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61)

#18

“실은 어제 찍었던 부분을 시나리오 작가님께 보여 드렸는데, 은찬 씨를 아주 인상적으로 보셨더라고요. 특히 그 궁술 연습장에서 찍었던 부분 말이에요. 캐릭터 파악을 너무 잘했다고, 아주 좋다고 칭찬하시더라고.”

이런 칭찬을 들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말인데 은찬 씨 역할이 좀 수정이 됐어요.”

이어진 감독의 말에 심은찬은 눈을 깜빡였다. 앞의 말을 이렇게 해 놓고 설마 ‘분량이 줄었어요.’ 같은 반전은 일어나지 않겠지.

“아. 네. 수정이라고 하시면 어떻게.”

심은찬의 심장이 기대감으로 조금씩 빨리 뛰었다.

“원래는 다 같이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거 알죠? 그런데 연운이가 마지막 화 바로 직전 화에 죽는 걸로 변경됐어요. 촬영한 부분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이후 비중은 지금보다 더 늘어날 예정이고.”

놀라움으로 심은찬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지금 자기가 들은 말이 정말인지 감독에게 몇 번이고 물어보고 싶은 충동이 치고 올라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원래부터 연운이 역이 다른 배역에 비해서 너무 비중이 적은 거 아닌가 했는데 은찬 씨가 노력해서 배역 분량이 늘어난 거야. 방송 중에 인기가 늘어나서 그런 것도 아니고 이거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에요. 그러니까 끝까지 잘해 봐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심은찬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변경된 대본은 며칠 안으로 나올 건데 기쁜 소식이라 은찬 씨한테 제일 먼저 알려 주고 싶었어요.”

“감사합니다……!”

“그래요. 그럼 이제 가서 준비해요. 오늘도 기대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심은찬은 자리를 벗어나 사람 왕래가 드문 곳으로 향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없는 걸 확인한 심은찬은 주먹을 쥐고 소리 없이 파이팅 자세를 취하며 꽤 오래간 기쁨을 만끽했다.

어느새 아이돌 올림픽 대회 녹화 날이 됐다.

감독과 다른 배우들의 배려로 촬영 스케줄을 조정할 수 있었다. 사실 아이돌 올림픽 대회 녹화 특성상 계속 얼굴을 비추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니 남는 시간 동안 드라마 촬영을 하는 편이 맞지 않나 싶었지만, PD가 허락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드라마 촬영 쪽에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다행히도 드라마 감독님은 심은찬의 편의를 봐주었다.

너무하다 싶었지만 어떡하랴. 현재 DBC 음악 방송 ‘음악 엔터’ PD에게 밉보일 수는 없었다. 같은 방송 일을 하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얼굴을 마주칠 텐데 좀 더 사정을 봐줬으면 싶긴 했으나 현재 아이돌 올림픽 대회를 맡은 송중영 PD가 워낙 깐깐하고 권위를 내세우길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아마 같은 방송사인 DBC에서 방영 예정이었더라도 이야기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을 거다. 이전 생에서처럼 앞으로도 3년간은 별 이변 없이 음악 엔터의 메인 PD에 앉아 있을 텐데 밉보여 봤자 이쪽 손해였다.

일정이 조정되는 일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닐 텐데도 함께 촬영했던 배우들은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특히나 김휴인은 오히려 아이돌 올림픽 대회를 하루 종일 촬영한다는 걸 걱정해 주기도 해서 솔직히 많이 감동하기도 했다.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도 되긴 했지만, 그동안 드라마 촬영으로 미뤄 두었던 안무 연습에 보컬 연습까지 하고 돌아왔기에 지칠 대로 지친 심은찬은 제대로 눈을 뜨지 못했다. 막 일정을 끝내고 숙소에 돌아와 침대에 누운 지 3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던 것도 큰 이유 중의 하나였다.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 심은찬을 부드럽게 흔드는 손길에도 비몽사몽한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 그러다 갑자기 이불째로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 * *

현우영은 품 안에 안은, 이불에 돌돌 말린 심은찬을 내려다보았다. 말라 보인다고 생각을 하긴 했는데 실제로 들어 보니 남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다. 심은찬은 키도 작은 편이 아닌데 이 정도 무게라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이 정도면 근육이란 게 아예 없는 게 아닌가 싶은데 밥이나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건지 걱정마저 되었다.

하긴 저번에는 다음날 스케줄이 있다며 저녁도 걸렀었다.

이전에 심은찬과의 일을 떠올리던 현우영에게 류서오가 말을 걸었다.

“우영아. 안 무거워? 아무리 그래도 걔는 남자인데.”

류서오의 질문에 현우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별로 무겁지도 않고요, 깨우는 것보다 이게 더 빠를 것 같기도 하고요. 그리고 오늘 저 스태프잖아요.”

“준서야, 비켜 봐. 이건 찍어야 해. 심은찬 깨면 보여 줘야지.”

문세별이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자는 걸 보면 정말 어지간히 피곤한 모양이었다.

하긴 옆에서 본 현우영도 혀를 내두를 만큼 일정이 빡빡하긴 했다. 얼마 전에 방영 스케줄이 잡히면서 달이 떠 있을 때 나갔다가 마찬가지로 달이 떠 있을 때 들어오곤 했다.

간신히 메이크업을 지우고 비틀거리면서 방으로 들어가던 모습이 선명했다.

그는 이런 몸으로 안무 연습에도 몸을 사리지 않고 열심히 하고 드라마 촬영까지 다니고 있었다. 아이돌과 배우. 두 가지 일을 병행한다는 게 결코 쉬울 리가 없었다. 해 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감조차 잡을 수 없는 건 아니었다.

피곤할 거란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심은찬은 안무 연습을 빠진 적이 없었다. 단체 연습을 못 가는 경우엔 혼자라도 반드시 연습실에 가서 연습을 하고 돌아왔다. 핑곗거리는 많았다. 피곤해서. 일정이 많아서. 시간을 도저히 뺄 수가 없어서. 그건 핑계가 아니라 정당한 이유였다. 실제로 무척 바빴고 일정이 많았으며 피곤했을 테니까.

하지만 심은찬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연습을 할 뿐이었다.

웃는 얼굴로, 가벼운 태도로 아무렇지 않게 그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심지가 단단한 사람이다.

‘제 목표는 올해 연말 대상 받는 거거든요.’

이전에 심은찬이 했던 말을 떠올려 보았다. 그날은 조바심이 나서 충동적으로 일을 저질렀다. 지금은 그 말이 결코 농담이나 그냥 한번 해 본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연습에 임하는 심은찬만 봐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심은찬은 진심이었다.

첫날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걸 후회했다.

“은찬이는 지금 이렇게 자고 있습니다.” 하는 멘트를 한 문세별의 촬영은 1분도 되지 않아 끝이 났다. 나가자고 하며 현관문을 열자 찬바람이 들어왔고 심은찬이 이를 느꼈는지 미간을 찡그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불로 돌돌 말고 있음에도 한기를 느낀 모양이었다.

심은찬이 꾸물거리며 얼굴을 현우영의 몸 쪽으로 파고들었다.

“얘 좀 봐. 우영이 쪽으로 파고드네. 와……. 잠기운인데 이게 가능해? 지금 들기 쉬우라고 그러는 거지?”

“그게 아니고 본능적으로 저러는 거지. 추운 거 싫어해 가지고. 패딩 좀 덮어 줘.”

정민유가 안쓰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심은찬에게 롱패딩을 덮어 주었다.

“이래도 안 깨. 하긴 요새 너무 무리하긴 했지. 아올대도 가서 좀 쉬게 해 둬야지.”

도준서의 중얼거림에 심은찬이 몸을 움찔, 떨었다. 허공에서 몇 번 허우적거리던 손이 간신히 이불을 끌어 내렸다.

“형……. 형.”

“뭐야, 은찬이 깼어?”

심은찬은 눈을 채 뜨지 못하는 상태인데도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저……, 가방에……. 폴라로이드 사진기. ……챙겨 주세…….”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 심은찬의 고개가 푹 돌아갔다. 멤버들이 모두 입을 다문 채 그런 심은찬을 쳐다보았다. 침묵을 깬 건 류서오였다.

“……이거 유언이야?”

“…….”

“……그런 듯.”

그 질문에 답한 건 도준서였다.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심은찬은 헉, 하고 숨을 내쉬었다.

“……더워.”

“일어나셨어요?”

“으응. 일어났는데, 너무 더워요. 창문, 창문 좀 열어 주세요.”

둘둘 말린 이불을 끌어 내리던 심은찬이 허덕거리며 말했다. 몸에 덮여 있던 건 이불만이 아니었다. 두툼한 롱패딩이 몇 겹이나 덮여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패딩을 옆으로 치우자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심은찬의 요구를 들어준 덕분에 열린 창문으로 시원한 공기가 확 들어왔다. 살았다는 듯 몇 번 호흡을 한 심은찬이 눈을 감은 채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추우세요? 문 닫을까요?”

“어. 네네. 으으, 춥네요.”

이불을 다시 끌어 올려 외피처럼 몸에 둘렀다. 붙어서 잘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천천히 열고 주변을 둘러보던 심은찬의 눈이 점점 커졌다. 시동이 꺼진 차 안에는 현우영과 심은찬만이 단둘이 덩그러니 있었다.

“어, 뭐야. 왜 여기 있어요? 어? 제가 언제 차를 탔어요? 어어? 뭐야?”

“다른 형들은 먼저 숍 올라가셨어요. 은찬이 형 피곤하실 테니까 안에서 부를 때까지 좀 더 주무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네? 뭐요? 아니, 형들은 무슨……. 애를 왜 여기에 혼자 뒀대.”

어이가 없어서 혼자 중얼거리는데 그게 들린 모양이었다. 현우영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형들이 그렇게 시킨 게 아니라 제가 그러겠다고 했어요. 저는 세팅 안 해도 되잖아요.”

남아 있겠다고 자청을 했다고? ……왜?

심은찬은 납득이 가지 않아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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