 편이 아니었다. 준비 자세에서 샅바를 쥐는 도준서의 손등에 힘줄이 돋아나는 게 보였다.
다치지만 말라고 빌며 경기에 집중했다. 카메라가 다가와 참가하는 멤버가 있는 팀의 얼굴을 집요하게 훑는 게 느껴졌다.
삐이익-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경기가 시작되었다.
서로 누가 먼저 기술을 사용하는지 눈치 싸움이 굉장했다. 팽팽한 기 싸움으로 서로 탐색하는 몇 초가 지나자 도준서가 다리를 걸었다. 그러나 레도는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도준서가 기술을 거는 것을 역으로 이용해 그를 들어 올려 바닥으로 쓰러트렸다. 그 장소에 있는 누구나 레도가 이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몸이 먼저 바닥에 닿은 건 레도였다.
도준서가 쓰러지면서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어 상대의 어깨가 바닥에 닿게 만들었다.
“와!!”
예상외의 결과에 다들 함성을 질렀다. 앉아서 보고 있던 류서오도 언제 일어났는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씨름 단체부 결승 진출이었다. 멤버들 전부 도준서에게 달려가 환호했고 B the 1의 팬석에서도 도준서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잘했어……!”
“준서, 최고다!”
준결승전이 되었다. 결승에 가까워진다는 건 그만큼 카메라 원샷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말과 같은 거였다. 멤버들의 오기도 있고 심은찬 본인의 운빨이 합하면 결승도 꿈은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준결승전에서 거짓말과도 같이 두 판을 내리 졌다. 심지어 문세별은 발목을 살짝 접지르기까지 했다.
경기 도중 다치는 걸 제일 우려했는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녹화 도중 다치면 방송국은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야 물론 괜찮냐는 안부 정도는 물어보겠지만 그 이상 뭘 해 주진 않는다. 치료비며 치료 기간 동안 밀리는 스케줄이며 전부 자기가 부담을 하는 거고, 결과적으로 본인 손해다. 그러니 우승보다 다치지 않고 경기를 마무리 짓는 게 최고였는데.
“세별이 형, 괜찮아요?”
“괜찮아. 이따 계주까지만 뛰고 병원 갔다가 좀 쉬면 되겠지.”
웃으며 대답하는 문세별을 보는 멤버들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아이돌 올림픽 대회의 가장 마지막에 하는 400m 계주 출전 멤버는 정민유, 도준서, 심은찬, 문세별이었다. 몸 쓰는 걸 잘하는 문세별은 계주의 핵심 멤버였다.
“세별이 너는 쉬고 있어. 계주 내가 나갈게.”
그때 류서오가 나섰다.
워낙 뛰는 걸 싫어해서 어지간하면 걷기만 하던 류서오였다.
“야, 무리 안 해도 되는데.”
“무리는 네가 하는 게 무리지.”
류서오의 말에 문세별이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각오를 단단히 한 모양이었다.
류서오가 조용하긴 해도 한번 마음을 먹으면 어지간해서는 이길 수 없다는 걸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한 번 씰룩인 후 말문을 열었다.
“근데 나 마지막 주자는 좀 부담이라……. 바꿔 줘.”
그리고 또한 류서오는 쓸데없는 허세는 부리지 않는, 실리적인 타입이었다.
상황이 얼추 마무리가 되었다.
촬영을 쉬어 가는 틈에 팬석으로 가서 손을 흔들었다. 도시락이 그사이에 전달이 되었다고 전해 듣긴 했는데 워낙 거리가 멀었기에 먹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소속사에서 준비한 도시락을 맛있게 먹어 줬으면 좋을 텐데.
심은찬을 비롯한 멤버들이 팬석 근처로 가서 손을 흔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B the 1을 비롯해 다른 팀들도 누튜브에 올릴 영상을 찍기도 하고 있었다. 문세별은 부상을 염려할 팬들을 걱정해서였는지 평소보다 활발한 태도로 영상을 촬영하고 있었다. 함께 자콘 촬영을 하던 심은찬은 정민유에게 다가가 단독 촬영권을 언제 사용할지 넌지시 제안했다.
“저희 계주 시작 전에 쓰는 건 어떨까요?”
“계주 때?”
“네. 단체니까 세별이 형도 함께 촬영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 그런가.”
“괜찮을 것 같은데요.”
옆에서 듣고 있던 류서오도 거들었다.
정민유가 스태프에게 말하러 간 사이 문세별이 멤버가 아닌 다른 쪽을 찍고 있는 게 보였다. 뭔가 하고 다가가니 현우영이 화면에 나와 있었다. 뭘 하고 있는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여기, 저희의 새 멤버인 현우영입니다. 요기, 여기 있는 사람요. 안타깝게도 참가는 하지 못했지만 같이 왔습니다. 스태프 목걸이 차고 뭘 하고 있는 걸까요.”
문세별의 해설을 들으며 녹화 화면을 보고 있자니 현우영이 좀 레고처럼 보이기도 해서 풉 웃음이 나왔다. 문세별이 카메라를 다시 이쪽으로 돌렸다.
“이 영상을 공개할 즈음엔 같이 활동 중일 텐데 아쉽네요. 다음 아올대를 기약해야겠습니다. 그렇죠?”
“네. 그렇죠.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적당히 호응하는 것으로 영상을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심은찬 뒤로 누군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자콘 촬영하시는 거예요?”
갑작스럽게 난입한 사람은 맥스어핀의 최원민이었다.
“어, 선배님. 안녕하세요.”
“재미있게 촬영하시는 것 같아서 잠깐 와 봤어요. 괜찮으실까요?”
괜찮다마다. 완전 환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