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예전에 3개월 정도 했던 폰 게임을 떠올렸다. 그때 심은찬은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때부터 ‘망캐’라고 불리는 캐릭터를 뽑았다. 폰 게임을 처음 해 보는 거라 리세마라라는 것도 몰라서 그 캐를 가지고 그대로 진행을 했다. 그 이후 조금씩 포인트를 모아 무료로 할 수 있는 뽑기에서도 족족 망템과 망캐만 나왔었다. 나중에서야 제가 ‘똥계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뽑기가 잘 나오는 ‘축계’는 무료 10연차로 뽑는 것에서도 효율이 좋기로 유명한 캐릭터가 턱턱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허망했는지 모른다. 좋은 캐릭터로 시작을 하느냐 마느냐로 같은 게임의 난이도가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진다. 현실도 암울한데 게임에서마저도 이런 걸 겪어야 하다니.
과금 없이 노가다로 키운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에 여태 하던 캐릭터를 버리고 새 계정으로 갈아타는 것도 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게임을 계속 이어 갈 마음도 들지 않았다.
게임에서마저 운이 지지리도 없는 게 제 인생을 축소해 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가챠 게임은 그 게임을 끝으로 더는 하지 않았다.
하물며 지금은 게임도 아니었다. 망손인 제가 뽑았는데 안 좋은 거라도 나오면 어떡하겠는가. 그때는 돌이킬 수도 없다.
혹시라도 더 안 좋은 상황이 되지 않도록 여러 가지 고려를 해 본 후에 판단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져 보류하려고 했을 때였다.
[카드 선택 종료까지 남은 시간 30초.
*꽝 없음.
*좋은 거임. 안 뽑으면 님 손해.]
갑자기 제한 시간과 설명이 한 줄 더 생겨났다.
‘안 뽑으면 님 손해라니……. 제한 시간은 또 뭐야. 지금 바로 뽑으라고?’
없던 의심도 생겨나게 만드는 설명에 심은찬의 입안이 바싹 말라 왔다. 이게 정말 괜찮은 상황인가. 의구심과 불안감이 갑자기 덩치를 키워 심은찬을 짓눌렀다. 현기증이 생기듯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
버라이어티 예능에서 하는 급조된 게임도 이런 식으로는 진행하지 않는다. 등 떠밀리듯 제한 시간이 다 되기 전 심은찬은 급하게 카드 두 장을 골랐다.
똑같았던 20장의 카드 무늬가 천천히 바뀌기 시작했고 높아진 긴장감을 견딜 수 없어진 심은찬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여태까지 운이 없던 제 과거를 떠올려 보면 이번에도 영 신통찮은 카드를 뽑았을 것 같아 호흡이 가빠졌다. 뭐가 됐든 확인은 해야 했다. 입으로 호흡을 몇 번 한 심은찬이 결국 눈을 떴다.
“……!”
황금색이다!
심은찬은 제가 선택한 카드 색을 확인하자마자 빠르게 자신이 고르지 않은 카드들을 확인했다. 골드 카드라고 방심해선 안 된다. 나머지가 골드보다 더 등급이 높은 홀로그램일 수도 있다.
침을 꼴깍 삼킨 심은찬이 둘러보았다. 전체 20장의 카드 중 골드가 3장. 실버는 7장이었다. 그리고 그걸 제외한 나머지가 다 브론즈인 게 눈에 들어왔다.
제일 좋은 게 골드인 게 분명하다.
그리고 심은찬이 선택한 카드가 바로 그 황금색이었다. 그것도 두 장 전부가 말이다.
됐다. 제대로 골랐다.
저도 모르게 불끈 주먹을 쥐었다. 놀라움과 안도감에 심장이 펄떡거렸다.
곧 심은찬이 골랐던 카드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래처럼 바스스 사라졌다.
카드 한 장에서 빛이 나며 알림 창이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이거야말로 인생 역전> 카드를 고르셨군요!
사용 즉시 랜덤으로 능력치 하나를 최고 등급으로 만듭니다. 적용 완료.]
알림을 확인함과 동시에 머릿속을 어지럽게 뛰어다니던 잡념들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그래. 어차피 일어난 일 지금 와서 붙잡고 진짜냐 가짜냐 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당장 확인해야 할 사실에 집중하는 게 옳았다.
그렇게 잠잠해진 머릿속에서 의문 하나가 툭 솟아났다.
저 랜덤이란 건 뭘까. 이상한 능력치를 랭크업 시켜 놓고 그러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뭐 확인도 할 수 없고. 사기 치는 거 아냐……?”
심은찬이 불만스럽게 중얼거린 것과 동시에 새로운 알림 창이 떴다.
[본인 상태 창 상시 확인 가능.
다른 사람의 상태 창도 하루에 한 명, 한 번만 확인이 가능합니다.
‘상태 창’이라고 말해 주세요.]
……이 정도면 그냥 실시간 채팅을 하는 게 아닐까.
합리적인 의구심을 가진 채 심은찬이 작은 소리로 상태 창이라 말했다.
그러자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팝업으로 펼쳐지듯 했다.
[이름: 심은찬
스타성: A
가창력: B
퍼포먼스: B
외모: A
멘털: SS(보정 전: F)
특성: 회귀자(??), 말랑한 강철(멘털 강화 효과/SS) 활성화 중.]
“엥?”
……뭐야, 이건.
심은찬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건 외모 랭크였다.
A.
A였다.
두 눈을 크게 뜨고 깜빡거렸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잘해도 C 등급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A라니. 이거 뭔가 측정이 잘못된 게 아닌가 싶었다.
측정 기준이 대체 뭘까. 미심쩍어진 심은찬이 미간을 찌푸려 보았지만 답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쓰읍,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심은찬은 등급 보정이 된 항목을 찾기로 했다.
보정 전이라는 말이 붙은 걸 봐서는 골드 카드가 등급을 높여 준 건 멘털이었다. SS면 최고 등급 아닌가. 보정 전 등급이 F였던 걸 확인한 심은찬은 혀를 찼다. 멘털이 약한 걸 유리 멘털이라고들 하던데 이건 유리 정도가 아니라 두부, 아니 두부조차도 안 된 콩물 멘털 수준이었다. 한편으로는 저런 멘털로 잘도 아이돌 했었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등바등 열심히 버텼구나 싶어 스스로가 대견스럽기도 했다.
상태 창을 다시 한번 살피던 심은찬은 전반적인 제 능력치가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 A와 B면 객관적으로 봤을 때 괜찮은 수치다. 특히나 외모가 A라니. 다시 봐도 믿기지 않았지만 장난으로 매겨진 수치는 아닌 것 같았다.
근데 회귀자 뒤에 물음표는 뭐지. 측정이 불가해서 그런가.
거기까지 생각한 심은찬은 무심코 제 얼굴을 한번 쓰다듬었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아쉽긴 했다. 외모나 가창력, 혹은 스타성이나 퍼포먼스에 붙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어찌 보면 제일 시시해 보이는 능력치였기 때문이다.
“…….”
거기까지 생각한 심은찬은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능력치가 SS급이 됐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뭐든 하나라도 SS등급이 된 게 어딘가. 그래. 다른 능력치가 좋아도 멘털이 약하면 소용이 없을 거다. 저 말랑한 강철이라는 게 신경 쓰이긴 하지만 말이다.
굳이 저렇게 적힌 이유가 분명히 있을 터였다.
심은찬은 다음 골드 카드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남은 한 장의 카드 역시 먼젓번과 마찬가지로 환하게 빛나며 알림이 나타났다.
[축하합니다!
<인간 캣닙(S−)> 카드를 고르셨군요!
누구나 당신에게 좋은 인상을 받습니다.
기본 호감도가 플러스 된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단, 기존에 알고 있던 인간관계는 제외됩니다.]
심은찬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대박이다. 이거면 방송에 나오는 모습을 보고도 기본적으로 호감이 쌓이는 거 아닌가. 그럼 대박-…….
심은찬의 생각을 읽은 듯 알림 창에 한 줄이 추가됐다.
[직접 만난 사람 한정]
“…….”
……진짜 실시간 소통이네.
얼기설기 만들어 놓고 누덕누덕 기우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부르면 대답을 할 것 같은 느낌도 들었지만 심은찬과 커뮤니케이션을 꾀하려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좀 더 심은찬이 대답을 할 수 있거나 반응을 보일 수 있는 멘트를 넣지 않았을까.
심은찬은 생각을 중단하고 두 번째 카드의 설명을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정말 괜찮은 능력이었다. 비록 직접 만난 사람 한정이라는 제약이 있긴 해도 호감을 가진 상태로 시작하는 게 얼마나 인간관계에 큰 플러스 요인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은 연예인이었다. 다양한 인맥과 호감을 필요로 하는 제 직업군에서는 두말할 나위 없는 능력이었다.
상태 창의 특성에도 인간 캣닙이 활성화 중이라는 문구가 추가되어 있었다.
모든 알림 창을 확인했다고 생각한 심은찬은 이제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딩동.
경쾌한 소리와 함께 알림 창이 떠올랐다.
[회귀자 퀘스트 발동!
그냥 회귀만 한다면 재미가 없겠죠.
돌아오는 연말까지 대상을 목표로!(기준: 황금 디스크-음반 대상/한국 가요 대상-대상/NANA-올해의 앨범 상, 올해의 가수 상/AMA-올해의 가수 상, 올해의 앨범 상, 올해의 노래 상/WMA-올해의 앨범 상, 올해의 베스트 송, 올해의 아티스트 상 중 1개 이상.)
미션 실패 시: 간절함이 부족한 당신에게 회귀는 과분.
회귀 전 상태로 돌아갑니다.]
설명을 읽어 가던 심은찬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육두문자를 간신히 삼켰다.
대상? 대상이 장난이야? 대상이 쉬워 보이냐?
목록에 나열된 것 중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알림 창을 띄운 상대의 목을 짤짤 흔들고 싶은 충동이 대형 허리케인을 만난 파도처럼 출렁였다. 말로 하는 건 뭐든 쉽다. 대상을 타라. 하지만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실제 업계 종사자가 되어야 체감이 가능하다.
마치 그런 거다.
‘대학? 인 서울 미만 잡이지.’라고 하며 웃었던 고1 시절 자신의 발언을 고3이 되어 회상하며 책상에 머리를 쿵쿵 박는 정도라고나 할까.
옆에서 보면 그냥 쉬운 것처럼 보인다. 애초에 대중들이 보는 건 톱 클래스의 아이돌이니까 그들이 받는 상 하나가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지는지, 그걸 타기 위해서는 얼마나 박 터지는 경쟁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거다.
그리고 사실 그게 맞는 거다. 관계자가 아닌 사람이 내부의 자잘한 부분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뭐 이런저런 사실을 다 제쳐 두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감스럽게도 심은찬은 대상을 받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