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서오 형. 뭐 드실래요? 요기 매점에서 뭐 좀 사 올게요.”
“응? 매점 열렸어?”
“모르겠어요. 한번 가 보려고요.”
심은찬이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자 류서오가 헛웃음을 지었다. 어지간히 심심한가 보구나, 하는 표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제가 가서 열렸는지 보고 올게요.”
그때 현우영이 나섰다.
“네? 아뇨. 괜찮아요.”
“제가 스태프잖아요. 열린 거 확인하고 말씀드리러 올게요. 헛걸음하시면 피곤하시니까, 앉아서 쉬고 계세요.”
현우영이 자신의 목에 걸린 스태프 목걸이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일부러 움직이려고 그러는 거라고 말을 하기도 전 현우영이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스태프라고 괜히 말해 준 게 아닐까. 심은찬은 현우영이 나간 문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생각했다. 스태프라는 걸 유난히 강조하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스태프라고 하고 데리고 온 게 기분 안 좋았나. 혹시라도 그걸로 꿍해 있는 거면 좀 그런데. ……아니면 그냥 스태프 과몰입인가.
돌아오면 한번 눈치를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한 심은찬은 무거운 눈꺼풀을 감았다가 떴다.
“도시락에 붙일 메모지 쓰자.”
“아, 네.”
매니저인 김선주가 대기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심은찬은 매니저에게서 메모지와 펜을 건네받고 팬들에게 제공할 도시락에 붙일 메모를 작성했다. B the 1에게 배정된 좌석은 20석이었다. 몇백 석을 배정받은 유명 아이돌에 비하면 너무나 적은 좌석 수였다. 그래도 이해민의 탈퇴 공지 이후에 녹화 참가 신청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펑크 없이 전원 다 출석해 주셨다는 이야기를 김선주에게 전해 들었다.
다른 아이돌 팬이 녹화 참가를 위해 팬인 척 신청하는 걸 막기 위해 팬 카페 활동 내역과 가입일로 허수를 추려 냈다고 들었다.
팀원이 빠지는 혼란스러운 시기에도 이탈 없이 B the 1을 응원해 주는 팬들에 대한 고마움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팬들에게 뭔가를 해 줄 수 있는 게 없을지 드라마 촬영을 하면서도 내내 고민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마음과 관심을 계속 유지해 주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그 사실을 심은찬은 이미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팬이란, 이전 생에서 아무리 원하고 갈구했어도 그 간절함만으로 얻을 수 있는 존재가 결코 아니었다.
이전 생에서는 연이은 멤버 탈퇴와 성형 수술 실패로 이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때도 이렇게 응원을 와 준 팬분들이 있었는데 그저 제 마음 추스르기에만 급급했다. 그때 심은찬은 형식적으로 손을 흔드는 것만 간신히 했었다.
심은찬은 이전 생을 떠올리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못 했던 걸 지금이라도 하면 된다.
“형 폴라로이드 사진기 챙겨 왔는데 그걸로 셀카 찍어서 랜덤으로 하나씩 메모지랑 같이 드리는 건 어떨까요?”
“폴라로이드 셀카?”
갑작스러운 질문에 김선주가 되물었다.
“팬분들 어렵게 발걸음해 주셨는데 도시락이랑 메모만 드리는 게 좀 아쉬워서요.”
공개 방송 때는 포토 카드를 준비했는데 아이돌 올림픽 대회에서는 별도로 준비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 공지 이후에도 지지를 해 주는 팬들이었으니 그들에게 뭐라도 해 주고 싶었다.
심은찬의 제안을 듣던 도준서가 어이없어하면서 웃었다.
“야, 그래서 폴라로이드 챙겨 달라고 한 거였어? 난 무슨 유언처럼 말하길래 뭔가 했더니.”
“왜, 뭐.”
“아니, 좋은 생각이라고. 괜찮죠, 형?”
김선주가 안 될 게 뭐가 있냐고 대답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멤버들은 준비된 도시락 개수에 맞춰 사이좋게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은 후 메모를 작성했다.
그러면서 꽤나 시간이 지났는데도 현우영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매점이 있다면 그렇게 멀리 있지 않을 텐데. 길을 잃은 건가 싶어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현우영에게는 핸드폰도 없어서 연락할 수도 없었다.
“민유 형. 저 우영이 좀 찾으러 갔다 올게요.”
결국 앉아서 기다리는 것보다 직접 찾으러 가는 편이 좋겠다 싶어 일어나는 심은찬의 말에 문세별과 이야기하던 정민유가 눈을 크게 떴다.
“엉? 아직 안 왔어?”
“네. 복잡해서 길을 잃었나 봐요. 찾으러 갔다 올게요.”
“그래, 조심히 갔다 와. 핸드폰 가져가지?”
“네.”
대기실에서 나온 심은찬이 좌우를 둘러보다가 한 곳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대기실 쪽을 지나쳐 좀 더 걷다 보니 멀찍이서 시꺼먼 롱패딩 차림을 한 누군가가 세 명의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게 보였다. 등을 지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키가 꽤 큰 스태프였다.
키가 큰 사람이 현우영만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100%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가능성은 있었다.
조금씩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그들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들려왔다.
“저기요, 여기 스태프세요? 혹시 선물 부탁 좀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팬으로 보이는 여자아이들은 원래 아이돌과 방송 관계자만 들어올 수 있는 구역이었는데 용케 몰래 숨어들어 온 모양이었다. 직접 가져다주면 문전박대당할 게 뻔하니 이런 식으로 스태프를 붙잡고 부탁하는 방법을 선택한 모양이었다.
저 사람은 현우영이 아닌가 보다.
그런 생각을 한 것도 그때였다. 현우영이라면 이럴 때에 안 된다고 확실하게 말할 것 같은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방송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팬들에게 잡혀서 애먹진 않았을 거다. 팬들 입장에서야 참으로 잘된 일이겠지만 좀 안쓰럽게 보였다.
“맥스어핀 오빠들한테 전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이거 맥스어핀 원민 오빠 가져다주세요. 진짜 부탁 좀 드릴게요.”
“가져다주세요. 제발요.”
꽤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소음이 없어서인지 복도에 간절하게 부탁하는 팬들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간혹 ‘그런 그룹도 아올대에 참가해?’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하는 팀이 종종 있는데, 맥스어핀이 바로 ‘그런 그룹’을 맡고 있었다. 맥스어핀은 올해로 7년 차인 데다 팬층도 탄탄했지만 소속사가 중소였기에 음악 방송이 볼모로 잡힌 아이돌 올림픽 대회에 참가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이런 부탁은 당연히 거절을 해야 맞았다.
솔직히 선물 전달이야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이게 후기라도 나오게 되면 곤란해졌다. 이런 식의 막무가내 선물 전달 성공 후기가 한 번이라도 SNS에 뜨게 되면 너도나도 몰래 잠입해서 아무나 붙잡고 부탁을 하는 일이 생길 게 뻔했다.
게다가 안티가 팬인 척 선물을 주면서 그 안에 무슨 짓을 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샌드위치 안에 커터 날을 숨겨서 선물인 척하고 줬던 일도 있었다. 다행히 매니저가 사전에 발견하고 폐기 처분을 해서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 일은 암암리에 소문이 나 어지간한 그룹의 경우 음식 선물은 단체로 들어오는 서포터가 아닌 건 받지 않는 기류가 형성되었다.
눈앞의 아이들이 그런 악질 팬이라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능성이 없는 것 역시 아니었다. 굳이 그 위험을 감수할 이유는 없었다. 자신의 아이돌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할 수 없는 건 할 수 없는 거였다.
B the 1 팬들이 이런 행동을 한다면 어떨까 상상하던 심은찬은 괜한 이입이 되는 걸 느끼곤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안타깝지만 아무리 신입 스태프라고 해도 받아 줄 리가 없었다.
그때 스태프의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선물은 전달이 어려울 것 같고 팬레터는 없으세요?”
……엥? 이걸 받는다고?
예상 못 한 답변에 놀란 심은찬의 눈이 커졌다.
“네? 진짜요? 편지, 편지 있어요!”
현우영의 말에 감격한 듯 얼굴이 상기한 아이들이 쇼핑백 안에서 후다닥 편지 봉투를 꺼내 건넸다.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던 심은찬이 미처 어떤 행동을 취하기도 전 총 세 개의 편지 봉투를 받아 든 스태프가 그들을 향해 말했다.
“얼른 가세요. 이건 꼭 전해 드릴 테니까 걱정 마세요. 혹시 모르니까 경비분들에게 걸리지 마시고요.”
“앗. 네. 저기, 아, 아녜요. 감, 감사합니다!”
아이들이 감격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눈 뜬 채로 한 방 맞은 느낌이 바로 이런 걸까. 스태프의 행동이 감탄스럽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
이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받지. 어차피 남 일이긴 하지만.
그런데 어째 목소리가 귀에 익은 것 같긴 한데……. 설마.
심은찬은 그 스태프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키가 큰 스태프의 옆얼굴을 흘깃 확인한 심은찬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은찬 형. 나오셨네요. 여기 모퉁이 돌아가면 편의점 하나 있어요.”
팬레터를 받아 든 스태프는, 현우영이었다.
더 이상 남 일이 아니게 됐다.
“……?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어디 아프세요?”
심은찬을 알아보고 아주 살짝 더 누그러진 표정을 짓던 현우영의 매끈한 미간이 심각해졌다.
눈을 크게 뜨고 입을 헤 벌린 얼굴을 하고 있다는 자각을 한 심은찬은 빠르게 터진 정신을 수습했다. 생각도 못 한 상황을 맞닥뜨리니 정신을 차리기가 쉽지 않았다.
“아니, 우영아. 우영이였어요? 뭐 하는 거예요. 뭐 해요? 뭔데요? 그걸 왜 받아요?”
“팬레터요?”
“그래요, 그거.”
현우영은 손에 들고 있던 편지들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