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잘 생각했어. 나중에 술자리 있으면 나 부르고.”
“넌 왜?”
“한별이가 술 안 마시면, 내가 대신 마셔 줘야지.”
“……너 건강은 신경 안 써?”
“난 되게 건강하거든.”
통화를 끊기 전엔 느리게 걷던 태하의 걸음이 아까보다 조금 빨라졌다.
평소 태하의 걸음이 빠르다는 생각을 한 적 없었던 한별이지만, 태하가 작정하고 다리 길이를 뽐내니 한별 역시 조금 빠르게 걸어야 했다.
“조금 천천히 가면 안 돼?”
“집에 빨리 데려다주기로 했거든. 두 시 반 전에.”
“……뭐?”
이러다 바로 들어가게 생겼네!
아깐 유성에게 아주 잠시 열을 낸 것이 미안했지만, 지금 하나도 안 미안해졌다.
“태하 너, 진짜 나 때문에 고생 되게 많이 한다.”
“전혀. 한 번도 고생한 적 없는데?”
“방금도 우리 형한테 한 소리 들었잖아. 나 때문에 안 마셔도 될 술까지 마시고.”
“한 소리야, 내가 제대로 말 안 해서 시작된 거고. 술은 흑기사 한 거잖아?”
“……나한테 소원 말 안 했잖아. 너 윤수 형 잔도 대신 받아 갔는데 윤수 형한테도 말 안 했고.”
“정윤수 선배님한테 하는 건 나중에 하면 되고.”
나중에?
한별이 고개를 돌려 태하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에겐 지금 하겠단 소린가 싶어 궁금한 표정을 짓자, 태하가 어깨를 으쓱였다.
“한별아. 퀴즈 하나 낼까?”
“내 봐.”
“내가 대신 몇 잔 마신 줄 알아?”
안 셌지……. 그거 셀 정신이 어디 있어? 선배들이 사방에서 술병 들고 찾아올 때마다 인사하느라 바빴지.
한별이 고개를 저었다.
“열세 잔. 한별이 너한테 왔던 잔만.”
“그걸 다 셌어?”
지태하, 은근히 쪼잔한가? 설마, 진짜 소원 빌려고 그걸 다 센 건가?
한별이 경악한 표정을 짓자 태하가 하하, 소리를 내어 크게 웃었다.
“무슨 생각하는 줄 알겠다.”
“진짜 쪼잔해? 나 지태하 캐해석 잘못됐니?”
“아냐~.”
잘생긴 녀석이 평소처럼 그린 듯이 짓는 미소를 짓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술 들어갔다고 환하게 웃고 있으니 잘 어울렸다.
“뭔데, 그럼 왜 셌어. 원래 술자리 흑기사 소원권은 술자리에서 쓰는 거랬어.”
“그래도 이 정도 마셨는데 들어주면 안 돼? 내가 나중에도 다 마셔 줄게.”
“……열세 개씩이나 빌게?”
“석 잔당 하나씩 해서, 네 개만 빌게.”
네 개도 많다. 도대체 무슨 소원을 빌려고.
한별이 느리게 끄덕였다.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건 안에서만. 막 돈 빌려달라든가 그런 건 안 돼.”
“괜찮아. 돈 빌려달라는 소리 안 해.”
“장기 기증도 안 돼.”
“……나, 그런 사람 아니야.”
태하가 조금 허무하게 웃었다.
“세 개는 나중에 쓰기로 하고, 하나만 먼저 얘기해도 돼?”
“응.”
“한별아. 너…….”
태하의 고개가 가까이 다가왔다. 귀에 살짝 입술이 닿은 것도 같았다.
어두운 밤이라 아무도 없는 길거리인데도 태하는 남들이 들을까 걱정된다는 듯 손을 들어 입 모양을 가렸다.
낮지만 작은 목소리가 소곤소곤 귀에 울렸고, 무덤덤하던 한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
“생각 있어?”
눈을 끔뻑끔뻑.
조금 떨어진 태하의 얼굴을 보던 한별이 입을 떡하니 벌렸다.
“……어?!”
“기왕 소원권 쓰는 거, 바로 같이하자고 할까 했는데 그래도 이런 건 당사자 의견이 가장 중요한 거니까.”
“아…… 아?”
“어때?”
“아, 아니, 아니, 태하야, 잠깐만.”
태하가 예쁘게 웃음을 지었다.
얘 지금 얼굴로 막 넘기려는 것 같은데……. 그런데, 성공 가능성 있을 것 같아서 더 어이가 없다.
한별이 중얼거렸다.
“너, 튜브……?”
태하가 갑자기 기획사가 아니라 너튜브 계획을 들이밀었다.
아니, 너 가수 한다며. 갑자기 웬 너튜브? 학과도 현직에 있는 선배, 동기가 엄청난 곳에 미친 듯한 경쟁률을 뚫고 들어와 놓고?
한별이 혼란에 빠져 있는 와중, 태하는 한별을 집 앞에 데려다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한별로선 태하가 떠난 이후에도 한참이나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돌연 너튜브를 같이할 생각이 있냐고 물었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요즘 많이 하긴 하지.
하긴 하는데, 제안을 받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한 탓에 굉장히 마음이 복잡해졌다.
“과제…….”
해야 하는데.
애써 마우스 위에 손을 올렸지만, 이상할 정도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이 곡을 완성할 수 있을까?
‘자세한 건 내일 알려 줄게. 일찍은 너 힘들 테니까, 낮에 만날까?’
태하는 돌연 폭탄선언을 해 놓고 지금은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라며 한별을 집 안으로 떠밀었다.
여전히 귀가 간지러웠다. 낮게 속삭이던 태하의 목소리가 남은 것 같아서, 한별은 괜스레 손을 들어 귓가를 붙잡았다.
그러다 다시 한번 생각에 빠졌다.
그러니까, 태하의 말인즉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햇병아리 신입생들끼리 너튜브 채널을 뚝딱뚝딱 열자는 뜻인가? 브이 로그 같은 걸 찍어서 올리고?
한별은 잠시 상상해 봤다.
[안녕.]
카메라를 든 자신의 앞으로 태하가 미소를 지으며 강의실의 문을 연다.
브이 로그를 찍어 올리는 너튜버들의 영상에서 흔히 흐르는 잔잔한 음악과 살짝 색감을 보정해 부드러운 톤의 화면, 그리고 태하의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매치가 잘될 것 같았다.
역시 개 사기다. 얼굴이 다지, 어?
한별은 자신의 컴퓨터를 바라보았다. 음향에 가득 투자했지, 그래픽 카드에 투자하진 않았다.
“영상 편집, 배워야 하나……?”
한밤중.
한별은 고민에 빠졌다.
* * *
밤을 꼬박 지새운 탓에 눈을 비비자, 태하가 난감한 듯 한별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오후 늦게 보자고 한 거였는데.”
“나 괜찮아.”
“한별아, 전혀 안 괜찮아. 엄청 졸려 보여.”
한별은 억울했다. 아무리 술에 약하다지만 한별이 마신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되레 태하는 한별의 몫까지 해서 많이 마셨다. 어젯밤만 하더라도 취기에 배시시 웃고 그러지 않았나. 하지만 고작 몇 시간 지났을 뿐인데 평소처럼 말끔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난 후드티에 모자 눌러쓰고 나왔는데, 넌 왜 그렇게 깔끔하게 입고 왔냐. 태하와 걸어가는 동안, 당연하게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한별아.”
“응?”
“저기 갈까?”
“룸 카페?”
사람들이 너무 쳐다보니 너도 좀 불편하긴 하지? 또, 어차피 이야기하려면 사람들 없는 곳이 나았다.
결국, 밤에 작업하지 못한 탓에 노트북도 들고나온 한별이었다. 룸 카페에 들어서 음료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자연스럽게 노트북부터 꺼냈다.
“한별아, 여기.”
그사이 주문하고 온 태하가 한별에게 영수증을 내밀었다. 한별은 영수증 아래 적힌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입력한 후,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잠 못 잘 줄 알았으면 말 안 하는 건데.”
“그러게 말이야.”
전 소속사를 나온 이후 잠시 쉬는 줄 알았더니, 대학까지 자신이 있는 과로 온 데다 자신의 노래를 꼭 부르겠다고 다짐하더니 갑자기 너튜브 하자고 꼬드긴다.
한별은 도통 태하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자연스럽게 작업을 시작하려는 한별을 보면서도 태하는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가만히 있었다.
한별과 태하 사이의 정적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함께 다니던 다른 두 친구가 너무 시끄러운 편이었지, 두 사람은 조용히 자신의 일을 하는 데 더 익숙했다.
태하는 한별이 해야 하는 작업의 양이 상당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고 한별이 작업하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 주곤 한다는 것도.
그러니 음료가 나오면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중요한 이야기니, 괜스레 중간에 끊기는 것보다 한 번에 하는 것을 좋아하는 태하의 성격을 한별 역시 제대로 파악했다.
한별의 생각은 정확했다. 진동벨이 울리자 태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올게.”
“응. 부탁해.”
한별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태하가 밖으로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다시 열렸다.
음료수 가지러 가는 곳은 아래층일 텐데?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주춤거리며 들어선 낯선 사람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
누구냐고 묻기도 애매했다. 태하한테 번호 받으려는 사람인가?
고등학생 때에도 번듯한 교복을 입고 있음에도 사방에서 번호를 요청했기에 같이 다니면 매번 난감한 일이 벌어지곤 했다.
근데, 지금은 태하가 없는데?
없는 걸 확인한 후 나가겠거니 생각해 들어온 사람을 빤히 보던 한별은 자신에게 명함을 내미는 남자의 행동에 입을 벌렸다.
“저기, 무슨……?”
“그…… 지나가다 봤습니다. 정말 죄송해요. 진짜,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닌데, 초면에 마음에 들어서, 죄송한데, 번호, 좀, 아니, 아니 그…… 제 번호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건 좀…….
때마침 음료를 가지고 들어오던 태하가 남자의 뒤에서 우뚝 걸음을 멈춘 게 보였다.
한별은 신기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못난 얼굴은 아니나 외모가 화려한 사람들이 주변에 많은 터라 단정한 편인 자신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시면, 그…….”
어떻게 거절해야 이 사람이 덜 무안할까. 한별은 명함을 내민 사람의 뒤에 선 태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는 이런 상황에 꽤 여러 번 대응해 봤으니 답을 알지 않냐는 듯 바라보자, 태하가 미소를 지으며 한별의 가까이 다가왔다.
“넌 너무 인기가 많아서 탈이야.”
난 여태 인기 많았던 적이 없거든?
태하의 말에 한별은 속으로 반박했다.
한별에게 명함을 내밀던 남자는 자신의 뒤에서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놀란 듯, 숙이고 있던 고개를 돌렸다.
“우리 한별이한텐 무슨 볼일이세요?”
한별에겐 다정했지만 상대에겐 그러지 않겠다는 태도가 훤히 보였다. 자신보다 머리 한 개 반쯤 더 큰 태하였기에 번호를 건넨 사람은 사색이 되어 몸을 돌렸다.
“아, 아니, 죄송, 그…….”
한별이 확인할 수 있도록 테이블 위에 명함을 올렸던 사람은 당황한 얼굴로 한별과 태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오…… 오메가셨, 어요?”
남이사 오메가든 알파든. 태하를 보자마자 알파라는 것이 느껴졌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