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61)

#14

“예. 현장 분위기 좀 익힐 겸 해서 스태프처럼 하고 같이 가자고 하셨어요.”

“음. 그래요 그래요.”

심은찬은 현우영을 한번 보았다. 얼굴을 아무리 가려도 비율이 너무 연예인인데. 스태프인 척을 한다고 해도 잘 가려질까 싶어진 거다. 이게 최선일까 싶었지만 뭐 어떠랴. 가서 분위기를 보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팬들이 있다는 걸 온라인으로 봐서 아는 것과 실체를 가진 사람들을 직접 보는 건 전혀 느낌이 다르니까.

“저 따라서 바로 들어온 거죠? 우영이는 어서 가서 먹어요. 한창 자랄 땐데 식사 거르면 안 되잖아요.”

심은찬은 문 쪽을 보며 말했다.

“아니면 문까지 데려다줄까요?”

농담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하는 것처럼 심은찬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식사도 거르시는데 갑자기 죄송했습니다.”

뜬금없이 나온 사과에 심은찬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저게 앞뒤가 맞는 말인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현우영은 말을 계속했다.

“힘든 건 은찬 형 본인이실 텐데 제가 너무 제 위주로 생각했어요.”

예상하지 못한 기특한 말이었다.

이렇게 빠르게 감정을 추스르고 사과를 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말이다. 현우영은 생각보다도 더 괜찮은 녀석이었다.

“기분 나쁘시라고 그랬던 건 아니었어요. 그 정도로 안하무인은 아니에요. ……전적이 있긴 하지만요.”

말하면서도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 듯 자그맣게 덧붙였다. 푹 튀어나온 웃음을 가까스로 삼킬 수 있었다. 티가 났을 텐데도 현우영은 그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알죠. 여태 같이 생활한 게 있는데 설마 그렇게 생각하려고요.”

빈말은 아니었다. 현우영이 너무나 당돌해서 버릇없기까지 한 모습을 보인 건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진짜로 별다른 뜻이 있어서 말 안 한 건 아니에요. 알죠?”

“예, 알아요.”

“너무 붙잡았네. 밥 다 식겠어요. 어서 가 봐요.”

권유하는 심은찬의 말에 현우영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방 밖으로 나갔다. 한창 대본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 그가 다시 한번 찾아왔다.

“이거요.”

“뭐예요……?”

현우영이 건네는 걸 무의식적으로 받아들고 보니 초콜릿 바였다.

“지금 드시라는 거 아니에요. 내일 대본 리딩 자리 직전에 드세요. 너무 빈속이시면 힘이 안 나잖아요.”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이런 것까지 챙겨 줄 줄은 몰랐다.

현우영은 대본 연습과 안무 연습을 병행하는 심은찬의 스케줄을 알고선 꽤 놀라는 눈치였다. 좀 누그러진 태도를 보이는 건 그 영향도 있는 듯했다. 그룹 인지도를 끌어올리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러는지 아니면 빡빡한 스케줄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서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이유야 어쨌건 현우영과 좋은 관계가 된다면 나쁠 건 없었다.

“으응. 다른 형들은 뭐 해요?”

“자콘 찍고 계세요.”

“아, 역시. 그래서 이렇게 말소리가 들렸구나.”

밥 먹고 나서 왜 이렇게 시끌시끌한가 했더니 누튜브에 올릴 영상을 찍고 있는 모양이었다. 문세별의 목소리가 주로 나는 걸 봐서는 그가 메인으로 찍어서 올리는 <별별별 숙소 근황>에 사용할 영상인 듯했다.

당장은 아니고 컴백 후에 업로드할 예정인 영상이기에 이 시점에도 멈추지 않고 촬영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이쪽 방으로도 들어오려나. 심은찬이 문 쪽을 보며 목덜미를 꾹꾹 주물렀다.

“그럼 저 나가 볼게요.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깍듯하게 인사하고 나가는 현우영을 불러 세웠다.

“잘 자요. 이거 땡큐요.”

심은찬은 초콜릿 바를 짤랑짤랑 흔들며 인사했다. 그냥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도 일부러 챙겨 주는 마음 씀씀이가 참 고마웠다. 막내인 데다가 이렇게 세심하게 신경을 써 주니 다른 멤버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심은찬도 첫 만남에서 자신과 기 싸움했던 현우영의 인상이 상당히 옅어졌다. 그리고 그때 현우영의 행동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때는 스스로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긴 했었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심은찬이라 하더라도 정신 안 차리냐고 했을 거다. 물론 현우영처럼 직설적으로 하진 않았겠지만.

한데 대체 그때 말했던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건 대체 뭐였을까. ‘되고 싶다’도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현우영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아니면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만 생각하자고 결론 내린 심은찬은 초콜릿 바를 책상 위에 올려 두고 기지개를 한번 켰다. 같은 자세로 있던 몸이 삐걱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목을 좌우로 까닥거리며 스트레칭을 한 심은찬은 침대에 길게 엎드려 대본을 펼쳤다.

내일 개인 스케줄이 있긴 했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연습실에서 안무 연습을 마치고 온 길이었다. 이제 안무 암기는 끝났고 디테일을 다듬는 수준이었다. 연습만이 살길이었다. 기본 실력이 있어야 안무 변형도 할 수 있고 무대 위에서의 여유도 가질 수 있는 거니까. 이전 생에서처럼 연습 부족으로 꼴불견처럼 시선 처리도 제대로 못 해 안절부절못하는 건 절대 사절이었다.

좀 더 완성도 높은 무대를 위해서는 힘든 건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뻑뻑한 눈가를 문지르며 입에 펜을 문 채 눈앞의 대본을 노려보았다.

펜을 물고 하는 게 발음을 좋게 하는 데 크게 도움이 안 된다는 이야기도 듣긴 했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심은찬은 대본을 보다가 그대로 그 사이에 머리를 박은 채 잠들었고 그 모습은 심은찬 본인도 모르는 사이 문세별의 자콘 영상에 고스란히 찍혔다.

* * *

고지된 시간보다 한 시간은 빨리 도착한 심은찬은 스태프들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배우들이 한 명씩 들어올 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허리를 접어 인사했다. 자리 세팅은 이미 다 되어 있었기에 심은찬은 제 배역과 이름이 적힌 자리에 얌전히 앉았다.

배역 한 명 한 명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던 심은찬에게 다른 배우들 역시 반갑게 인사를 건네긴 했지만 미묘하게 다른 온도 차를 느꼈다. 전부 배우인데 심은찬 혼자서만 아이돌이라는 점이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든 것 같았다. 드라마 홍보를 위해 유명 아이돌을 섭외하기도 했지만 심은찬은 거기에 포함되는 케이스가 아니었다.

예상했던 일이다. 처음부터 반갑게 동료로 맞아 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대본을 쳐다보던 심은찬에게 서길영 역을 맡은 김휴인이 먼저 말을 걸어 왔다.

“안녕하세요. 심은찬 님이시죠?”

“아. 안녕하세요. 김휴인 선배님.”

처음에 이름을 듣고 좀 독특하다 했는데, 김휴인의 본명이 유명 배우와 겹쳐 예명을 지었다는 사실을 검색을 통해 알았다. 사진으로 봤을 때도 잘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실물을 보니 정말 남다르게 생겼다. 작은 얼굴에 이목구비가 꽉꽉 들어찬 게 신기했다.

외모가 예쁘다고 마음까지 예쁜 게 아니라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근사근한 목소리와 쌍꺼풀이 크게 진 눈으로 웃는 걸 보고 있자니 이전에 심은찬 대신 연운 역으로 출연했던 배우와도 사이가 좋았던 게 떠올랐다. 물론 방송으로 보여지는 모습을 전부 신뢰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긴 했지만.

“연운 역에 누가 들어오실까 기대 많이 했는데, 캐스팅 확정됐다는 소리에 찾아 보고 너무 잘생기셔서 깜짝 놀랐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과찬이세요. 선배님께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하하. 그런데, 사석에서 님이라는 호칭을 들으니까 좀 너무 간지럽네요.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하세요. 저도 말 놓을게요. 괜찮을까요?”

그는 심은찬에게 동의를 구한 뒤에서야 말을 놓았다. 편하게 말을 건네는 김휴인을 보며 심은찬은 그의 호의적인 태도가 바뀌지 않도록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 번 더 했다.

그러면서 궁금증이 하나 들었다. 배우와 아이돌은 상태 창이 같을까, 싶어진 거다.

심은찬은 김휴인의 상태 창을 확인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름: 김아인(예명:김휴인)

스타성: B

연기력: B

표현력: B

대사 전달력: C

외모: A

멘털: B

특성: 완전히 열린 문(선입견 제로/B), 모두의 친구(A), 될성부른 떡잎에게는 태양(A) 활성화.]

상태 창이 자신과 현우영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아이돌과 배우라서 다른 것 같았다. 심은찬은 김휴인의 상태 창을 빠르게 훑은 뒤 시선을 돌렸다.

능력치가 B면……. 특출나게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것 같은데.

심은찬은 아직 멤버들의 상태 창을 확인하지 않았다. 능력치를 확인한다고 뭘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말로 그냥 ‘확인만’ 할 수 있는데 별 이유 없이 볼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현우영이야 당시 상황상 별수 없었지만 다른 멤버들은 굳이, 싶었던 거다.

그러다 보니 능력치에 대한 확실한 기준이 안 섰다.

앞으로는 상태 창 확인을 자주 해 보는 게 좋겠다고 마음먹었다.

특성을 보아 하니 노력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하기야 그런 사람을 누가 싫어하겠냐만서도 김휴인은 특성으로 나올 정도로 그 기질이 강한 듯싶었다.

김휴인의 태양 특성에 심은찬의 캣닙 특성까지 더해지면 더할 나위 없는 시너지가 날 거다.

심은찬이 잠깐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도움받는 걸 망설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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