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61)

#10

서로 인사를 나누며 말을 트는 것까지 본 김선주의 얼굴이 한결 안도하는 것처럼 바뀌었다.

“오늘은 오프 일이니까 다들 좀 쉬어. 필요한 일 있으면 전화 바로 하고. 알았지?”

“형 저희 연습실은 오늘 써도 되죠?”

“연습실?”

뜬금없이 던진 심은찬의 질문에 김선주가 눈을 크게 떴다. 김선주가 확인하듯 재차 물어보았기에 심은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연습 좀 할까 하고요.”

“오늘? 안 쉬고?”

“몸을 움직여야 쓸데없는 생각 안 들잖아요.”

그럴듯하게 대답하긴 했지만 솔직히 너무 예전이라 안무를 잊지는 않았을까 싶어 확인을 해 보려는 속셈도 있었다.

“나랑 같이 가, 은찬아. 내가 봐줄게.”

문세별의 목소리에 심은찬도 내심 놀라긴 했다. 문세별이 이렇게 바로 연습을 봐준다고 나설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몇 년간 알고 지낸 사이이긴 했으나 이 정도로 회복 탄력성이 좋을 줄은 몰랐다. 심지어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 몸에 부담이 될 텐데도 말이다.

문세별이 나서자 다른 멤버들도 연습실에 같이 가겠다고 말해 왔다. 그때였다.

“저도 같이 가 봐도 될까요?”

모두의 시선이 현우영에게 꽂혔다.

“신곡 안무를 배우고 싶어서요. 아, 물론 실례가 아니라면요.”

“실례는 무슨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현우영이 조심스럽게 덧붙이는 말에 문세별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웃으며 당장 승낙했다.

원래부터도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약한 문세별이었기에 지금 현우영의 말이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음이 분명했다. 현우영을 보는 문세별의 눈빛이 대번에 따뜻해졌다.

일련의 상황을 지켜보던 김선주의 입가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걸렸다. 기특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는 듯한, 여러 가지 복잡미묘한 미소였다.

잠자코 있던 김선주가 입을 열었다.

“메인 연습실 말하는 거지? 당근 언제 쓰든 괜찮지. 알잖냐, 너네가 우리 회사 외동 아이돌인 거.”

“……아, 형. 당근이라뇨.”

“당근? 당근 왜.”

“형 연배를 알 수 있는 말이라서 그랬어요.”

“연배애?”

문세별이 질색하는 얼굴로 장난치자 김선주가 평소보다 과하게 발끈하는 반응을 보였다.

심은찬은 그 틈을 타서 사 가지고 온 숙취 해소제를 멤버들에게 건넸다. 다들 반가운 기색으로 음료를 받아 들고 한 번에 꿀꺽꿀꺽 마셨다.

“우리 팀이 원래 이렇지 않은데 어제는 일이 좀 있어서, 술을 좀 마셨어.”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숙취 해소 음료를 마시는 상황이 영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정민유가 어색하게 웃으며 현우영에게 말했다. 정확한 설명을 한 건 아니지만 대강 알아들은 듯 현우영은 “아니에요.” 하고 대답하며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연습실까지 태워다 줄게.”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어. 나 잠깐 기다려. 바로 준비하고 나올게.”

“아- 류서오. 그러니까 아까 씻으라고 했더니 뭐 했냐.”

대화를 듣고 있던 류서오가 빠르게 화장실에 들어갔고 그 등에 대고 문세별이 야유했다.

생각지도 않게 대인원이 연습실로 향했다. 처음 의도는 그냥 혼자 가서 조용히 춤 연습이나 해 볼까, 하는 거였는데.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어쨌든 빨리 합을 맞춰 보는 게 도움이 되면 됐지 더 나빠지진 않을 테니까.

심은찬은 도준서를 흘끔거렸다. 아직 제대로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긴 했지만 더 이상 심은찬이 뭘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평소보다 빠르게 모든 멤버가 준비를 마치고 연습실로 향했다.

철제문을 밀고 들어가자 연습실 안의 정체된 냉한 공기가 밀려왔다. 추위에 약한 심은찬이 몸을 부르르 떨며 겨우 신발을 갈아 신은 채 거북이처럼 패딩에 얼굴을 묻었다.

난방 장치를 켰지만 날이 원체 추웠기 때문에 따뜻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 시간을 기다릴 바에야 차라리 몸을 움직여 땀을 내는 게 더 빠를 거다.

“그렇게 추워서 어떡하냐. 그러니까 살 좀 찌우라니까.”

“…….”

너무 추워서 입을 열 기분도 나지 않았다. 패딩을 입었는데 왜 이렇게 추운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온도는 영하 몇 도일까. 체감상으로는 한 영하 20도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심은찬은 마치 그대로 한 그루의 나무가 된 것처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라디에이터 앞에 딱 붙어서 가만히 있었다.

겨울은 심은찬에게는 너무 힘든 계절이었다. 입술을 부르르 떨고 있는 심은찬을 도준서가 뒤에서 끌어안아 주었다.

“살 좀 찌우라고. 다이어트한다고 그러지 말고. 근육 좀 키우든가. 그럼 추위 좀 덜 탈 텐데. 어?”

“근, 근육은 무슨. 운동 싫어.”

“또 그래.”

도준서가 몸을 좌우로 흔들자 그에게 끌어안겨 있던 심은찬도 이리저리 휘청였다. 조금 전까지는 아무 말 없이 있다가 갑자기 이렇게 치대 왔다. 원래도 동갑이라 친하긴 했는데 오늘따라 유난스럽긴 했다.

어색함을 이런 식으로 없애려는 도준서의 버릇이었다.

심은찬은 그가 현우영 쪽으로 고개를 잘 돌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멤버 투입을 통보받은 당일 그렇게 바로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기는 힘들 테지. 이해를 못 하는 바도 아니고 탓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속도가 있다는 걸 심은찬은 모르지 않았다.

심은찬은 머리를 움직여 제 어깨 위에 올려져 있는 도준서의 머리를 가볍게 콩콩 들이받았다.

“아야. 아이고 나 죽어.”

과하게 엄살을 부리며 도준서가 연습실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준서 일어나. 은찬이는 겨울마다 힘들어하네. 보약 한 채 지어 줘?”

정민유가 다가와 도준서를 일으켰다. 다들 춥지도 않은지 겉옷을 벗은 채 한창 준비 운동 중이었다. 심은찬은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저는 조금만 이러고 있을게요.”

“옷 타지 않게 조심하고.”

“넹.”

바로 대답을 하던 심은찬은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주인공은 현우영이었다. 그 역시도 두꺼운 겉옷을 벗고 몸을 풀고 있었는데, 그러면서 심은찬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뭘 봐. 추워하는 사람 처음 보나.

추위처럼 거칠어진 마음으로 현우영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을 두 번 깜빡일 동안 머물러 있던 현우영의 시선이 곧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우리가 먼저 출 테니까 우영이는 한번 보고 있어.”

“예. 알겠습니다.”

“은찬이도 이젠 얼른 와서 서자.”

“네-.”

더 이상 춥다고 라디에이터에 붙어 있을 수도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느릿하게 패딩을 벗는 심은찬에게 다가온 문세별이 옷을 잡아당겨 한꺼번에 벗겼다. 으악, 비명을 지르며 몸을 부르르 떨던 심은찬은 대열에 맞춰 섰다.

곡 제목은 Get Ambitious. 장르는 뭄바톤 트랩으로 메인 보컬인 도준서의 애절한 목소리로 곡이 시작했다.

-기억 속 너는 얼음처럼 ambitious

등을 돌리고 서 있는 다섯 명 사이에서 걸어 나온 도준서가 파트를 끝내고 대열에 합류하면서, 여섯 멤버는 무거운 비트에 맞춰 군무를 시작했다.

스텝도 어렵고 동작 하나하나 자잘하게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이 많았다. 이번 앨범에서는 한번 제대로 보여 주겠다며 이를 갈았던 문세별이 욕심껏 꾸민 안무는 난도가 제법 높아 익히기 어려웠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 심은찬은 안무를 만족스러울 정도로 완전하게 익히지 못한 상태에서 무대에 올랐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나 지금에 와서 다시 떠올려 보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저 최선을 다했다고 여겼을 뿐이었다.

심은찬은 성형 실패의 영향으로 춤에 제대로 집중을 하지 못했고 메인 댄서인 문세별도 그런 그를 강하게 코치하지 못했었다.

지난 기억을 더듬던 심은찬은 오랜만에 맞춰 보는 안무에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고 그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애석하게도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든가 하는 기적 같은 일은 없었다. 물론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건 아니었지만 구멍이 숭숭 뚫린 것처럼 띄엄띄엄 떠올라 간신히 따라가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처참한 수준이라니. 미리 확인할 겸 안무를 맞춰 봐서 다행이다.

아직 발표한 곡도 아니라 미리 안무를 확인할 방법도 없고 결국 멤버들과 합을 맞춰야 했는데 어설프게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차라리 못하는 걸 대놓고 밝히는 게 나았다. 깨질 거면 미리 깨지는 편이 낫다. 감추다가는 도리어 상황이 악화될 뿐이니까.

자꾸만 동작이 틀리거나 반 박자 늦는 심은찬을 문세별이 매의 눈으로 흘긋거렸다. 처음에는 엄하던 표정이 안무가 틀리는 횟수를 거듭해 갈 때마다 ‘무슨 일이 있나’하는 것으로 바뀌어 갔다. 다른 멤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은찬을 보는 눈빛에 의아함과 걱정스러움이 담겨 갔다.

다행스러운 건 현우영에게 안무를 전체적으로 한번 보여 주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멈추지 않고 완곡까지 갔다는 점이었다. 만약 심은찬이 틀릴 때마다 멈췄다면 몇 시간 후에나 끝났을 터였다.

현우영과 시선이 마주쳤다. 어이없어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도 그렇겠지. 만약 입장이 바뀌었다면 심은찬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을 거다.

창피한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창피함을 이유로 도망치고 덮어 두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회귀를 왜 했는데.

그렇게 하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심은찬은 이를 악물고 안무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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