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61)

#15

“휴인 형, 혹시 실례가 아니면 뭐 좀 여쭤봐도 될까요? 제가 정극은 처음이라…….”

“아, 뭔데?”

“이 부분인데요…….”

하도 틈날 때마다 펼쳐 봤더니 심은찬의 대본은 표지부터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굳이 새로운 대본을 가져오는 것도 이상했기에 심은찬은 그 대본 그대로 펼쳤다. 대본을 보면서 생각했던 걸 적다 보니 여기저기에 잔뜩 메모가 되어 있었다. 이 대사의 발성은 어떻게 해야 한다든가 이 부분의 감정은 이런 게 아니었을까라든가, 액션은 어떻게 하는 편이 좋겠다든가 하는 그런 메모들이었다.

이런 일을 처음부터 계획해서 김휴인에게 어필하려던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김휴인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연습하는 거나 노력하는 모습을 숨기지 않고 노출하는 편이 좋을 것 같긴 했다. 현대 사회는 자기 PR의 시대 아닌가. 뒤에서 노력하는 것도 좋지만 정말로 뒤에서만 노력하면 아무도 모른다. 내가 이만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걸 어필하는 건 오히려 권장 사항이다. 물론 ‘내가!! 이만큼!! 하고 있어요!!’하고 광고까지 하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굳이 노력하는 모습을 감출 필요까지는 없었다.

심은찬은 페이지를 팔락팔락 넘기다가 한 부분에서 멈췄다.

여기요, 하며 손으로 가리키자 김휴인이 낮게 탄성을 냈다.

“이 부분. 이 부분 좀 어렵지. 연운 역이 대사도 짧고 많지 않아서.”

김휴인의 다정한 말에 심은찬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휴인 역시도 대본을 몇 번 읽은 듯 어렵지 않게 어떤 신인지 알아채고 심은찬에게 조언을 건넸다. 막막하던 부분이었는데, 길이 보이는 느낌이 든 심은찬은 재빠르게 그 페이지에 메모를 했다.

“근데 엄청 많이 봤나 봐, 그 대본.”

“네? 아. 네. 주변에 폐를 안 끼치려면 계속 보면서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심은찬의 대답을 들은 김휴인이 눈까지 휘며 웃었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뭘. 앞으로도 막히거나 궁금한 부분 있으면 물어봐.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나도 도와줄 테니까 같이 생각해 보자.”

서로의 특성 시너지가 좋았던 걸까. 기대 이상의 호의가 돌아왔다.

심은찬이 눈을 크게 뜨자 김휴인이 소리 내며 웃었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냐면서. 등을 툭툭 두드리면서 촬영 기간 동안 열심히 해 보자는 말을 마친 김휴인은 자신이 아는 연기자가 있는지 양해를 구하고 그쪽으로 향했다.

이렇게까지 잘해 줄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람이 좋았다.

심은찬이 가진 인간 캣닙 특성에도 김휴인처럼 모두가 다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 건 아니었다.

연기 실력이 입증되지 않은 아이돌이 정극에 비중 있는 조연으로 나온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걸 티 내는 사람 또한 당연히 존재했다.

인간 캣닙 특성은 모든 사람들이 심은찬을 좋아하게 만드는 만능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심은찬에 대한 나쁜 선입견이 강하거나 타고난 성질이 어지간히 좋지 않은 경우, 그의 특성이 효과를 낸다고 해도 미미한 듯싶었다.

캣닙 특성은 처음부터 심은찬을 싫어하는 인간에게는 별 효과가 없었다. 예를 들어 마이너스 50이었던 것을 가까스로 마이너스 30으로 만들 수 있을 뿐이었다. 특성 능력이 발휘되어 좋은 인상을 받게 되는 건 첫인상 한정이고 그 뒤로는 호감이 지속적으로 쌓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나쁘게 봐야지 하는 마음을 먹은 사람이 그 상대라면 심은찬의 특성 역시 거의 효과가 없다고 봐도 좋다는 의미였다.

한마디로 심은찬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면 그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어, 생각보다는 첫인상이 나쁘지 않네?’ 정도 수준에서 그친다는 이야기다.

그걸 알게 해 준 인물은 바로 극 중 살해당한, 여자 주인공의 오빠로 나오는 이새림이었다.

인사하는 심은찬을 보고 고개를 까딱하며 “아, 예.”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바도 아니었지만 이렇게 숨길 생각도 안 하는 건 좀 놀라웠다. 몇 년 뒤에 이새림이 태도 논란으로 문제가 불거졌던 게 역시 그냥이 아니었다.

어차피 이새림은 주요한 배역을 맡은 건 아니었기에 마주칠 날도 별로 없었다.

깔보는 태도가 좋진 않았지만 일일이 반응할 수도 없고 그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반응을 하면 같은 급으로 떨어지기 마련이니 흘려넘기는 게 맞았다. 예전이라면 이새림을 너무 신경 써서 괜히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눈치를 봤을 테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평온했다. 강철 멘털 효과 덕분인 듯싶었다.

골드 카드급 특성치고는 좀 약한 게 아닌가 싶어 아쉬운 마음이 들긴 했다.

“…….”

하긴 특성 효과 하나로 인간관계를 전부 다 날로 먹는 게 더 말이 안 되긴 했다. 그나마 첫 시작을 좋게 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게 어디인가. 그 뒤는 전부 심은찬이 어떻게 하느냐로 갈리는 거니 나쁘지 않았다.

어느덧 지정된 시간이 됐고 늦은 사람 없이 전부 모였다.

다들 정말 반짝반짝하게 잘생겼다. 본인이 아이돌이기도 하고 다른 아이돌 역시 직접 보긴 했지만 배우들은 역시 생김새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심은찬은 제 코를 검지로 콕콕 찍었다. 확실히 얼굴이 좀 더 입체적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긴 했지만 이내 털어 낼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감독이 먼저 자기소개와 인사를 했다. 이어서 주연과 두 명의 조연들을 거쳐 심은찬의 차례가 되었다.

“안녕하세요. 연운 역을 맡은 심은찬입니다. 연기는 처음이지만 누를 끼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의례적인 인사를 전부 마치고 드디어 본격적인 대본 리딩 시간이 되었다.

1화에서 심은찬의 대사는 “어. 그런 것 같네.”와 “손은 놓고 말하지?”, “그럴 필요가 있을까?”가 전부였다. 나머지는 표정 연기와 말없이 행동으로만 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메이킹 영상에 쓸 예정인지 카메라 두 대로 촬영을 하고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한 시간 정도가 걸려 리딩이 끝났다. 올 때처럼과 같이 인사를 하며 자리를 떠났고 심은찬은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켰다. 정극에 처음 도전하는 무명 아이돌이 먼저 자리를 떠날 수는 없었다. 그런 심은찬에게 감독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동안은 우리 조감독이랑만 만나서 나랑은 처음 보죠? 사진이나 영상으로만 보는 거랑은 또 다르네요.”

감독이 눈을 살짝 찡그렸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싶어 어깨를 살짝 움츠러트렸다.

“실물 느낌이 좀, 뭐랄까. 호감상? 눈길을 잡아 끄는 데가 있네요? 대사하는 것도 발음이 아주 좋던데 작업이 기대돼요.”

캣닙 특성 만세.

감독에게는 제대로 효과가 나타난 모양이었다.

심은찬은 두 팔을 번쩍 들고 싶은 마음을 숨긴 채 붙임성 있는 미소를 입에 걸었다.

“아직 부족한데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에는 현장 분위기 적응하는 것만도 좀 빠듯할 텐데 잘 부탁해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감독님.”

“그래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고 촬영 날 봐요.”

심은찬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린 감독은 자리를 떠났다.

다행스럽게도 감독은 심은찬에게 호의적이었다. 아무리 출연 제의를 먼저 했다고 해도 그건 심은찬이란 사람 자체를 좋게 봐 주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심은찬을 대하는 걸 봤을 때는 마음에 들지 않는데 하는 수 없이 쓴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전 생을 떠올려 보면 감독이 연기자로 배우만을 고집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번 드라마 이후에도 새롭게 제작을 맡은 드라마에서 모델을 기용하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했었다. 감독의 그런 마인드는 심은찬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대기 시간이 길다는 이야기는 들었기에 각오를 단단히 해서였을까. 생각했던 것보다는 괜찮았다. 회사가 지원해 준 차 안에서 대기가 가능했기에 그래도 뒷좌석에서 편하게 있을 수 있었다. 의상을 입고 헤어 세팅이 된 상태라 편하게 자는 건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눈을 감을 수 있는 건 그렇지 못한 것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었다.

새벽에 다음 앨범 안무 연습했던 걸 돌려 보기도 하고 거울을 보고 표정 연습을 해 보며 알뜰하게 시간을 사용했다. 김휴인은 필요하면 도움을 청하라고 해 주었으나 그가 심은찬의 보호자도 아닌데 너무 자주 그러는 것도 좀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몇 없는 대사라지만 혼자서 분석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대본을 되풀이해서 읽을수록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대본을 읽을 때에는 여주에게 도움을 주는 장면처럼 느껴졌는데 몇 번이고 읽는 사이 남주를 향해 질투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잖은가. 같은 여자를 좋아하는 친구를 순수하게 응원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연운도 이때 처음으로 우하연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지 않았을까.

단순히 연운이 등장했다가 할 말만 하고 사라지는 신으로 남기고 싶지 않았다. 이 안에서 연운의 복잡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고 또 그럴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혼자만의 판단으로 행동하기엔 주저되었다. 혼자서 극을 이끌어 가는 1인극도 아니고 모두가 함께 촬영을 하는 일이다.

대본을 들고 잠시간 고민하던 심은찬은 김휴인에게 상의를 해 보자고 결심했다. 원래라면 같은 장면을 촬영하는 박윤우와 상의를 하는 게 좋았을 테지만 아직 그와는 그리 친해진 상황이 아니었다. 우선 김휴인과 대화해 보고 괜찮은 반응이 나오면 그 이후에 생각해 보자고 결정했다.

고민이 끝나자 망설임 없이 곧바로 김휴인이 있는 차량 앞으로 가서 그에게 연락했다. 혹시 대사를 같이 맞춰 봐 주실 수 있냐는 질문에 흔쾌히 좋다는 대답이 왔다. 어디 있냐는 김휴인의 질문에 차 앞에 서 있다는 답을 보내자마자 차 문이 벌컥 열렸다.

“아니, 왜 차 앞에서 그래.”

“형이 쉬고 계실지도 몰라서……. 쉬실 때 그러면 좀 죄송해서요.”

“미안하긴. 나도 대본 한 번 더 보면서 연습하는 거지. 들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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