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원래대로라면 이해민이 있었을 자리가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워져 있어 허전함이 들었지만 모두 내색하지 않고 춤을 췄다.
-깊은 어둠 속 가려져 있던 뜨거운 열정
내 마음속 떠오르는 결정 TAKE chance
이해민의 파트에 이르러 그 느낌은 극에 달했다. 하지만 어느 한 명도 동요하거나 바닥을 보며 춤을 추지 않았다.
드디어 심은찬의 파트였다.
딱히 두드러지게 랩이나 노래를 하는 게 아니라 두루두루 고만고만한 수준이었던 심은찬은 랩과 보컬 파트를 고르게 분배받았었다.
MR에 맞춰 춤을 추면서 실제로 노래도 함께하는데 녹음된 제 목소리가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뜨악스러웠다.
-숨겨 둔 마음 다음
함께한 우리다움
그사이 감춘 기회 다시 잡아 끌어 올려 big shoot!
랩 부분이었는데 이걸 이렇게 못 불렀었나 싶었다.
자기 목소리라 객관적으로 보기 힘들다고는 해도 심은찬의 회귀 전 실력보다 한참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좀 더 잘할 수 있다는 걸 심은찬 본인이 알고 있다. 이걸로 오케이를 받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심은찬은 나중에 현우영 파트를 녹음할 때 부탁드려서 반드시 재녹음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지 않으면 무대 할 때마다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멘털 보정을 받아 어지간한 실수에는 타격 없이 무디게 넘어갈 수 있다지만 그걸 핑계로 이런 엉망인 결과물을 괜찮다며 눙치고 싶지는 않았다.
-기억 속 너는 얼음처럼 ambitious!
마지막은 도입부와 가사는 같았지만 그걸 부르는 도준서의 창법은 전혀 달랐다.
도입부에서 미성을 돋보이게 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목을 긁는 듯한, 힘 있는 목소리로 곡을 마무리했다. 격렬하게 움직이던 네 명이 도준서의 파트가 끝나자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듯 멈추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한번 맞춰 본 것뿐이었지만 다들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은찬아.”
“죄송해요. 따라갈 수 있도록 연습할게요.”
이름을 부르는 문세별을 보며 심은찬은 고개를 숙였다. 이런저런 변명 역시 입에 올리지 않았다. 다른 멤버들 입장에서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을 거다. 잘 따라오던 기존 멤버가 자고 일어났더니 사람이 바뀐 것처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였으니 말이다.
“괜찮아. 아직 날짜 남았으니까. 괜찮아.”
정말 바보에게는 바보라고 하지 않는다고 하던가. 이상한 정도로 많이 틀린 심은찬에게 질책보다 격려를 건넸다. 문세별이 위로하듯 심은찬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번엔 같이 하면서 맞춰 볼까? 동작이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맞추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도 있는데 우리는 몇십 번이고 다시 해도 되니까 너 직성 풀릴 때까지 해. 알았지?”
문세별은 현우영에게만 말하는 게 아니었다. 심은찬은 현우영과 같이 알겠다고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춤을 추고 노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그리고 얼마나 이걸 좋아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몇 번이건, 다시 할 수 있다.
의욕이 활활 불타올랐다.
현우영이 안무 익히는 속도가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빨랐기에 다섯 번까지도 가지 않았다.
두 번째 합을 맞출 때에는 거의 완벽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실수가 없었다. 아주 사소한, 주먹의 틀어진 각도 같은 게 조금 어긋났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매의 눈을 가지고 있는 문세별에게나 발견된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었다.
단순히 기술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타고난 춤 선이 정말 예술이었다. 팔다리가 길지만 휘적거리는 느낌이 없었고 오히려 그 장점을 더 잘 살리고 있었다.
세팅하지 않아 자연스럽게 흔들리는 머리카락 한 올조차도 일종의 연출로 보였다.
현우영의 능력치를 알고 있던 심은찬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는데 다른 멤버들이야 오죽하랴.
진짜 저런 애가 어떻게 포텐하이 같은 소속사로 들어왔는지, B the 1의 충원 멤버가 된 건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됐다. 이런 문제는 본인에게 물어보기도 뭐한 주제였다. 하지만 심은찬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시선이 마주쳤을 때 서로의 표정이나 눈빛으로 알 수 있었다.
문세별이 감탄을 하며 현우영의 등을 두드렸다.
“우영이 너 대단하다. 이걸 하루 만에 하네.”
“잘 알려 주셔서 그런 거죠.”
현우영은 첫인상과는 다르게 제법 싹싹한 구석도 있었다. 예정에 없던 일이었기에 당황스러울 게 분명했을 텐데도 연습실에 와서 춤까지 맞춰 보는 거에 싫은 티를 하나도 내지 않았다.
문제는 심은찬이었다.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이 실력으로 무대를 올라갈 수는 없었다.
“은찬이 이리 와. 개인 과외 하자.”
문세별이 아무렇지 않게 먼저 안무를 봐준다고 나섰다. 심은찬 쪽에서 말을 하는 게 어려울 거라 생각한 모양인 듯 가벼운 어투로 말했다. 오늘 안무를 처음 배우는 현우영을 제치고 괜찮을까 싶었지만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문세별의 가르침이 필요한 사람은 심은찬 쪽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전체적인 안무의 기억을 되살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꼴불견은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좀 더 완성도를 높여야 했다.
심은찬의 목표는 좀 더 높은 곳에 있었다.
팬들에게, 대중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는 이 정도만으로는 안 됐다. 심은찬은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하며 연습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6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춤을 맞춰 보자는 말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기에 심은찬도 당황했지만 현우영은 싫어하기는커녕 도리어 조금 더 해 보자며 열의를 보였다. 그런 모습을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결국 추가로 두 시간을 더 연습을 하고 나서야 연습실을 나섰다. 그나마도 더 연습할 수 있었는데 현우영의 본가가 경기도에 있다고 해서 일찍 끝냈다.
첫 만남에 몇 시간씩 살을 부대껴서 그런지 연습실을 나설 때에는 확실히 처음보다 훨씬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심은찬은 조금은 편해진 분위기 속에서 평균을 맞추고는 있었지만 결코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도준서가 신경 쓰였다. 아무래도 잔정이 많은 타입이다 보니 이해민이 그렇게 나갔어도 현우영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게 분명했다.
팀워크가 나쁘면 무대에서도 티가 나기 마련이다. 도준서와 같은 방을 쓰고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정신적인 나이는 제일 많은 자기가 챙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짐을 챙겨 오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현우영은 버스를 타고 귀가할 생각인 듯했다.
“은찬 형께서 정류장까지 데려다주시면 안 될까요?”
현우영은 심은찬을 콕 집어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숙소와 연습실까지 오게 만든 장본인인 심은찬이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지목할 줄은 몰랐다.
“좋아요. 안 될 것 없죠.”
흔쾌히 수락하고 나서는 심은찬에게 류서오가 말을 걸었다.
“괜찮아? 피곤할 텐데.”
“괜찮아요. 어차피 지금 가면 바로 못 씻을 테니까요.”
“하긴.”
류서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시했다.
연습실 밖으로 나오자 뺨을 베는 것 같은 매서운 칼바람이 그들을 환영했다. 밤이 되어서 그런지 더욱 춥게 느껴졌다. 심은찬이 으, 하고 몸을 움츠리는 사이 현우영이 멤버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이쪽이에요.”
현우영은 손짓하는 심은찬을 따라왔다. 연습을 오래 했지만 늦은 시간에 끝난 게 아니어서 그런지 통행인들이 그리 적지 않았다. 오가는 사람들이 흘끔거리며 현우영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확실히 가만히 있어도 눈길이 가는 얼굴이긴 했다.
몰래 눈동자만 돌려 현우영을 보던 심은찬의 시선을 느낀 모양이었다. 현우영은 고개를 정면으로 향한 채 입을 열었다.
“은찬 형.”
“네?”
“저는 최고가 되어야 해요. 그러니까 발목 잡지 말아 주세요.”
선언하듯 내뱉는 말을 듣곤 제 귀를 의심한 심은찬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그의 몸 방향이 심은찬 쪽으로 돌려져 있었다.
표정이 진지한 게 절대로 농담이나 장난이 아니었다.
갑자기 이렇게 여기서 말한다고?
실제로 ‘발목 잡지 마’라는 식의 말을 들을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임팩트가 상당했기에 심은찬은 눈을 깜빡거리는 정도의 반응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런 그의 반응을 뭐라고 해석한 건지 현우영은 표정을 굳히며 말을 이어 갔다.
“최고가 될 자신도 있어요. 발목 잡는 사람이 있다면, 매달고서도 올라갈 수 있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아까워요. 그러니까 노력해 주세요.”
심은찬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요 녀석 보게. 이걸 말하려고 데려다 달라고 한 거구나.
오늘 안무 연습을 하면서 본 심은찬의 안무 숙달 정도와 녹음된 노래 실력이 성에 차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그렇다고 이걸 이렇게 정면에 대놓고 얘기를 한다고?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뭔지 정말 거침이 없었다.
놀라긴 했지만 딱히 오글거린다거나 버릇없다는 감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화조차 나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제 속내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점이 과감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열정과 열의가 부러울 정도로 빛이 났다.
뜬금없이 제 포부를 밝히는 일은 쉬운 게 아니었다. 그렇게 할 정도로 결심이 대단하다는 점은 높이 살 만했다. 물론 맹랑하게 느껴진다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또한 순순히 알겠다고 하고 싶진 않았다.
“와, 깜짝이야.”
심은찬이 한 손으로 제 가슴을 짚으며 과장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현우영의 눈을 응시한 채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