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만약 제 나이대의 심은찬이었다면 이런 걸 느낀 순간 기분 나쁘다는 티를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팍팍 냈을 거였다. 특히나 이해민의 탈퇴로 상태도 안 좋았던 그였다면 100% 확률로 띠꺼운 반응을 보였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멘털 보정도 있고 27살까지 살았던 기억도 있다. 그런 제 나이에 비하면 20살의 현우영은 정말 머리에 핏기도 안 가신 어린애였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19살, 즉 미성년자였으니 말이다.
어린 나이에는 이럴 수도 있지. 암.
아량이 넓은 어른처럼 생각하다가도 또 삐죽하니 튀어 올랐다.
하긴, 그래. 능력치가 좋다고 했지 성격까지 좋다고는 안 했으니까.
심은찬은 턱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근데 캣닙 효과 적용 중인 게 맞아? 지금 반응을 보면 적용이 안 된 것 같은데. 분명히 호감이 있는 상태에서 시작한다고 하지 않았나. 적용을 해도 저 정도인 건가. 알 수가 있나.
심은찬은 제 상태 창을 확인해 봤다.
[특성:회귀자(??), 말랑한 강철(멘털 강화 효과/SS), 인간 캣닙(호감도 강화 효과/S−) 활성화 중.]
확실히 제대로 적용되어 있는데.
답답했지만 확인할 수가 없었다. 너무 일방적인 거 아닌가. 시스템에서 원할 때만 접촉이 가능하다니 불공평하다. 무슨 포인트라도 모아서 연락이 가능했다면 좋았을 텐데. 뭐 물어보고 싶을 때 어떻게 할 수도 없고.
불만스러워진 심은찬은 입술끼리 부딪치며 작게 소리를 냈다.
심은찬은 자기가 현우영보다 연상인데 너무 심술을 부렸나 싶었다. 그러나 현우영 멘털도 S급이었으니 조금 전 자신의 말에 뭐 별다른 타격도 없었을 거다.
뒤끝을 약간 남긴 심은찬이 흘깃 현우영 쪽으로 눈을 돌렸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제 시선이 느껴졌나 싶어서 심은찬은 눈매를 접어 아래로 늘어뜨리며 웃었다. 팬들에게 세상 무해하다고 평가받는 눈웃음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한데 현우영은 그런 심은찬의 웃음을 다르게 해석한 모양인지 당장 의구심 가득한 얼굴로 바뀌었다. 얼굴에 딱 쓰여 있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냐.’고. 그런 반응이 결국 나이는 못 속이는구나 싶어서 귀엽고 우스워졌다.
무게를 잡는답시고 무표정하게 있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젊은 혈기를 못 이기는 모습이 귀여워 결국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하하, 웃는 심은찬의 웃음소리에 현우영의 눈썹이 잠깐 위로 올라갔다.
“은찬아? 둘이 무슨 재미있는 얘기를 하고 있길래 웃어?”
웃음소리에 김선주가 목소리를 크게 해서 말을 걸었다. 백미러로 바쁘게 뒤의 분위기를 살피는 김선주의 눈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형. 그냥 자기소개 하고 있었어요. 앞으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렇죠?”
“예.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저, 저. 지기 싫어하는 것 좀 봐.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하는 현우영은 어느 모로 보나 평범한 놈은 아니었다.
“와. 진짜요. 마음이 맞네요.”
다시 한번 활짝 웃는 심은찬을 빤히 보던 현우영이 이번에는 먼저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숙소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중간에 신호에만 걸리지 않았다면 아마 더 빨리 도착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맨션 입구에 서 있는 정민유가 보였다. 날도 추운데 왜 나와 있나 싶어 의아해하다가 곧 이현종이 그에게 연락을 넣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안에서 기다렸어도 됐는데 굳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데서 정민유의 성실함이 보였다.
“선주 형 오셨어요. 팀장님한테 연락받았어요.”
“어, 어어? 으음, 그래. 그, 여기 이 친구야. 이쪽이 정민유, B the 1의 리더야. 그리고 이쪽이 새로 합류할 현우영이고 20살이야.”
“네. 안녕하세요. 어, 정민유라고 합니다. 그냥 민유 형이라고 해도 되고 말……, 을 편하게 할게. 너도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 우영아 만나서 반갑다. 잘 부탁해.”
“안녕하세요. 현우영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민유 형.”
꾸벅 허리를 숙인 현우영은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야, 추운데 안으로 빨리 들어가자.”
김선주가 양손을 비비며 말했다. 심은찬이 정민유의 팔 부분을 툭툭 두드렸다.
“형 춥죠. 귀 완전 빨개요.”
“아니, 정신 차리기 딱 좋았지. ……이그.”
정민유가 심은찬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사무실로 가서 아무 예고 없이 상황을 맞닥뜨린 심은찬에 대한 안쓰러움이 물씬 든 모양이었다. 그 마음이 전해져 심은찬은 가만히 웃기만 했다.
정민유도 결코 많은 나이가 아님에도 저보다 더 어린 심은찬을 챙기려는 게 짠했다. 지금 정민유의 나이가 겨우 23살이었다. 정민유 본인도 한창 정신이 없을 때인데 저보다 어린 동생들 챙긴답시고 제 나이보다 더 어른스럽게 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멤버들 챙기랴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다스리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등허리를 툭툭 두드리는 심은찬을 돌아보며 무슨 일이냐고 묻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숙소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실에 모여서 앉아 있던 멤버들의 시선이 쫙 모였다.
“형 오셨어요.”
“문 여니까 추운 것 봐. 민유 형 같이 기다리자니까. ……어?”
“……누구……?”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 낀 낯선 얼굴에 멤버들의 목소리가 음소거 버튼을 누른 듯 일시에 잦아들었다. 바쁘게 주고받는 시선에 담긴 의미가 너무 잘 보였다. 하기야 일반인이라고 하기엔 현우영이 뿜어내는 기운이 범상치가 않았다. 비율부터 시선을 잡아 끄는 데다가 얼굴이 정말 잘생겼던 탓이다.
“그게요,”
“자, 소개할게. 이쪽은 현우영이고 새로 합류할 멤버야. 인사들 해라.”
먼저 입을 열었던 심은찬보다 큰 소리를 내며 김선주가 선수를 쳤다. 순간 그 공간이 얼어붙기라도 한 듯 완전히 조용해졌다. 지금이라면 바늘을 떨어트려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현우영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도준서였다.
“합, 합류요? 언, 언제부터요? 지금요?”
충격이 너무 커서인지 말도 더듬기 시작했다. 류서오는 입을 꾹 다문 채 다른 멤버들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고 문세별의 반응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저희, 저희 이제 7집 싱글 내는데, 지금 합류요? 지금, 아니, 어제, 해민이가 어제, 저기, 선주 형. 이건, 이거는 아닌 것 같은데요.”
말을 하면서 점점 감정이 격해지는 게 보였다. 결국 심은찬이 나서서 도준서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의 반응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당사자인 현우영이 바로 앞에 있는데 보일 만한 건 아니었다. 말은 생각보다 기억에 잘 박혀 들어 빠지지 않는 가시와도 같다. 안 좋은 말을 굳이 듣게 할 필요 없었다.
“야, 왜에.”
“나도 오늘 우연히 알게 된 건데, 내가 바로 얘기하자고 했어.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면 빨리 맞닥뜨리고 적응하는 게 나을 테니까.”
“뭐?”
심은찬의 설명에 도준서의 눈이 대번에 사나워졌다. 그때 바로 현우영이 입을 열었다.
“늦게 들어온 만큼 열심히 하겠습니다.”
고막에 바로 때려 박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모두의 시선이 현우영에게 쏠렸다.
“실망하시지 않도록 노력할게요.”
현우영의 눈빛은 고요하지만 강렬했다. 바로 조금 전에 그의 나이를 알게 된 다른 멤버들은 선뜻 나서서 말을 하지 못했다.
“일단은 우영이 합류는 결정이 된 거니까, 얘들아. 좀 힘들겠지만 잘해 보자.”
상황을 마무리 짓는 정민유의 말에 도준서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벙긋거렸지만 현우영 쪽을 보며 한숨을 내쉬는 걸로 마무리 지었다.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뭘 어떻게 할 수 없었다. 한 사람이 반대를 하고 나서면 그러잖아도 엉망인 팀 내 분위기가 더욱더 최악을 향해 치달을 게 분명했다. 그런 일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기분을 우선시하며 막 나가는 멤버는 없었다.
다시 한번 인사를 나누고 있었지만 묘하게 침체된 분위기를 타개할 수는 없었다. 멤버들을 보던 김선주가 말문을 열었다.
“해민이 탈퇴는 조만간 공지로 올릴 거다. 우영이가 합류하는 건 이번 7집 싱글 컴백 전까지는 극비로 할 거야. 스케줄은 예정대로 하고 자콘 촬영도 그대로 진행하면 돼.”
심은찬은 김선주의 설명을 들으며 이전 생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공지는 얼마 뒤에 녹화 예정이 잡혀 있는 아이돌 올림픽 대회 전에 올라갈 거다. 녹화가 시작되면 공개적으로 이해민이 빠져 있다는 사실이 드러날 텐데 소문이 이상하게 날 바에야 그전에 제대로 된 공지를 한 거다.
이해민의 탈퇴 사실을 공지로 올리면서 그나마 한 줌인 팬덤 내에서 일대 소란이 일어난다. 소년 가장이 나갔으니 가정이 무너지는 거 아니냐는 우려와 조롱을 받으며 묵묵히 스케줄을 소화했었다. 그래서 더욱 자신이 나서서 뭔가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궁지에 몰렸던 그 기억이 또렷했다.
한발 좀 떨어져서 상황을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이야 태연하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전신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그저 괴롭기만 할 뿐이었다. 심은찬은 씁쓰레한 기억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