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61)

#12

“갑자기 놀랐잖아요. 예고는 하고 들어와야지 이렇게 훅 들어오면 어떡해요.”

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보곤 말을 이었다.

“뭐 찍는 줄 알았잖아요.”

오글거리지 않는다고 했지 놀릴 생각이 없다고는 안 했다.

현우영은 심은찬의 말에 당장 표정을 굳혔다. 그 반응에 너무 놀렸나 싶은 생각은 들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시작은 현우영이 한 거다. ‘내 앞길에 방해되지 마.’ 같은 말로 선전포고하는데 샐샐 웃으면서 받아 줄 필요는 없었다. 물론 현우영 쪽이 한참 어리니 심은찬이 좀 여유를 가지고 대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선택이지 필수 사항은 아니었다.

심은찬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당연히 열심히 할 거예요. 누구에게 매달려 갈 생각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게 우영이를 위해서나 지금 한 말 때문은 아니에요.”

심은찬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제 목표는 올해 연말 대상 받는 거거든요. 마음이 맞죠?”

딱히 누군가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상대가 너무 진지하게 나오다 보니 자극을 받았다.

현우영은 심은찬의 말을 듣고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심은찬을 응시할 뿐이었다. 마치 그의 진의가 어떤지 읽으려 하는 사람처럼.

어린 티가 여기에서 났다. 하긴, 능숙한 어른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식으로 정면에서 부딪치지도 않았을 거다.

뭐, 그 도발에 참지 못하고 덜컥 대상이 목표라고 반응해 버린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이가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이 보듬어 줘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심은찬은 한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뜻이 맞은 사람들끼리 만난 기념으로 악수 한번 할까요?”

또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현우영의 눈매가 미미하게 굳었다.

“왜요. 대상까지는 안 될 거라고 생각해요?”

현우영은 미간에 지익 금을 긋고 입을 꾸욱 다물었다. 그리고 심은찬의 손을 잡는 둥 마는 둥 재빠르게 악수를 마쳤다. 가벼운 도발에 넘어오는 행태가 자못 귀엽게 느껴졌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요. 잘 부탁해요.”

심은찬은 제 손을 마주 잡은 현우영을 보며 눈을 휘었다.

“여기서부터 가는 길은 알고 있어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걸어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심은찬은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 그냥 심은찬에게 이 말이 하고 싶어서 부른 것 같았다.

그런데 되고 싶다도 아니고 되어야 한다는 건 또 뭐지. 그냥 강한 의지 표명인가.

“으, 추워.”

고개를 갸웃거리던 심은찬은 몸을 부르르 떨고는 걸음을 옮겼다.

현우영을 바래다주고 숙소에 돌아왔건만 샤워 대란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보일러 라인이 지나가는 따뜻한 부분에 젖은 걸레처럼 착 붙어 누워 있던 심은찬은 제 순서에 늘어지는 몸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가 샤워를 마쳤다. 씻고 나니 조금 기운이 났다. 말끔해진 심은찬은 덜 마른 머리를 수건으로 슥슥 문지르며 방으로 들어갔다.

심은찬보다 먼저 씻고 들어와 있던 도준서가 핸드폰을 보는 채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심은찬이 돌아온 기척이 났을 텐데도 불구하고 시선조차 주지 않은 도준서의 옆에 일부러 털썩 앉았다.

“뭐 해?”

“그냥.”

시선도 주지 않고 고집스럽게 핸드폰을 쳐다보는 걸 보니 역시 오늘 하루 기분이 어땠는지가 보였다. 심은찬이 말없이 도준서의 어깨에 젖은 머리를 마구 문지르자 그제야 질겁하며 상체를 떼어 내려 했다. “아, 뭐야”를 연발하며 벗어나려는 도준서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던 심은찬이 입을 열었다.

“단 거 먹을래?”

“……뭔데?”

“저번에 받았던 거 있거든.”

심은찬은 간식 서랍으로 가기 위해 도준서에게서 떨어졌다. 동그란 금색 포장지로 싸인 초콜릿을 서랍에서 꺼내어 건넸다. 도준서는 관심을 보였던 게 무색하게 바로 먹지 않고 손으로 데굴데굴 굴렸다.

“맛있는데 그거.”

“알아. ……. ……알아.”

단순히 초콜릿이 맛있는 걸 안다고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이 전반적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안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너무 과대 해석을 한 걸까.

사실 B the 1이 잘나가서 누구나 들어오고 싶어 하는 인기 그룹도 아니고 굳이 분류를 하자면 이미 데뷔를 해서 성적이 좋지 않은, 흔히들 말하는 망돌이었다. 심지어 7집 싱글까지 낸.

아무리 데뷔가 고픈 연습생이더라도 그런 그룹에 중간 합류하기로 한 결정은 결코 쉽지 않았을 거다. 몇 년간 합을 맞춰 함께하던 멤버가 빠져나간 자리를 메꾸기 위해 투입되는 자리가 그렇게 매력적일 리 없었다.

그럼에도 현우영은 마다하지 않고 들어왔다.

하지만 사실을 알고 있는 것과 그걸 받아들이는 건 차이가 있기 마련이었다.

일련의 사건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져 제대로 중심을 잡기 어려울 테지.

심은찬이 멤버들에게 알리는 걸 밀어붙이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으로, 여러 번 나누어 충격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한 번에 충격받는 게 나으리라는 판단하에서였다. 멤버들 개개인이 이 일을 받아들이고 현우영을 한 팀으로 생각하기까지에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사람의 감정은 자로 잰 듯 딱 맞춰 떨어지는 게 아니고 논리적인 것도 아니다. 본인도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일어나기도 하기에 뭐라고 할 수도 없었고 하기도 어려웠다. 옆에서 들려오는 몇 마디에 감정을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다면 세상에 갈등이나 분쟁은 없을 거다.

심은찬은 굳이 그것과 관계된 말을 일절 하지 않았다.

감정을 정리하는 건 다른 사람이 해 줄 수 없다. 재촉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오롯이 본인 혼자서 해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심은찬은 가만히 손안에 쥔 초콜릿을 내려다보고 있는 도준서에게 말했다.

“안 먹으면 내가 먹고.”

“누가 안 먹는대. 먹어. 먹어야지.”

도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뺨이 볼록하게 솟은 채 씰룩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짱구처럼 보여 귀엽게 느껴졌다. 볼록한 뺨을 검지로 꾹꾹 누르자니 도준서가 얼굴을 피했다.

“왜.”

“맛있지.”

“그러네.”

“아끼고 있던 거 주는 거야.”

“어이구. 고맙네.”

가까스로 평소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오늘 사무실 갔던 건 어떻게 됐어.”

“어? 뭐어, 그냥 한다고 했지.”

“아니, 그거 말고.”

심은찬은 도준서가 자신의 성형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전 생에서는 이런 걸 물어보지 않았는데. 약간씩 상황이 바뀐 영향인가. 심은찬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할 거야?”

“아니. 안 해.”

확실히 도준서는 눈치가 좋은 편이긴 했다. 대본을 전달받은 뒤 틈만 나면 거울을 붙잡고 코를 살펴보던 심은찬의 행동에 뭔가 감을 잡은 게 분명했다. 그제야 심은찬은 자신이 거울을 들여다볼 때 툭하면 도준서가 다가와 말을 걸었던 게 떠올랐다. “또 거울 보고 있어?”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우리 그룹 외모 양대 산맥.” 같은 말을 하면서.

솔직히 당시에는 그 말을 그냥 농담처럼 흘려들었었지만 이제야 깨달았다. 도준서 딴에는 심은찬이 수술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그에게 수술은 필요 없다는 의견을 피력한 거였다. 나이가 어려 그만큼 서툰 표현으로 열심히 말이다.

그 다정함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핸드폰으로 뭐 보고 있었어?”

“그냥 뭐.”

툭 침대에 누워 질문하는 심은찬의 질문에 도준서가 애매하게 대답했다.

“열심히 하자.”

“그래.”

2층 침대라 위층의 바닥 부분을 쳐다보며 하는 말에 도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벼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결코 무겁거나 싫은 느낌이 아니었다.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부드러움이 스며든 정적이었다.

이런 공기가 심은찬은 싫지 않았다. 심은찬이 눈을 감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야. 자? 나 눕게 나와.”

침대 주인의 말에 심은찬은 결국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 * *

내가지금꿈꾸는거맞지@bthe1xxhmlove

오늘 공지보고 몸져누운 사람 여기 있어요ㅠㅠㅠㅠ 미친좆텐하이 일도 더럽게 못해 미친럼들 뭘 어캐하면 센터가 빠져 바짓가랑이라도 잡아야지 미친럼들아

해님에게 도른자@sunsun0310

도른 거 아님?

센터 빠지면 뭐 어쩌란 거임?

비더원절대지켜@btheone4ever

여태껏 걔 있는 돌? 했던 그룹에서 ‘걔’였던 애가 나가면 어쩔? 소속사 뭐함? 일 안함?

└[email protected] ㅋㅋㅋ좆망돌에서 버티던 게 기적이었음 소년가장도 정도껏이지 답없어보이니 가장이 탈주함 대형으로 옮기는 게 확실함

└└비더원절대지켜@btheone4ever 신나냐? 알계새끼가 낄끼빠빠 병신아 팬도 아니었던 새끼가 말얹기 ㄴㄴ해 공식적으로 말 나온 것도 없음

눈물만흘리는에이투@BAthe12isbest

ㅠㅠㅠㅠㅠㅠ막냉이 빠지면 어떡함ㅠㅠㅠㅠㅠ우리 애들 어떡함ㅠㅠㅠㅠㅠㅠ공지보고 눈물터져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음ㅠㅠㅠㅠㅠ

그동안감사했습니다@bthe1aabb1234

여태까지 감사했어요 같이 비솓1덕질하셨던 분들 즐거웠어요

그래해님이가보자고@mainheamin

어디가든 따라간다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추는 우리 애기 잘 나왔다 오히려 좋아 가보자고!!

└얘들아 꽃길만걸어@1ehtbevol0229

이런 분위기에 이런 멘션쓰는거 안미안해요?눈치 좀 챙기세요

└└그래해님이가보자고@mainheamin

뭐래 눈치ㅇㅈㄹ 너네멤이나 챙겨 잘나가는 애 끌어당겨서 같이 죽을 생각말고

└└└얘들아 꽃길만걸어@1ehtbevol0229

의리도없고양심도없고 그멤버에 그팬이네

└└└└그래해님이가보자고@mainheamin

우리애가 너무 잘나서 그동안 하드캐리했는데 옆에서 콩고물 받아먹었던건 머갈이 나빠서 기억이 안나나봐 응 양심은 너나 찾고ㅗ

└└└└└해민이사랑@0310hmsalang

님 저사람보니까 #심은찬 팬이네요 지새끼 못뜨니까 돌아버렸나봐요 신경쓰지마세요

└게으릉고먐미@chan0229lolo

미쳤음?태그까지 거는 건 선넘는거 아님?

* * *

공식 사이트에 이해민의 탈퇴가 고지되었고 예상대로 얼마 되지 않은 팬덤이 들끓었다.

공지에는 무난하게 ‘당사는 B the 1의 멤버인 이해민과의 여러 방면으로 심도 깊은 논의 후 본인의 의사를 무엇보다 존중하는 것으로 하여 계약 종료를 결정했습니다. B the 1과 함께해 준 이해민에게 진심 어린 고마움을 전합니다.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이해민과 B the 1에게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정도의 워딩을 사용하였다.

아이돌 올림픽 대회를 보름 정도 앞둔 날이었다.

어차피 아이돌 올림픽 대회 녹화 날에 알게 될 사실이었으니 미리 공지를 해 놓는다는 설명을 매니저에게 듣긴 했다.

SNS를 가끔 검색해 보기도 하는 심은찬은 팬 계정들의 ‘ㅠㅠㅠㅠㅠ’ 향연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속상하다는 반응들과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반응, 이해민을 응원한다는 반응들이 뒤섞인 채였는데 그 모든 게 다 이해가 됐다.

소속사에서는 공식적으로 들어오는 질문에 대해서는 정해진 답변을 외우고 팬들에게 들어오는 질문에는 개인적인 대응을 일절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멘털이 강해졌다고는 하는데 순간순간 드는 감정들은 이전과 별다를 바 없었다.

하긴 그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멘털이 강한 게 아니라 사이코패스겠지.

한숨을 내쉬고 핸드폰을 옆에 내려 둔 심은찬은 몇 번이나 읽었던 대본을 다시 한번 들춰 보기 시작했다.

확실히 심은찬의 대사가 다른 사람에 비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하나하나가 중요했다. 표정 연기 역시 거울이나 따로 핸드폰으로 녹화하며 연습을 반복했다.

제공받은 대본에는 심은찬이 해 놓은 메모들로 빼곡했고 표지는 상당히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불안한 마음이 들 때마다 오히려 연습에 몰두했다.

당장 내일이 제작 발표회 겸 출연 배우들과의 첫인사와 대본 리딩이 있었다.

심은찬이 마지막 합류였기 때문에 참가한다는 연락을 하자마자 빠르게 대본 리딩이 잡혔다.

1분 1초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대본을 들여다보며 대사를 외우던 심은찬은 노크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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