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편지 전달해 주는 거야 뭐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어려워. 어려워해라.
일반인의 상식을 여기에 대입하지 마.
너무 대수롭잖게 대꾸를 해서 하마터면 수긍할 뻔했던 심은찬이 천장을 한 번 보고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저희 팬분들이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는데 저는 고마울 것 같아서요.”
“그, 그야 그렇지만, 아니. 잠깐만. 그게 아니고요.”
할 말이 산더미처럼 많았는데 너무 많은 탓에 도리어 걸려서 제대로 출력이 되지 않았다.
얘가 이런 걸 신경 쓰는 애네 싶어 현우영에게 가졌던 이미지가 좀 달라졌다. 좀 신기하기도 했다. 솔직히 데뷔하기 전부터 이런 마인드라니 살짝 기특하기도 했다. 이런 건 누가 알려 줘야 되는 게 아니었다. 주입식으로 교육받는다고 가져지는 것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자기를 좋아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아니, 근데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심은찬은 풀어지려는 눈매를 가다듬고 현우영을 쳐다보았다.
이 편지에 무슨 말이 적혀 있을 줄 알고 전해 주냐. 네가 우체부냐 뭐냐. 맥스어핀 선배님들께는 뭐라고 하고 가져다줄 건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만 한가득이었다. 하지만 심은찬은 그 말들을 모조리 꿀꺽 삼켰다. 지금 와서 책임을 묻는다고 해도 뭘 어쩔 수 없었다. 벌어진 일을 어떻게 수습을 할 생각을 해야 했다. 여기서 제일 손쉬운 해결 방법은 버리는 거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심은찬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의 팬레터를 버리는 건 할 수가 없었다. 제일 먼저 선택지에서 삭제했다. 그러면 매니저 형에게 부탁을 할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현우영이 망설임 없이 걷기 시작했다.
쓸데없이 다리가 길어서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벌써 저만큼 멀리 떨어져 있었다. 심은찬이 빠르게 달려가 그의 팔을 잡았다. 현우영이 의아한 표정들 지었다.
“바로 전해 드리고 가야죠. 은찬 형도 준비하셔야 하잖아요.”
“아니, 그렇게 간단한 얘기가 아니라.”
“선물은 몰라도 팬레터잖아요. 팬레터 정도로 뭐 큰일이 나겠어요.”
“아니, 아니. 그러면 매니저 형한테 부탁을 해서-”
“매니저 형 번거롭잖아요. 빨리 드리고 올게요.”
“잠깐요, 우영아……!”
결국 심은찬은 그의 팔뚝을 잡아 세웠다. 얘가 일부러 이러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표정이 심은찬을 약 올리려거나 하는 불온한 의도 하나 없이,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서 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별수 없었다. 잘 모르고 하는 행동인데 더 이상 뭐라고 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중에 잔소리를 곁들인 설명을 해 줘야 하긴 할 테지만 지금은 현우영의 말대로 얼른 팬레터를 전해 주고 돌아가는 게 확실히 가장 빠르게 일을 수습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불도저처럼 행동했어야 했을까.
눈을 가늘게 뜬 심은찬이 아휴, 하고 한숨을 쉬며 현우영에게 손을 펼쳐 내밀었다.
“제가 전해 드릴 테니까 이리 줘요.”
아무리 생각해도 후배 그룹이 나타나 팬레터 전달하는 건 너무 생뚱맞았다. 심은찬은 제 기억을 재빠르게 훑어보았다.
“…….”
심은찬이 기억하는 한 맥스어핀을 직접적으로 만나서 인사를 나누었던 적은 없었다.
캣닙 특성을 사용할 수 있다.
다행이었다. 그러면 적어도 뭐 하는 놈들이냐는 시선은 피할 수 있을 테니.
“아뇨. 이건 제가 드리기로 한 거니까요. 형이 그러실 필요는-”
“어디 형 있는데 막내가 나서요. 빨리요.”
유교를 내세우자 현우영도 더 이상 반론을 하지 못했다. 물론 할 말이 있는 듯 입꼬리가 씰룩거리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현우영의 손에서 세 통의 편지를 건네받은 심은찬은 앞서 걷기 시작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책임 소재의 문제였다.
갓 팀에 합류한 애가, 그것도 제일 막내가 문제의 소지가 될 만한 일을 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잘못한 건 얘예요, 하고 떠넘기는 걸로 마무리 지을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Max'A Pin이라고 적인 대기실 문을 찾아낸 심은찬은 현우영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잠깐 좀 멀리 서 있어 봐요. 아니다. 모퉁이 쪽에 안 보이게 있어요.”
“예?”
“빨리요. 형 말 빨리 안 듣죠?”
평소답지 않게 나이를 내세우는 심은찬의 재촉에 현우영은 입을 다물고 뒷걸음질을 해 조금 떨어졌다.
아예 모퉁이 쪽으로 돌아서 안 보이게 서 있으라니까 자기가 부탁받을 일이기에 그건 또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반투명한 문이라 어떻게 따로 모션을 취할 수도, 그렇다고 계속 현우영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어서 눈을 한번 찡그려 보인 심은찬이 맥스어핀의 대기실 문에 노크를 했다. 안에서도 누군가 찾아왔다는 걸 빤히 알고 있겠지만 예의상 한 행동이었다.
노크 직후 문이 열리고 안에서 맥스어핀의 멤버가 모습을 보였다. 운이 좋게도 팬이 편지를 부탁했던 최원민이었다. 맥스어핀 비주얼 멤버답게 아주 눈이 부셨다. 심은찬은 곧바로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B the 1의 심은찬이라고 합니다.”
“어. 안녕하세요.”
인사는 했지만 무슨 용무로 찾아온 건지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심은찬은 뜸 들이지 않고 바로 용건을 꺼냈다.
“이거, 저쪽에서 팬분을 만났는데 전해 달라고 하셔서요.”
“네? 엇. 아. 편, 편지요?”
심은찬이 내미는 편지를 무심결에 받은 최원민은 직후에서야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제 손에 들린 팬레터를 한 번 내려다보고 심은찬을 한 번 쳐다보았다.
“저희 팬요? 이거 때문에 일부러 오신 거예요?”
“왜? 뭔데? ……어?”
최원민의 반응에 뒤에서 쉬고 있던 다른 멤버가 다가와서 보고 헙,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아이돌 올림픽 대회 녹화 와서 다른 팀의 팬레터를 전달하러 온 아이돌이라니. 확실히 좀 특이하게 보이긴 하겠지. 심은찬도 현우영이 아니었다면 이러진 않았을 거다. 확실히 비상식적인 일이긴 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최원민이나 다른 멤버의 반응이 썩 나쁘지 않았다. 심은찬을 비웃거나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인지도 없는 팀이 인기 많은 맥스어핀과 작은 접점이라도 만들기 위해 괜히 비벼 본다고 지레짐작하며 경계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것도 없었다. 활동 시기가 애매하게 어긋나기도 해서 직접 마주치는 건 처음이지만 느낌이 좋았다.
하긴, 그러니 데뷔 12주년 때에도 한 명의 이탈도 없이 멤버 전원이 재계약을 했었지. 이전 생의 기억을 더듬어 보던 심은찬은 목적을 마쳤으니 이만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인사를 했다.
“그럼 선배님, 오늘 녹화 때 뵙겠습니다. 부상 조심하시고 힘내세요.”
“아, 네. 저기. 저번 타이틀 곡이 from.S였죠? 잘 들었어요.”
설마하니 최원민이 곡명까지 알고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심은찬은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벌렸다. 팀 이름이야 스쳐 가듯 들을 수 있지만 곡명까지 매치시켜 기억하기는 어렵다.
자신이 속한 팀이긴 하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B the 1은 망돌이었고 곡 자체 역시도 유명하지 않았기에 최원민이 말했을 때 진짜로, 정말로 놀랐다.
“맞아요. 선배님께서 아실 줄은 몰랐어요. 영광입니다.”
“무슨 말씀을요. 당연히 알죠. 콘셉트도 그렇고 무대도 잘하셔서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최원민은 정말 사근사근한 성격인 듯 심은찬에게 어떤 종목에 참가하는지까지 물어보았다. 시작은 현우영이 벌인 난감한 사태의 수습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생각지도 않았던 친목을 다질 수 있었다. 대회 하면서 부상 조심하라는 말까지 잊지 않고 건넨 최원민과 마무리 인사까지 마친 심은찬이 대기실 문을 닫았다.
심은찬은 무표정으로 현우영 쪽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왜 그런 표정으로 보고 있어요?”
“평소랑 분위기가 많이 다르셔서요.”
“그럼 선배님 인사드리는데 평소 목소리로 말해요?”
심은찬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태연하게 말했다. 현우영을 쳐다보며 못다 한 말을 마저 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혼자 생각해서 행동하지 말고 물어보세요. 알았어요?”
“……. 예, 알겠습니다.”
현우영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더 이상의 사족을 붙이지 않았다. 빨리 돌아가자고 하면서 걸음을 옮기던 심은찬은 뒤에서 현우영의 목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부상이라니 무슨 말이에요?”
“아-. 여기서 다치는 경우도 많거든요.”
“예?”
대수롭잖게 대답하던 심은찬은 반문하는 현우영의 반응에 도리어 놀랐다.
왜 이런 반응이지. 연습생을 했다면 모를 수 없는 이야기 아닌가. 심은찬은 눈을 껌뻑거리며 현우영을 쳐다봤다.
괜히 방송국 놈들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시청률만 잘 나온다면 다른 건 별반 개의치 않기도 했다. 모든 방송국 관계자가 그런 건 아니었지만 대다수가 그랬다. 열악한 환경에서 부상자가 나와 팬들이 성토를 한다고 해도 시청률만 잘 나온다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아이돌 역시 거절을 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미운털이 박혀 몇 없는 지상파 음악 방송에 얼굴을 비출 기회를 원천 차단당하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참여하는 거다. 아이돌 올림픽 대회에서 주목을 받아 팀의 인기 상승을 얻을 수 있는 확률도 있긴 하지만 그 가능성이 크진 않았다. 가뜩이나 최근엔 누튜브 클립으로 올라가기에 본 방송의 시청률은 예전만큼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에 목숨을 거는 건, 그 불확실한 이익보다 거절했을 때 확실히 받는 불이익 쪽이 더 무섭기 때문이다. B the 1 역시 그래서 참가 제안을 승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