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61)

#23

상태 창을 읽은 심은찬은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말을 해 보는 게 좋다는 인생의 진리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

운이 상승된다는 보상은 좋은데 정작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그가 확인했던 상태 창에 운이라는 능력치 항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숨겨 놓은 부분이 있는 건가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 부분을 물어본다고 답변이 올 것 같지도 않았다. 알려 줄 거면 진작에 운 스탯을 보여 줬겠지.

심은찬은 진행 중인 미션을 확인했다.

[<함께 사는 세상 혼자만 잘 살면 재미가 없죠.> 적용 중.

성공 시 미션 상대의 능력치 1랭크 즉시 업.

미션 올 클리어 시 능력치 선택 후 등급 업이 가능합니다.(1/5)

단, 실패 시 페널티 발동.]

5개 중에 한 개를 채웠다. 남은 건 4개. 다 성공하면 원하는 능력치 랭크를 올릴 수 있다. 심은찬은 자신의 상태 창을 확인했다.

[이름: 심은찬

스타성: A

가창력: B

퍼포먼스: B

외모: A

멘털: SS(보정 전: F)

특성: 회귀자(??), 말랑한 강철(멘털 강화 효과/SS), 인간 캣닙(호감도 강화 효과/S−) 활성화 중.]

모두 다 성공했을 때 어떤 걸 올릴지 미리 생각해 두고 있어야 하나 싶었다. 장점을 확실히 올려야 하는지 아니면 부족한 걸 채워야 하는지 결정이 힘들었다.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심은찬은 뺨이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현우영과 시선이 마주쳤다.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듯 턱을 들어 올리자 현우영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필요하면 다시 와서 말을 걸겠지 싶어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심은찬은 팬 소통 앱인 코스모스를 열었다. 한동안 스케줄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메시지를 보내지 못했던 게 떠올랐다.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재빠르게 내용을 훑어보았다.

응원하는 팬, 이해민의 일로 걱정하거나 욕하는 팬. 참 여러 반응이 뒤섞여 있었다. 한동안 아무 반응이 없는 심은찬을 비아냥거리는 메시지들도 눈에 들어왔다. 좋은 말들도 많긴 했지만 눈에 들어오고 가슴에 와서 박히는 건 날 선 코멘트들이었다.

지금은 SS급 멘털 덕분으로 그냥 넘길 수 있었지만 이전 생에서는 그 메시지를 하나하나 곱씹으며 마음에 무거운 추를 달아 놓은 것처럼 우울해하기도 했었다. 그런 반응조차 자신을 상처 내길 원하는 사람들의 바람대로 움직이는 거라는 걸 몰랐었다.

모든 메시지에 하나하나 다 답을 하고 싶었지만 물리적으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심은찬은 한숨을 한 번 내쉰 후 자판을 빠르게 두드렸다.

[팸팸들 안녕 오랜만이죠 오늘은 아올대 촬영날이에요 응원 와 준 팸팸들, 그리고 멀리서 응원해 주는 팸팸들 고마워요. 안 다치고 열심히 하고 올게요!]

아직 공식 팬클럽은 없었지만 팬 카페는 있었다. 이름은 ‘컴패니언’인데, 팬 카페 생성 초기에 투표로 지어진 이 명칭은 ‘B the 1과 함께 간다’는 의미였다. 멤버들은 애칭으로 팸팸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메시지 전송을 누르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아이돌 올림픽 대회의 녹화가 시작되었다.

* * *

카메라 원샷을 탐내는 아이돌들의 경쟁이 치열했다.

B the 1 멤버들은 참가하지 않는 종목에서도 열심히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반응하는 장면에 한 컷이라도 잡히지 않을까 하는 것도 있었고 방송국 직원들이 호응을 잘 하라고 요구했던 것도 이유 중의 하나였다.

녹화는 중간중간 쉬어 가며 진행되었고 그때마다 팬들이 앉은 자리 쪽으로 갔다. 매우 적은 팬석을 배정받은 B the 1의 팬석은 3층이었고 그나마도 구석에 있었기 때문에 팬들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팬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기껏 와서 이렇게 작은 모습만 보고 돌아가게 하는 게 미안해졌다. 훨씬 가까운 2층 응원석에서 팬클럽 응원 봉을 흔들며 응원할 수 있는 인기 팀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대형 팀에 비하면 정말 한 줌인 20명이었지만 그렇기에 그 한 명 한 명이 다 소중했다.

멀리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손을 흔들 수 있었고 팬들이 멤버들의 이름을 불러 줄 때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려운 고비 직후에 있는 공개 스케줄이었기 때문일까. 팬들이 멤버들을 응원하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 한다는 감정이 공기를 타고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기분이 좀 이상했다.

예전에는 왜 이걸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까.

뭐라고 제대로 표현을 할 수 없었다. 그저 가슴이 벅차올랐다.

심은찬은 뒤를 돌아보며 팬석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웃고 다른 멤버를 끌고 근처에 가서 함께 뚝딱이며 춤도 추었다. 지금 심은찬이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이해민이 탈퇴한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물론 신경 쓰였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고 이해민은 떠났다.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그리워하며 그 빈자리를 남겨 두는 건, 팬들에게나 멤버들에게나 좋은 일은 아니었다. 이제는 새 멤버로 현우영이 들어오지 않았는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까지는 아니더라도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녹화 도중 방송국 스태프에게서 각 팀의 리더들만 모이라는 공지가 전해졌다. 무슨 일이지 싶어 정민유가 의아해하며 리더끼리 모이는 곳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래.”

“그러게. 뭐 순서 같은 거 정하려나 본데. 무슨 신박한 걸 하려고 저러나.”

비단 B the 1뿐만이 아니라 다른 팀원들도 리더가 향한 쪽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상황을 알아보려 하는 것 같았다. 장내에 안내 방송이 울렸다.

“다음 경기를 준비할 동안 팀별 노래자랑이 있겠습니다! 각 팀 리더들끼리 경합해서 제일 높은 점수를 받은 팀에게 줄 특전을 준비했습니다.”

체육관 안을 웅웅 울리는 소리에 저마다 팀원들의 얼굴을 보며 어리둥절해했다.

간이로 하는 코너인가 싶었는데 스태프들이 노래방 기계를 밀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미리 배포했던 시간표에도 표기되어 있지 않은 건데 이 정도면 작정을 한 거였다.

가나다순으로 아이돌별 팀을 5팀으로 나누고 그 나뉜 팀에서 제비뽑기로 대표 아이돌을 골라 그들끼리 노래 경합을 벌이게 되었다.

갑자기 이런 이벤트를 준비하다니. 뭐 연습이고 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텐데 난감했다. 방송국에서 준비한 걸 보면 즉석에서 급조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이게 실제로 방송에 쓰이는지 어쩌는지 모르겠지만 어쨌건 하라니 해야 했다.

심은찬은 직전에 정민유에게 했던 미션을 생각하며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우연인지 아니면 필연인지 랜덤 랭크 업 된 능력치가 가창력이었다.

자신이 속한 팀의 노래는 제외하고 골라야 한다는 추가 규칙으로 각자 자신 있는 곡들을 고르기에 여념 없었다.

제일 첫 타자는 맥스어핀이었다.

90년대에 유행한, 지금도 응원가로 자주 부르는 신나는 노래였다.

300명 정도가 들어온 맥스어핀의 팬석은 벌써부터 응원 물결로 난리가 났다.

-신나는 밤하늘 그대 얼굴 속 빛나는 별처럼

-달려요 하늘을 내 마음 모든 힘 다해 달려요

“꺄아악!”

워낙 유명했던 노래였던 만큼 체육관이 들썩일 정도로 호응이 좋았다. 맥스어핀의 연차가 높았기 때문에 다른 팬들의 반응이 좋았던 것도 주효했다. 그 열기에 힘입어 노래 점수가 99점이 나왔다.

차례차례 다른 아이돌들도 노래를 했지만 아쉽게도 99점의 벽을 넘어서는 팀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다들 분위기를 맞춰 신나는 댄스 음악 위주로 선별을 했기에 장내의 분위기는 점점 달구어졌다.

정민유 바로 앞 차례인 투어스의 리더가 고른 곡이 시작되었다. 웅장한 전주가 흘러나오는 것에 그곳에 있던 아이돌들은 입을 다물고 서로 눈빛만 교환했다.

00년도 초반, 밀레니엄 분위기를 타고 유행했던, 고음 감옥으로 유명한 락 발라드의 대표곡이었다.

락이라는 장르 자체가 문제라는 건 아니었다.

단지 지금 이 장소에서 부를 만한 노래로 고르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었다.

투어스의 멤버들의 장탄식이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 저 형. 선곡 상의할 때도 미련 있더니 또 저래…….”하는 간절함을 담은 투덜거림도 들리는 것 같았다.

심지어 고음 부분에서 삑사리까지 냈다. 그곳에 있던 아이돌들이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을 했으나 조금씩 가라앉는 분위기는 어쩔 도리가 없었고 곡이 끝날 즈음엔 지하로 뚫고 내려가 있었다. 스스로 만족한 표정을 짓는 투어스 리더를 제외한 다른 이들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는 어색함이 드러나 있었다. 박수 소리마저 어색했다.

“네에. 투어스의 리더 김해윤 군이었습니다.”

“열창이었어요.”

“이 노래가 참 유명한 노래죠. 모두 한 번씩 노래방에서 불러 봤던 기억이 있는 노래죠. 그렇죠?”

“네, 맞아요. 그렇죠.”

노련한 MC의 멘트도 분위기를 살리기에 역부족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분위기에서 노래를 해야 한다니.

드디어 정민유의 차례가 됐다. 마이크를 건네받은 정민유는 웃고 있었지만 난감해하고 있다는 걸 멤버인 심은찬은 알아볼 수 있었다.

정민유의 선곡은 무난한 댄스곡이었다. 하지만 투어스가 워낙 분위기를 망쳐 놓았기에 역전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았다. 점수가 잘 나오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만큼 현장 분위기라는 걸 무시할 수가 없었다.

정민유가 선택한 노래의 전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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