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61)

#17

“컷! 잘했어요!”

촬영은 순조롭게 끝났다.

여주인공인 우하연 역의 오은서에게는 미리 말하지 말고 연기해 보라는 감독의 어드바이스에 처음 촬영에서는 그냥 진행했다. 덕분에 오은서의 반응이 실감 나게 나왔다.

대본대로라면 연운은 화살을 순순히 건넸어야 했지만 심은찬은 연운이라면 그럴 것 같지 않았다. 연운은 조용하긴 했으나 마음이 없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화랑에 들어갈 정도면 승부욕이 없을 리 없었다.

이무흔과 우하연이 서로에게 점점 끌리는 걸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연운이 처음으로 마음을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사를 하면서 우하연에게 시선을 고정했고 화살 역시 바로 넘기지 않고 힘을 주어 잡아 자신에게 우하연이 시선을 주게 만들었다.

대본상에는 아무런 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오은서는 조금 당황한 듯 한 번 더 당겼다. 그래도 화살을 넘기지 않는 심은찬을 본능적으로 쳐다보았는데 이때 표정이 정말 실감 났는지 그 장면을 사용하기로 했다.

‘이제야 내 얼굴을 보네.’ 하는 대사는 원래는 없었다. 그동안 우하연의 근처에 있었지만 연운을 보지 않는 그녀에게 서운한 마음이 솟아 나와, 처음으로 그 사실을 지적하는 기분으로 정말 즉흥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먼저 가 본다는 대사 역시도 대본에 없는 것이었다. 당연히 특별한 액션 지시 역시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잊고 있던 일이 떠올랐다.’는 대사를 끝으로 그냥 가는 것이었지만 심은찬은 그 부분에서 애드리브를 추가했다. 이무흔의 어깨를 두드리려 뻗은 손을 한 번 머뭇하며 주저했다. 친구 사이이기에 이무흔을 응원하고 있지만 그녀를 향한 마음을 가진 채로 우하연과의 시간을 갖는 걸 응원하는 상황이 내키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다.

심은찬은 대본에는 적혀 있지 않지만 연운의 마음을 보여 줄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표현하지 않으면 전달되지 않는다. 대본에 없다고 지레 이만큼만, 하고 포기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나중에 편집으로 잘리더라도 할 수 있는 만큼은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건 대부분 감독과 등장인물들의 호평을 끌어 냈다.

“수고하셨습니다!”

“은찬 씨 수고했어요! 애드리브 정말 좋았어요. 은찬 씨 완전 연기 체질인 것 같아서 내가 은찬 씨를 잘 봤다 싶었어. 앞으로도 애드리브는 은찬 씨한테 맡길 테니까 하고 싶은 거 다 해 봐요.”

정말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이었다. 심은찬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무난하게 심은찬이 나오는 부분의 촬영이 마무리되고 다음 신 촬영을 위해 이동하는 동안 인사를 주고 받았다.

“은찬 씨.”

우하연의 역을 맡은 오은서가 심은찬을 불렀다. 김휴인 덕분에 안면을 트고 인사를 나누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동안은 오가며 인사만 나눴었다.

“앗. 네, 선배님. 아까 전엔 상의 없이 애드리브 해서 당황하셨죠. 죄송해요.”

“으음, 아니에요. 감독님이 그대로 해 보라고 하셨다면서요. 저도 그래서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연운이 역 감정도 더 잘 살았던 것 같고요. 그리고 저는 어떤 애드리브 해 주셔도 오케이예요.”

심은찬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오은서가 일부러 말하는 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말이라도 해 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몰랐다. 친절은 당연히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

“아뇨, 갑작스러우셔서 놀라셨을 텐데 죄송해요.”

“죄송은 뭘요. 많이 고민하신 것 같던데 덕분에 좋은 장면 나왔으니까 감사할 일이죠.”

오은서가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아, 저기. 이거 가지고 가세요. 아직 따끈해요.”

심은찬은 패딩 주머니에 넣어 놓았던 핫팩을 건넸다. 오은서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심은찬의 친절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 촬영을 기점으로 여자 주인공 역인 오은서와도 친해졌다. 주요 출연진들이 한자리에 모여 전화번호를 저장하기까지 촬영 개시 후 3일도 걸리지 않았다. 여자의 핸드폰 번호를 저장해도 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심은찬의 아이돌 자아가 심하게 갈등했지만 결국 저장하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같은 드라마에 함께 출연을 하는 관계였고 서로의 연락처를 저장하는 자리에서 ‘제가 아이돌이라 여성분은 좀.’ 하며 거절할 수는 없었다. 순전히 호의로 보여 주는 행동이었다. 심은찬 개인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보이는 것도 아닌데 거절을 한다면 그 이상의 자의식 과잉이 있을까. 아이돌이기 이전에 사람 간의 예의였다.

촬영하면서 친해지자 속 깊은 이야기도 한 번씩 하게 됐는데 다들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고민들을 가지고 있었다.

주요 배역들이 아직 그리 유명하지 않았고 서로 처지가 비슷해서였을까. 상상했던 것보다는 더욱 빠르고 깊게 친해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촬영 분위기가 정말 좋아서 예정했던 분량보다 더 찍거나 더 빨리 마무리를 하고 그날 촬영을 마친 적도 있을 정도였다.

물론 대본 리딩 때부터 심은찬을 탐탁잖게 여겼던 이새림의 태도는 여전했지만 크게 무리 없는 심통과 트집 잡기 정도로 그쳤다. 그 정도의 견제야 태연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현재 심은찬의 멘털 레벨이 높은 것도 있겠지만 B the 1이 지방에서 행사를 하면서 소위 말하는 ‘진상’에게 당했던 여러 일들이 있던 덕분이기도 했다. 노래 시끄럽다며 돌을 던지는 것도 아니고 물리적으로 위압을 행사하는 것도 아닌 이상에야 심은찬이 겁낼 이유는 없었다.

이새림보다 더 곤혹스러운 건 추위였다.

심은찬이 워낙 추위에 약한 편이기도 했지만 촬영용 한복이라는 게 정말 보온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대기 중에 패딩을 입고 있을 수 있을 때에는 그나마 나았다. 본 촬영에 들어가면 그야말로 견딜 수 없는 추위에 손이 곱아들기도 했다.

그나마 심은찬은 사정이 좀 나은 편이었다. 대사가 많은 주연들은 입김을 보이지 않으려 얼음을 물었다가 촬영에 들어가기도 했다. 의상 안에 내복이라도 입어야 하나를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전체 16부작에서 중반부 정도를 촬영했을 무렵 드디어 방송국과 계약이 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전 생과 다르게 시기는 좀 빨라졌지만 계약한 케이블 방송국은 똑같이 NVN이었다.

원래 방영 예정되어 있던 드라마가 갑작스러운 주연 배우의 사생활 논란으로 고소를 당하게 되어 모든 일정이 중단되었다. 그때 그 자리에 대신 들어갈 수 있던 드라마를 찾던 방송국의 눈에 띈 것이 바로 <초승달 피는 여름밤 하늘 꽃>이었다. 급하게 편성이 결정되어 일정이 빠듯해졌지만 드라마 강세인 NVN의 메인 시간대인 금, 토 저녁 시간에 배정되었기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방영 일정에 맞추기 위해 스케줄이 대폭 빡빡해졌다. 말 그대로 ‘빡센’ 스케줄이었지만 어디에서 방영을 할지조차 정해지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야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심지어 지금 한창 핫한 드라마의 후속으로 방영 스케줄이 정해져 그 영향으로 시청률이 잘 나올 수도 있다는 기대감으로 촬영장의 분위기도 좋아졌다.

촬영장 다른 배우들과의 사이도 좋았고 촬영 자체도 즐겁긴 했으나 촬영장에서만 할애하는 시간 때문에 하루에 한 시간 남짓한 수면으로 버티는 게 고작인 나날이 이어졌다. 아무리 대기 시간 동안 쉴 수 있다곤 하지만 제대로 쉬는 것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아이돌 준비를 하며 꾸준하게 기초 체력을 높이는 운동을 하긴 했지만 극도로 적은 수면 시간으로 버티기엔 한계가 있었다.

대사를 하고 액션을 하는데 무슨 정신으로 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잠을 적게 자는 것에 비해 NG를 적게 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워낙 촬영에 시간을 많이 뺏기다 보니 물리적으로 안무 연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잖아도 이해민이 빠지고 새 멤버가 들어왔기 때문에 없는 시간도 만들어서 멤버 간의 합을 좀 맞춰야 했는데 개인 활동에 빠지게 되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틈만 나면 깜빡깜빡 잠들면서도 이럴 거면 멘털이 아니라 무한 체력 같은 보너스를 받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같은 생각을 하곤 했다.

다행스러운 건 심은찬이 촬영장에서 제일 막내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어화둥둥 해 주는 상황이었다는 거였다. 물론 눈에 띄게 챙겨 주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수면 부족으로 비틀거리고 있으면 왜 저러냐라든가 알아서 하겠지, 하는 게 아니라 안쓰럽게 여겨 주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저 그뿐이라도 체감 차이는 상당했다.

화기애애한 분위를 만들어 주는 주변 스태프와 동료들이 고마워 스스로 채찍질을 하며 조금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바쁜 촬영 스케줄을 간신히 따라가던 어느 날 감독이 심은찬을 호출했다.

“부르셨어요, 감독님.”

“어, 은찬 씨. 왔어요. 요새 촬영하기는 좀 어때요?”

감독은 손짓하며 스태프를 자리에서 비키게 했다.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 의도가 심상치 않았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 굳이 이런 얘기로 서두를 여는 이유가 그리 가벼울 리가 없었다.

“감사하게도 선배님들께서 전부 도와주셔서 저는 상대적으로 편하게 하고 있어요.”

“음. 그래요. 좋은 일이야. 그래서 그런가, 은찬 씨가 내 기대 이상으로 잘해 주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심은찬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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