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멤버들의 능력치를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지금 당장 급한 건 아니었다. 게다가 하루에 한 번 가능하다고 하지 않았나. 좀 더 요긴하게 쓸 수 있을 때가 있을 터였다.
“앉아.”
화장실에서 나온 심은찬에게 도준서가 몸을 슬쩍 옆으로 움직이며 말했다.
이해민이 빠지고 다섯이서 동그랗게 모여 앉은 자리에서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모두의 표정은 심각했다. 앞으로 어떻게 활동을 해야 하나 막막해진 탓이다. 아직 이해민의 탈퇴 사실이 공식적으로 나오진 않았지만 시간문제였다. 그건 어차피 활동을 하면서 거쳐야 할 관문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당장 준비하던 싱글 7집 녹음도 다시 해야 할 판이었다.
가뜩이나 음반 판매 성적도 좋지 않은데 과연 기획사에서 이걸 해 줄 것인가에 대해 회의적인 분위기가 팀을 지배했다.
확실히 그랬다.
심은찬 역시 이전 생에서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해민 팀 탈퇴 이후 갖게 된 팀 재정비 기간 동안, 팀 리더였던 정민유 역시 군 입대와 동시에 팀 탈퇴를 하게 되면서 분위기는 더욱 최악으로 치달았다. 보통은 그 정도까지 가게 되면 팀으로는 이제 끝났다고 여기고 흐지부지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포텐하이의 사장은 생각보다 더 뚝심 있는 사람이었다.
이후로 텀은 좀 길긴 했지만 B the 1은 기획사의 지원을 받아 공식적인 싱글 앨범을 9집까지 발매했다.
시간이 갈수록 망가져 갔던 심은찬의 멘털과는 별개로 그 정도로 밀어주긴 했다는 말이었다. 앨범 한 장 낼 때마다 드는 돈이 적은 것도 아니고, 그 점에 있어서는 소속사 사장이 정말 존경스러웠다.
심은찬은 모여 앉은 멤버들을 살펴보았다. 다들 굳은 표정을 한 채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 없었다. 하나같이 무거운 공기가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표정들이었다. 이래서야 이렇게 모인 의미가 없었다.
누군가는 침묵을 깨야 한다. 심은찬은 자신이 총대를 메기로 했다.
“형, 일단…….”
심은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 7집 재녹음해야 할 것 같은데 해민이 파트 제외하고 어떻게 재분배할지 생각해 보죠.”
다섯 쌍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심은찬 쪽으로 몰려들었다.
“……해민이가 돌아올 걸 기대할 수는 없고, 저희 선에서 저희가 할 수 있는 걸 해 봐야죠.”
상체를 슬쩍 뒤로 물리며 멤버들의 표정을 살폈다. 예상대로 심은찬의 말에 다들 심란한 얼굴이었다. 잠깐의 침묵 끝에 정민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말이 맞는다. 그 말이 맞아.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
정민유는 흔들리던 멘털을 다잡는 듯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그 말을 기점으로 다른 멤버들 역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좀 심란한 얼굴이 남아 있긴 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걸 하자.’는 심은찬의 말에 마음이 움직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중 문세별이 아직 제대로 납득하지 못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이것 역시 예상했었다. 문세별이 정이 많은 편인 데다 유달리 이해민을 아꼈었기 때문이다.
심은찬이 문세별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걸었다.
“세별이 형, 저희 안무 동선도 다시 짜야 하지 않을까요?”
“어? 어, 그렇지. 한 명이 빠지니까.”
“나중에 안무 선생님께서도 비디오를 주실 것 같긴 한데 미리 생각해 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요.”
심은찬의 말에 멍하던 문세별의 눈동자가 제대로 돌아왔다.
안무가에게 안무를 사 오기도 하지만 춤에 조예가 있는 문세별 덕분에 기본적으로 팀 내에서도 해결하기도 했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맘을 잡지 못하던 문세별의 눈앞에 실질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를 들이미니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확실히 이런 상황에서 제정신을 붙잡는 사람이 더 이상하긴 했다. 정신력이 약하면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많다. 그걸 생각한다면 자신에게 멘털 쪽 능력치가 붙은 게 퍽이나 다행이었다.
멤버들끼리 파트 분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던 심은찬이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매니저 형이랑 얘기 좀 하고 올게요.”
“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하는 심은찬의 말에 멤버들이 쳐다보았다.
“드라마 대본 들어온 거요.”
“아. 그거.”
내 인생이 내리막길로 굴러 들어가기 시작했던 가장 첫 번째 사건이다.
이해민이 계약 해지를 하기 얼마 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첫사랑 걔’로 이름이 알려진 심은찬 쪽으로 드라마 대본이 들어왔었다.
드라마 제목은 <초승달 피는 여름밤 하늘 꽃>.
처음 들었을 때 굉장히 시적이라고 생각한 제목이었다. 장르는 판타지 사극으로 화랑이 나오긴 하지만 작중 배경은 어디까지나 가상이었다. 판타지라는 말에 걸맞게 역사적 사료나 고증은 이용만 당할 뿐인 드라마였다.
여주인공은 자신의 혈육이 살해되어 그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남자들만 받는 조직인 화랑에 남장해서 잠입하게 되고, 그러면서 사건을 해결해 나간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과 얽히면서 살인 사건도 해결하고 폐지된 원화 제도를 다시 세우며 사랑도 이룬다는 내용이었다.
변방 아이돌인 자신에게까지 대본이 돌아온 점을 의아하게 여기기도 했지만 대본을 읽는 사이 의문이 해소되었다.
화랑이라는 배경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남자 주인공을 제외하고 메인으로 나오는 남자 조연은 3명이었는데, 아직 그리 이름을 알린 배우들은 아니었지만 하나같이 잘생긴 사람들뿐이었다.
그 모두가 여주를 흠모하는 걸로 나오며 중반까지 누가 남주인지 명확하게 보여 주지 않는다. 남주 찾기라는 요소는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유발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특히나 심은찬이 제의받은 배역인 연운은 조용하고 수줍은 성격 때문에 말수가 없는 역이었기에 딱히 큰 연기력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여기까지만 하면 다들 대체 왜 이런 드라마의 출연을 고사했을까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살펴봐도 문제점을 알 수 있었다.
일단 드라마의 방영 스케줄을 알 수가 없고 방송 계약이 어디와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지상파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게 케이블일 수도 있었고 혹은 OTT일 수도 있었다. 또는 계약이 되지 않아 촬영한 걸 싹 날려 버릴 수도 있었다. 고생하며 촬영한 드라마가 제대로 선보이지 못하고 묻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자체가 출연을 거절하는 제일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리고 그다음 문제는 연운이라는 배역 그 자체에 있었다.
일단 출연 신 자체가 다른 3명에 비해서 상당히 적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여주와 직접 부딪치는 신 역시 적었다. 대본을 보면 여주인 우하연보다 조연인 서길영과 붙어 있는 장면이 더 많다 보니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기회 역시 상대적으로 적었다.
한마디로 머릿수 채우는 느낌으로 출연한다는 걸 감수해야 한다는 거다.
심지어 아이돌인 심은찬이 처음으로 정극에 도전한다는 점도 소속사에서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 잘하면야 물론 좋은 결과가 있을 테지만 못했을 때는 발연기한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아이돌이 욕심을 부려 다른 장르로 쉽게 발을 담근다는 차가운 시선도 감수해야 했는데 그 부담을 전부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 포텐하이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이전 생에서 심은찬은 출연을 결정했다.
애초부터 B the 1이 일을 골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솔직히 이해민의 탈퇴로 팬덤 이탈 현상이 보이는데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도 아니었다. 원래부터도 들어오는 일은 케이블이나 비인기 프로그램이나 뭐든 가리지 않고 다 승낙했다. 그리고 하나하나 전부 열심히 임했다. 그만큼은 자신할 수 있었다.
들어오는 일은 그게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는 간절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간절함은 이해민의 계약 해지와 맞물려 안 좋은 방향으로 튀어 오르게 된다.
어떻게든 잘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그랬다. 심은찬은 촬영에 들어가기 전까지 한 달 정도 비어 있는 시간 동안 성형을 했다.
처음 제안을 받았다는 소식을 전달받았을 때부터 외모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던 것이 이해민의 탈퇴로 완전히 들끓는 냄비처럼 변했다. 배우들 사이에서 어떤 식으로든 시청자에게 인상을 남겨야 한다는 압박감에 흔들렸던 거다.
아무리 연기를 배웠고 연기 선생님에게 호평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심은찬은 어디까지나 아이돌이었다. 실제로 카메라 앞에서 연기해 봤던 건 명절 특집으로 편성된, 아이돌끼리 찍은 짤막한 단막극 정도가 전부였다.
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한 심은찬이 단기간에 배우들과 견줄 정도로 연기력을 늘릴 수 있을 방법이 있을 리가 없다. 드라마틱하게 뭔가 나아질 방법이 있다면 그건 외모밖에 없다는 판단 아래 그렇게 코 성형을 했고 결과는, 폭망이었다.
그 성형 실패 때문에 드라마에도 결국 출연하지 못했다.
이전의 일들을 머릿속에서 되뇌던 심은찬은 이를 꾸욱 사리물었다.
이번에는 절대로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거다.
저를 섭외해 준 제작사의 안목을 믿어야 했다.
날짜를 계산해 보니 아직 출연할 거라는 의사 표시를 하기 전이었다.
이해민 탈퇴를 이유로 출연 의지를 강하게 밀어붙였던 걸 떠올리며 준비를 마친 심은찬은 까만 볼캡을 쓰고 숙소 현관 문고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