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61)

#16

손짓을 하는 김휴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선객이 있었다. 남자주인공 이무흔 역을 맡은 박윤우였다. 이런 우연도 쉽지 않은데 매우 운이 좋았다.

박윤우도 이목구비가 진했는데 귀엽다는 느낌이 강한 김휴인과는 다르게 눈꼬리가 살짝 올라가서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으면 냉정해 보이기도 했다.

심은찬은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고개를 숙이는 박윤우에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고 그런 그를 보며 박윤우가 다시 한번 인사했다. 김휴인이 몇 번이고 인사를 건네는 두 사람을 웃으며 말리지 않았다면 아마 한동안은 꾸벅거리며 반복했을 것이다.

“예전에 같은 웹 드라마 나온 적이 있었거든.”

물어보지 않았는데 일부러 설명해 주는 김휴인을 보며 심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으니까 좋아’에 출연하셨죠? 승우랑 지형으로요.”

함께 촬영하는 사람들의 필모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기에 한번 쭈욱 살펴봤었다.

두 사람이 함께 출연을 한 작품이기에 짬이 나면 조금씩 보기도 했다. 김휴인도 김휴인이지만 박윤우의 연기력이 매우 탄탄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상태 창의 평가 기준을 잡기 위해서 하루에 한 명씩 상태 창을 확인했을 때 박윤우는 스타성이 S였고 연기력, 표현력, 대사 전달력은 모두 A였었다. 그걸 본 심은찬은 과연, 하고 납득했다.

그 연기력을 뒷받침 삼은 박윤우는 이번 드라마에 이어 이다음 드라마도 시청율이 잘 나와서 톱 배우 반열에 오르게 된다. 연기력뿐만이 아니라 작품을 보는 눈이 좋아 고르는 시나리오마다 소위 말하는 대박을 냈기도 했다.

같은 드라마에 출연을 하니 친해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뜻하지 않게 기회가 올 줄은 몰랐다.

심은찬의 말에 김휴인은 물론이고 박윤우도 정말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봤, 아니 뭐 워낙 성적이 안 좋았던 거라 봤냐고 묻는 것도 좀 그렇네요.”

“다는 아니긴 한데……. 대기하는 동안 조금씩 봤습니다.”

“……와.”

박윤우는 진심으로 감동한 눈치였다.

그는 무명에 가까운 자신의 필모를 찾아봤다는 심은찬에게 호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등받이에 기대앉아 있던 박윤우가 허리를 당겨 앉으며 입을 열었다.

“어, 그래. 뭐 볼일 있어서 온 거죠?”

“네에, 그렇긴 한데 제가 방해된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괜찮아요. 그러잖아도 지금 제 신 막 마치고 온 거라 조금 여유 있어요.”

김휴인을 찾아온 거였는데 정작 박윤우가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이걸 노리고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된 거 두루두루 조언을 받으면 좋은 거라고 생각하며 거절의 말을 접어 넣었다.

심은찬이 대본을 보고 해석한 걸 이야기하자 박윤우와 김휴인도 관심을 보였다. 김휴인은 “확실히 그런 것 같다.”고 하며 실은 자신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아무래도 말하기 어려웠다고 털어놓았다. 심은찬은 자신의 생각이 그렇게 잘못된 게 아니라는 확신을 얻었다. 대본상에 없는 애드리브를 넣어 보는 걸 감독님께 상의하려 한다고 말하자 두 사람의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특히 박윤우가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적극적으로 연기에 임하는 자세를 좋게 본 덕분일까.

박윤우가 심은찬에게 말을 걸었다.

“카메라에 익숙해지는 게 제일 어려운 거라 은찬 씨는 특별하게 힘든 건 별로 없을 것 같은데. 막히는 부분은 또 없어요?”

박윤우의 질문에 심은찬은 목 뒤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카메라는, 저는 좀 다른 의미로 힘들더라고요. 카메라를 쳐다보지 않아야 하는 게 좀……. 저희는 무조건 불 들어오는 카메라 쪽을 쳐다봐야 하거든요. 초반에 그래서 카메라랑 시선 맞춘다고 NG가 좀 많이 났어요.”

“……아. 아하핫. 맞아요. 기억난다. 카메라를 귀신같이 찾는다고 카메라 감독님이 감탄하셨죠.”

박윤우는 당사자가 있는데도 거침없이 웃었다. 그런데 그게 워낙 담백하게 감탄하는 말투여서 그런지 결코 싫은 느낌이 아니었다.

그는 발성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는 심은찬에게 이것저것 알려 주었다. 옆에 있던 김휴인도 발성 연습에 좋은 자세를 알려 주다가 갑자기 연기에 대한 토론에 돌입했다.

얼마 뒤 밖에서 스태프가 문을 두드리며 박윤우를 불렀다. 다음 신 촬영에 들어간다는 연락을 받은 박윤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맞아. 표정 쓰는 건 되게 좋아서 따로 알려 줄 건 없는데 무대에 서는 것보다 좀 절제해서 표정 짓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근접 샷 잡을 때는 얼굴 근육을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티가 나거든요. 이따 신 49 함께 들어가죠? 이따 봐요. 그럼 가 볼게요!”

생각났다는 듯 급하게 덧붙이고 후다닥 달려 나갔다.

“윤우 형이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닌데 은찬이가 되게 마음에 들었나 보네.”

“……그래요?”

“자기 코가 석 자라고 다른 사람 일에 참견 잘 안 하기로 소문난 형이야.”

웃으며 말하는 김휴인을 보며 심은찬은 한발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인상을 남긴 거였다면 좋은 거였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볼을 꾹 찔러 왔다. ‘뿝’ 하는 우스운 소리가 입술 새로 새어 나왔다.

“그거 버릇이야? 뺨에 공기 넣고 입술 잘근거리는 거.”

“제가요?”

“몰랐나 보네.”

웃기다는 듯 키득거리는 김휴인을 가만히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딱히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자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휴인 형 있어?”

큰 소리로 김휴인을 부르는 목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한 곳으로 돌아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남자 조연 중의 한 명인 김재연이었다.

“어, 재연아. 촬영 끝났어?”

“그래서 놀러 왔는데, ……은찬 씨랑 있었네?”

김재연이 눈을 살살 굴렸다. 둘이 인사하라며 소개를 시켜 주는 김휴인 덕분에 심은찬은 그와도 제대로 이야기해 볼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김휴인의 특성 덕분일까. 촬영 들어간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도 정말 두루두루 친분을 쌓고 있었다. 김휴인이 심은찬을 살뜰히 챙겨 준 덕분에 다른 출연진들과도 그리 어렵지 않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심은찬은 자신이 생각한 애드리브를 먼저 감독에게 말해 보았다. 감독은 시나리오 작가가 전적으로 배우에게 일임하는 스타일이라 괜찮으니 한번 해 보라고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심은찬이 등장하는 신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자, 그럼 신 49 첫 번째 촬영 시작합니다!”

클래퍼보드의 클랩 스틱 맞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났다.

* * *

우하연은 달마다 하는 평가를 앞두고 화살 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대로 되지 않아 조바심이 나 초조하게 입술을 씹었다. 이대로라면 상위권으로 올라가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오라버니를 살해한 범인을 찾는 데 제약을 받게 된다. 초조함이 온몸을 감쌌다.

화살통이 빌 때까지 쐈지만 어느 하나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스스로가 한심해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시간.

모퉁이를 돌아 궁술 연습장으로 들어가던 이무흔과 연운은 선객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먼저 누구인지 알아보고는 낮게 감탄사를 내뱉는 이무흔의 반응에 연운도 고개를 내밀어 상대를 확인했다. 우하연이었다.

연운은 정신없이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이무흔을 한번 쳐다보았다.

“제대로 해야지. 계속 화랑에서 머물려면.”

“뭐가 잘 안 되나 봐?”

혼잣말을 하던 우하연이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이무흔이 천천히 우하연 쪽으로 걸어가다 얼마간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도와줄까? 내가 요령을 좀 알거든.”

우하연은 이무흔과 연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들킨 것 같아 오기가 올라왔다. 우하연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등을 곧추세웠다.

“말은 고마운데 괜찮아. 혼자 할 수 있어.”

우하연은 단단하고 냉랭한 목소리를 냈다.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연운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 몸을 숙였다. “떨어져 있네.”라고 말하면서 우하연의 발치에 있던 화살을 주워 들었다. 그게 마치, 지금 당장 우하연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옆에 있는데 눈치채지 못하는 걸 힐난하는 것처럼 들렸다.

평소 과묵하고 말이 없던 연운이 보여 주는 행동에 우하연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내가 주우면 돼.”

우하연이 화살을 주우려 했지만 연운이 먼저 화살을 주워 들고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분한 듯 입술을 꽉 다문 채 다른 곳을 보며 그걸 받아 들려고 했다. 그러나 연운은 순순히 넘기지 않고 화살을 쥔 손에 힘을 주어 자신 쪽으로 살짝 잡아당겼다. 화살을 건네받기 위해 잡고 있던 우하연이 당황스러움에 눈을 크게 떴다.

“이제야 내 얼굴을 보네.”

연운이 부드럽게 미소하며 말했다. 잠시 아무 말 없이 우하연을 보던 연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하연과 연운은 양쪽에서 화살을 쥔 채로 이야기를 했다.

“넌 잘하고 있어.”

읊조리는 듯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우하연은 그런 이야기를 들을 예상도 못 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존심을 세운다고 실력이 좋아지진 않아.”

“…….”

“무흔이가 우리 기수 중에서 활쏘기를 제일 잘해.”

목소리 톤이 다시 한번 바뀌었다. 조금 엄하게 타이르는 듯한 말투였다.

그 뒤 이무흔 쪽으로 시선을 돌린 연운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편하게 말을 이었다. 이무흔이 바로 얼마 전 열렸던 활쏘기 심사에서 최고점을 받았다는 설명을 듣던 우하연은 그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놀기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그렇게 이무흔을 쳐다보던 우하연의 옆얼굴을, 연운은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우하연이 이무흔과 시선이 마주쳐 빠르게 고개를 돌릴 때까지.

이무흔은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했는지 우하연과 연운 쪽을 보고 있었다. 우하연의 눈을 응시하던 연운이 그 상태 그대로 입을 열었다.

“무흔이에게 배워 봐. 너에게 도움이 될 테니까.”

“응?”

우하연은 제 손에 온전히 화살이 들려 있는 걸 깨달았다.

연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무흔 쪽으로 걸어갔다.

“어디 가?”

“잊어버렸던 일이 떠올랐어.”

연운은 이무흔의 어깨를 치려다가 잠깐 멈칫했다. 연운은 바닥을 쳐다보던 시선을 들어 천천히 이무흔과 시선을 마주쳤다. 두 사람만 두고 가는 게 내키지 않는 듯 입술에 한 번 힘을 준 연운이 다시 말을 이었다.

“먼저 가 볼게.”

이무흔이 연습장을 빠져나가는 연운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평소 꼼꼼한 연운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약속을 잊을 녀석이 아니었는데, 이상했지만 캐물어 볼 수도 없었다.

“……저기.”

우하연의 목소리에 이무흔이 정신을 차렸다. 우하연은 말하는 대신 활을 건넸다.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명했다. 이무흔은 기분 좋은 듯, 그러나 너무 티 나지는 않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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