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현우영은 그런 심은찬의 얼굴을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저 애도 아니고 혼자 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은찬 형이랑 같이 있었잖아요.”
굳이 굳이 혼자가 아니라고 짚고 넘어가는 현우영의 말은 논리적으로 맞긴 했는데 그래도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기에는 매우 꺼림칙했다. 근데 이걸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대답할 일인가. 심하게 진지한 건지 아니면 재미가 없는 성격인 건지 갈피가 안 잡혔다. 그러나 예능에 나가려면, 아니 굳이 예능에 안 나가더라도 저 노잼 멘트는 곤란했다. 아무래도 멘트 연습을 좀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이렇게 잘생겼는데 마이크를 쥐었을 때 노잼이면 자연스레 발언 기회에 영향을 줄 텐데 아깝지 않은가.
심은찬은 으응, 하고 말을 얼버무리며 귀 뒤를 만지작거리며 자신의 이동 동선을 떠올려 보았다. 한데 차에 탄 기억도, 이동한 기억도 아무것도 없다.
얼마나 잔 거지 싶어 붕방붕방 뜬 머리를 손으로 매만지던 심은찬이 흐릿한 기억을 더듬었다.
잠결에 들었던 대화들이 천천히 떠올랐다. 스태프 어쩌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심은찬은 현우영을 쳐다보며 물어보았다.
“저 혹시 우영이가 여기로 옮겼어요?”
“네. 별로 안 무거웠어요.”
“그런 얘기가 아니라……. 아니, 근데 시동이 꺼져 있는데 왜 더웠지, 헉. 이게 뭐야.”
한편에 곱게 놓여 있는 휴대용 히터가 심은찬의 눈에 들어왔다. 설마, 싶어서 흘끔 현우영을 쳐다보자 그가 어깨를 위로 올렸다가 내리며 말했다.
“차에서 기다리면 춥다고 형들이 주셨어요. 환기도 필요 없는 제품이라고 하셨고 껐다 켰다 해서 괜찮아요.”
“그런 얘기가 아니라…….”
똑같은 말을 반복하던 심은찬이 작게 혀를 찼다.
현우영에게는 핸드폰이 없다. 이해민 팀 탈퇴 공지를 올린 후에 매니저가 현우영의 핸드폰을 가지고 간 걸로 알고 있었다. 핸드폰도 없이 혼자서 멍하게 자신이 깨는 걸 기다렸을 걸 생각하니 더더욱 미안해졌다.
“……혼자서 지루했을 텐데 적당히 깨우지 그랬어요.”
“너무 곤하게 주무셔서요. 형 스케줄도 알고 있었고요. 매니저 형이 라디오도 주고 가셔서 심심하진 않았어요.”
저건 또 뭐야.
심은찬은 현우영이 들어 보이는 손바닥만 한 기계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라디오 소리가 안 들린 것 같았는데 이상했다.
“혹시 시끄러우셨어요? 클래식 나오는 걸로 듣긴 했는데.”
“네? ……아니, 그런 건 아닌데요.”
심은찬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사려 깊게 행동해 준 현우영에게 살짝 놀랐다.
현우영은 아무렇지 않은 태연한 표정이었지만 그런다고 심은찬조차 별일 아니라고 넘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뭣보다 심은찬이 그보다 나이가 많지 않은가. 심은찬은 우선 이불을 옆으로 밀어 두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패딩을 끌어모았다.
얼마나 잔 건지 정신이 무척 맑고 또렷했다. 이렇게 상쾌한 상태인 건 정말 오랜만이다. 대체 몇 시간 잤길래 이런 거지.
바스락거리는 소리 사이로 뒷머리를 긁적인 심은찬이 입을 열었다.
“얼마나 있었던 거예요?”
“그렇게 오래 안 됐어요. 한 30분 정도니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한 시간 이상이었다면 진짜로 너무 미안했을 거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살짝 애매한 시간이긴 했지만 그래도 기다려 준 건 기다려 준 거다.
전문가들이 잠은 양보다 질이라고 하더니 그게 틀린 말이 아니었나 보다. 역시 전문가가 괜히 전문가가 아니지.
“지루했을 텐데 기다려 줘서 고마워요.”
“아니요. 별말씀을요.”
현우영이 뭐라고 생색이라도 낼 줄 알았는데 전혀 그런 게 없었다.
숍 바로 아래 주차장일 테고 그러면 얼른 들어가면 될 것이니 특별히 얼굴을 가릴 건 필요하지 않았다. 패딩 후드를 뒤집어쓰고 가면 될 것 같아서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그런데 패딩 주머니에서 덜그럭거리며 소리가 났다. 뭐지 하고 손에 잡히는 걸 꺼내 보니 챙겨 넣은 기억이 없는 휴대용 칫솔과 치약이 있는 통이 나왔다. 이걸 대체 누가 챙겨 넣은 건가 싶어서 반쯤 감탄하며 쳐다보던 심은찬에게 현우영이 말했다.
“폴라로이드 찾으시는 거면 세별 형이 가지고 계세요.”
“폴라로이드? 그걸 어떻게 알고 챙겼어요?”
심은찬이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은찬 형이 그거 챙겨 달라고, 잠에 취하신 상황에서도 말하셔서 세별 형이 챙겨 오셨어요.”
“아, 그랬어요? 그렇구나. 으응.”
꿈속에서 말한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실제로 말했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챙기긴 챙겼으니 다행이었다.
나가자고 말하며 칫솔 통을 도로 주머니에 챙겨 넣은 심은찬이 차 문을 열었다.
적당히 데워져 있던 공기에 차가운 바람이 훅 들이닥쳐 잠에서 막 깬 상태인 심은찬은 숨을 멈추고 몸을 굳혔다.
“추우세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던 심은찬은 제 몸에 롱패딩이 에이프런처럼 앞으로 둘러지는 걸 보고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하면 좀 덜 추우실 거예요.”
현우영이 패딩의 소매를 심은찬의 목 뒤에서 엮어 묶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 그거야 그런데.
패딩 후드 때문에 시야가 방해돼서 발아래가 잘 안 보였다. 그래도 이중으로 감싸니 확실히 보온 효과는 좋아서 지금 벗기는 싫었다. 어떡하지 고민하던 심은찬에게 현우영이 말했다.
“손 주세요.”
“네?”
“발치가 안 보이실 것 같아서요.”
“음, 그렇긴 하죠.”
아, 그러니까 잡고 오란 얘기인가.
심은찬은 고개로 후드를 누르며 대답했다. 거절하기도 뭐했고 나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어 선선히 현우영의 손을 잡았다. 꽤 따뜻하고 낙낙한 손바닥이 마치 난로 같다는 생각을 하며 종종걸음으로 현우영의 뒤를 따랐다.
숍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때마침 문 앞에 서 있던 정민유와 마주쳤다.
“은찬 왔네! 시간 딱 맞췄어.”
“그러게. 우영아, 깨우기 어렵지 않았어? 고생했다.”
“잠은 잘 잤어?”
시끌시끌 한마디씩 거들고 가는 멤버들에게 인사를 한 심은찬은 입고 있던 패딩들을 벗었다. 그걸 받아 들려던 현우영 대신 숍의 스태프가 다가와 챙겨 들었다. 두 분 다 들어오시라는 안내에 현우영이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말고 이쪽 형님만 하실 거예요.”
“형님이라니…….”
묘한 단어 선택에 심은찬이 실소를 흘리며 쳐다보자 현우영이 뭐 잘못됐냐는 얼굴을 하고 마주 보았다. 멘털이 S급인 게 사고방식이 좀 독특해서 그런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린 심은찬은 현우영에게 인사를 한 후 안쪽 자리로 이동했다.
휴대용 칫솔과 치약은 매우 요긴하게 사용했다.
* * *
늦게 합류한 심은찬이 준비를 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행히 아이돌 올림픽 대회 출근길 촬영에 늦지 않을 수 있었다.
출근길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B the 1을 위한 게 아니었다. 다른 인기 있는 아이돌을 위한 자리였다.
“아, 맥스어핀 선배님들이네.”
“오. 진짜?”
차에서 내리기 전 순서를 기다리던 심은찬은 도준서의 말에 창문을 보았다. 카메라 셔터음이 여기까지 들릴 정도였다. 적당히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자 드디어 들어갈 순번이 되었다.
B the 1이 착용한 트레이닝복 색은 시안이었다. 일반 파란색보다 환하고 또렷해서 멀찍이서도 눈에 확 띄니 불만은 없긴 했다.
“안녕하세요!”
기자들이 큰 소리로 활기차게 인사하며 등장한 B the 1의 사진을 찍기는 했다. 번쩍거리는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웃었다. 하지만 찍는다고 해도 워낙 망돌이었기 때문에 이 사진을 기사로 쓰는 곳은 없을 거다.
웃는 얼굴로 깍듯하게 마무리 인사를 마친 멤버들과 함께 자리를 이동했다.
어차피 본방 녹화 때 잘해서 잠깐이라도 전파를 타면 된다고 생각한 심은찬은 멀찍이서 매니저와 함께 걸어오고 있는 현우영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현장 분위기를 익히기 위해서라지만 그래도 스태프인 척 동행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뭐라 불만을 내보이지 않았다. 무던한 건지 아니면 뭔지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도 묵묵히 따라 주는 게 참 고마웠다.
심은찬의 시선을 느낀 건지 고개를 드는 현우영과 시선이 마주쳤다.
참 저러기도 쉽지 않은데 검은 롱패딩에 마스크만 쓰고 있어도 잘생김이 엿보였다. 아무래도 저 비율은 반칙이지 싶은 생각을 하며 어깨에 대충 걸쳐 두었던 가방을 추스르고 걸음을 옮겼다.
대기실로 도착한 멤버들은 감탄사를 질렀다. 가림막이라도 좀 달아 뒀으려나 싶었는데 웬일로 가수별로 방을 준비해 주었다. 이번에 녹화 장소가 바뀌었다 했는데 건물 안쪽에 반투명의 묵직한 유리문 달린 곳을 아이돌별 대기실처럼 꾸며 놓았다.
그래도 두 번째 참가라고 처음보다는 여유가 있었다.
아이돌 올림픽 대회에 첫 참가를 했을 때에는 말로만 듣던 방송에 참석을 할 수 있다는 게 마냥 신기해서 정신없이 둘러봤었다.
각자 가지고 온 물건들을 대기실에 적당히 놓고 의자에 앉았다. 앞으로 긴 시간 동안 녹화를 해야 하는 걸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몸의 긴장을 풀어 두고 있어야 했다. 일이 있는 건 좋지만 녹화 하나를 열두 시간 넘게 해서 체력이 갈리는 건 또 별개의 일이었다.
세팅을 하고 왔기에 눕지도 못하고 기대 있지도 못한다. 앉아 있으니 점점 졸음이 몰려왔다. 꾸벅꾸벅 고개를 끄덕이며 자다 깨다 반복하던 심은찬이 고개를 흔들며 눈을 치켜떴다. 차라리 움직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