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그냥 걸어갈 거냐는 정민유의 질문에 숙소에서 걸어서 10분 정도면 도착하는 거리니까 괜찮다고 대답하며 문을 밀어젖혔다. 그러나 직후 심은찬을 맞이하는 찬 공기에 바로 후회가 밀려들었다.
심은찬은 추위에 약했다. 매우. 아주. 대단히 말이다.
“…….”
걸어갈 수 있을까.
800미터 남짓한 거리에 불과한데도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패딩 지퍼를 목 끝까지 채웠지만 그래도 뼛속까지 추위가 파고들어 오는 것 같았다. 숨을 쉴 때마다 코끝이 얼어붙는 것 같아서 숨을 멈춰 보기도 했지만 몇 발자국 가지 못해 호흡을 내뱉었다. 참으로 멍청한 행동이긴 했지만 추위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뽀얀 입김을 보고 있자니 더욱더 추워지는 것 같았다.
빠르게 걸음을 옮겨 가까스로 도착한 심은찬은 작은 빌딩의 1층 문을 힘껏 열고 들어갔다. 안내 데스크에서 평소 인사를 하고 지내던 직원이 심은찬의 갑작스런 방문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맞이했다.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며 전화를 한 직원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안에서 빠른 걸음으로 매니저 김선주가 걸어 나왔다. 무슨 일로 왔냐고 물어보는 그에게 심은찬은 생각했던 말을 꺼냈다.
“저한테 들어온 대본요. 그거 할게요, 형.”
“어? 아, 그거. 그거……, 그거. 그래. 일단 네 생각은 알았어. 대표님께도 말씀드려 놓을게. 나가자.”
떨떠름해하며 대답하는 김선주에게 심은찬이 다시 한번 말했다.
“할 거예요. 역 비중이 좀 적긴 하지만 괜찮아요. 그거 때문에 안 하기에는 아까워요, 형.”
심은찬의 열렬한 의사 표시에 김선주가 약간 얼떨떨하기까지 한 표정을 지었다.
해야 했다. 놓칠 수 없었다.
<초승달 피는 여름밤 하늘 꽃>은 결국 개성 있고 완성도 높은 드라마로 유명한 NVN에서 전파를 타게 되고, 최고 시청률 11.2%로 NVN 방송 역대 드라마 시청률 4위라는 놀라운 기록을 내게 된다. 덕분에 드라마의 주연을 비롯해 조연들까지 많은 인기를 얻는 결과를 만든다.
심은찬은 그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러니 더욱더 놓칠 수 없었다.
“저 진짜 하고 싶어요. 잘 할 수 있어요.”
“야, 은찬아. 알겠으니까. 그래, 내가 나중에 말씀드릴 테니까 우선 숙소로 돌아가서 있어. 아니다, 내가 데려다줄까? 그러자. 일단 나가자.”
계속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김선주의 태도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한 사무실을 둘러보며 심은찬이 물었다.
“근데, 누구, ……무슨 일 있어요?”
“어? 뭐가? 아-. 손님. 손님 오셔서! 좀 조용하지?”
심은찬은 애매하게 말을 돌리는 김선주를 가만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손님이 왔다고 심은찬을 밖으로 내보낼 이유가 무엇일까. 심은찬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이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었다.
“뭔데요?”
“응? 뭐가 뭔데?”
“저 눈치 빠른 거 아시죠. 말씀해 주세요. 손님이라고 하신 분이 저희랑 관련 있는 분이세요?”
지그시 응시하는 시선에 김선주가 잠깐 낭패한 기색을 보이며 얼굴을 찡그렸다. 잠시 주저하는 기색을 보이던 김선주는 “그래, 너네도 결국 알아야 하니까.” 하고 한숨 쉬듯 중얼거렸다. 김선주는 결심이라도 한 듯 단단하게 틀어쥔 입매를 움직였다.
“……해민이 나가고 거기에, 음, 그러니까, 새 멤버를 영입할 것 같다.”
김선주가 심은찬의 안색을 살폈다.
심은찬은 순간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새 멤버요?”
“어, 확정된 건 아니고…….”
이전 생에서는 없던 일이 발생했다는 의아함에 미간을 찡그린 심은찬의 반응을 달리 해석한 건지 김선주가 황급히 덧붙였다. 심은찬은 애매하게 말끝을 흐리는 김선주가 잠깐 사무실 한쪽을 쳐다보는 걸 놓치지 않았다.
새 멤버가 여기에 있는 거라면 여태까지 심은찬을 자꾸 밖으로 데리고 가려 했던 김선주의 행동을 납득할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김은찬의 방문에 얼마나 놀랐을까 생각해 보니 그의 고충도 이해는 됐다.
네에, 하고 대답하던 심은찬의 머리에는 미션 횟수가 5번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B the 1의 멤버가 심은찬 자신을 제외하고 4명인데 왜 미션은 5번일까 의아했는데 이걸 의미한 걸까. 그렇다면 말이 됐다.
하지만 말이 됐기에 말이 안 됐다. 심은찬이 회귀하는 시점에서는 어쨌든 B the 1의 멤버 수는 4명이었는데 말이다.
설마 알림 창은, 알림 창을 띄운 존재는 이런 것도 알고 있었다는 얘긴가?
심은찬은 솟아오르는 의구심을 일단은 꾹꾹 누르며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마냥 웃었다. 지금 자신의 궁금증을 현실의 그 누구도 풀어 줄 수 없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생각해도 답이 없고, 그렇다면 굳이 전전긍긍 매달릴 필요가 없었다. 골몰하는 걸로 문제가 해결되는 일이라면 몇백 번이고 할 테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가능성의 문제였다.
“저기, 은찬아. 형이 숙소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우선 나갈까?”
“괜찮아요. 슬슬 걸어가면 걸어갈 만한 거리고요.”
“아니, 그래도.”
상황을 파악하고 나니 김선주의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데뷔 때부터 함께했었기 때문일까. 김선주는 유독 그렇게 멤버들 한 명 한 명을 아꼈다. 너무 신경을 써 주니 도리어 언젠가는 소개받을 건데 이렇게 된 거 그냥 소개해 달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가 꿀꺽 넘어갔다. 소속사에서 생각한 시기가 있을 테니 지금은 적당히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였다.
마치 짜맞추기라도 한 듯이 사무실 안쪽에 있는 회의실 문이 열렸다.
“그러면 그렇게 알고 조만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할게요.”
“예.”
맨 처음 나오는 매니저의 뒤에 키가 훌쩍 큰, 누가 봐도 저건 연예인이다 싶은 얼굴이 보였다. 이해민의 반짝거리는 외모에 단련된 심은찬조차도 저 얼굴로 연예인 아니라고 하면 농담하지 말라는 말이 자동 반사적으로 나올 정도다.
눈썹도 짙고 정갈하니 예쁘게 자리 잡았고 쌍꺼풀이 있는 눈은 정말 크고 깊었다. 코 역시도 너무 오똑해서 자연 음영이 생길 정도였다. 입술도 뭘 바른 걸로 의심될 정도로 붉고 도톰했는데 정말로 현실감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손가락으로 문대 놓은 거라면 현우영은 혼자만 도장으로 쾅 찍어 놓은 것 같은 또렷한 이목구비를 자랑하고 있었다.
특히나 얼굴도 얼굴이지만 저 비율. 마치 그래픽 툴로 수정해 놓은 것 같은 비현실적인 비율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이돌만이 아니라 연예인을 할 때 제일 중요한 게 바로 비율이다.
얼굴은 나중에 다듬을 수 있고 춤이나 노래 역시 주입하면 어느 정도 결과물을 낼 수 있지만 유일하게 후천적으로 만들 수 없는 게 바로 비율이다. 눈앞에 나타난 남자는 바로 그 비율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이런 애가 아이돌을 하지 않는다면, 이런 인재를 데뷔시키지 못한다면 기획사를 할 능력이 없는 거였다.
옆에 있던 김선주의 얼굴에 망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어? 어?? 어……. 은찬이 왔냐.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이현종 팀장이 뒤에 서 있는 김선주와 눈으로 말을 주고받는 게 보였다. 심은찬은 태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드라마 꼭 들어간다고 말씀드리려고 잠깐 들렀어요. 산책도 할 겸요.”
“어……. 그래.”
심은찬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다는 걸 알아차린 이현종이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어차피 인사할 테니까 이참에 해 버리자. 이쪽은 B the 1의 멤버 심은찬. 그리고 이쪽은 이번에 새로 영입하게 된 새 멤버 현우영이야. 나이는 은찬이 너보다 한 살 어려.”
역시나.
심은찬은 제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숨을 들이마셨다.
방금 소개를 받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현우영을 쳐다보았다.
한 살이 어리면 지금 스무 살이라는 얘기였다.
심은찬은 자연스럽게 눈앞에 서 있는 현우영을 훑어보았다. 실례라는 걸 알지만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몇 번을 봐도 얼굴도 작고 비율도 장난 아니었다. 비율이 좋으면서 다리도 길어서 저 위치에 허리가 있는 게 맞나 싶을 정도였다.
지금 인간 캣닙 효과가 적용 중이니 이 자리에서 처음 만난 현우영 역시 자신에게 호의적일 게 분명하다.
심은찬은 현우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방금 소개받은 심은찬입니다.”
“현우영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목소리도 좋다.
어지간하면 말하는 목소리와 노래하는 목소리가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심은찬은 현우영이 노래를 하면 분명히 대박일 거라고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대체 능력치는 어느 정도일까 하는 궁금증이 봉투에서 꺼내는 비엔나소시지처럼 연달아 떠올랐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타인의 상태 창을 확인할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입술만 살짝 달싹거리는 정도로만 상태 창을 중얼거렸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현우영의 머리 위로 반투명한 상태 창이 떠올랐다.
[이름: 현우영
스타성: S
가창력: A
퍼포먼스: A
외모: S
멘털: S
특성: 신이 사랑한 사람(특별한 재능/SS), 너…… 그런 거 좋아하니?(독특한 심미안/A) 활성화.]
와.
축캐다.
축캐의 현신이 눈앞에 나타났다.
능력 등급도 그렇고 특성마저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굉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