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네가 떨어지면 도대체 붙을 사람이 누가 있어! 나랑 예찬이가 가르쳤는데!”
“더 잘하는 사람이 붙었겠죠.”
입시가 끝난 후, 한별은 여러 회사에 보내 볼 음원들을 작업했다.
집에 있는 기기로는 음질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기에 편곡과 가상 악기를 조절해야 하는 추가 작업은 학원에서 하는 중이었다.
가뜩이나 생각한 대로 음악이 나오지 않아 머릿속이 복잡한데, 부득불 찾아와선 사람 속 뒤집고 있다.
한별이 머리를 긁었다.
“실기 성적은 저도 딱히 걱정 안 했어요.”
“근데 왜!”
“저, 수능 생각보다 망했다니까요.”
“…….”
이번에 좌절한 건 유성이었다. 한별의 수능을 도운 것은 그였으니까.
울컥한 유성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형이 미안해……!”
그렇지, 당신은 미안해야지. 수능은 당신 담당이었는데, 누구 때문에 무리 못 하게 됐는데.
사실 원래 한별의 계획대로라면 수능 전까지 정말 공부에만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그놈의 페로몬 문제 때문에 원치 않게 형의 스케줄을 따라다니게 됐으니, 수능 공부를 책임을 질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난 열심히 했고, 공부는 형이 알려 주기로 했었어.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됐네? 형은 나한테 뭘 해 줄래.”
“……엄.”
“어쩔 거냐고.”
한별의 눈웃음에 유성은 열심히 살길을 찾았다.
“그, 한별아. 작업실 필요하지? 어차피 집에 형 방이 비잖아……? 형이 그, 방음 시설 부스랑 작업 기기들을 업그레이드해 주는 건 어떨까…….”
감사합니다.
한별의 표정이 환해졌다.
학원에서 작업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간 꿈을 위해 달려오긴 했지만, 한별은 언제까지 학생일 수 없다. 학원 기기들을 빌려 작업하는 데도 시간당 금액이 들고, 무엇보다 시간적인 한계가 있는 터라 마음껏 사용할 수 없었다. 슬슬 자신만의 무언가가 필요하다곤 생각해 왔다.
유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에 얌전히 앉아 있던 단영이 핸드폰을 들어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녹음 기기와 관련된 건 녹음실에 붙어사는 단영이 가장 잘 알 테니 맡겨 달라는 표정이었다.
‘이러려고 데려왔고만.’
한별은 단영의 모습을 보다, 고개를 움직였다.
“한별아. IBM이 편하니, 사과 제품이 편하니.”
“둘 다 상관없어요. 집에선 윈도우 쓰는데, 학원은 사과라서. 둘 다 손에 익어요. 회사 녹음실 컴퓨터도 사과 아니었잖아요.”
“그럼, 이왕 사는 거 사과로 사. 이거 프로 좋다더라.”
단영의 말에 유성이 놀란 듯 반문했다.
“아니, 잠깐. 이 미친 사람아.”
“어차피 좋은 거 해 주려던 거 아니었어? 한별아, 이참에 유성이 왕창 뜯어먹어라.”
“아니, 그거 800만 원은 한다고!”
오케이. 일단 ―800만 원으로 시작. 한별은 고개를 끄덕였다.
“런치 패드도 하나 사야지.”
“단영이 형, 그거 형도 작업실에서 쓰지도 않잖아. 마우스 쓰면 되는데 그걸 왜 사?”
“작업실 조명으로 쓰기 딱 좋아. 원래 작업실 조명의 꽃은 런치 패드거든.”
“아오, 진짜!”
사용하지 않는 장비 견적 ―20만 원.
“그리고 스피커는 이거, 베×풋.”
“야, 이 인간아악!”
유성이 단영의 뒷덜미를 잡았다. 단영은 컥컥거리면서도 장비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는 듯 한별에게 자신의 핸드폰을 보여 주었다.
유성이 막으려 했지만, 핸드폰은 결국 한별의 시야에 닿았다.
“……마음에 드는데?”
“아…….”
다른 기기 확인 없이 스피커만 얹었을 뿐인데 ―2,000만 원.
“유성아. 내가 한 가지 더 조언하겠는데, 작업할 때 원래 스피커 하나만 쓰는 거 아니다.”
“……뭐?”
“여기만 해도 지금 두 종류 쓰잖아. Low 좋은 스피커랑 High 좋은 스피커 써야지. 그리고 한별아, 해상도는 이게 좋아.”
이어 또 다른 종류의 스피커 ―1,700만 원.
“그리고 저거 스피커 사용하려면 필수적으로 필요한 받침대랑 케이블이랑 기타 액세서리까지 하면 금액이 대충…….”
“아악!”
―300만 원. 아니, 스피커가 두 세트니까 곱해서 ―600만 원.
“오디오 인터페이스도 사야 하는 거 알지?”
“날 죽여…….”
좌절하는 유성의 모습을 즐겁게 구경하던 한별이 얌전히 손을 움직였다. 좌절해 있던 유성은 한별이 달칵달칵 키보드 치는 소리에 울적하게나마 고개를 들었다.
인터넷 창이 켜지고 필요한 컴퓨터의 사양, 필수 프로그램, 자주 사용하는 가상 악기 프로그램, 오디오 인터페이스와 적당한 선의 스피커 등등을 검색했다.
한별은 메모장에 원하는 제품군과 가격을 적은 후, 입을 열었다.
“이거 말고 몇 개는 중고로 나오는 거 확인해야 할 것 같긴 해도, 새로 사는 건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한별아…….”
“그래. 이왕이면 유성이 등골 좀 뽑아먹어도 되잖아. 돈도 잘 버는데.”
“윤단영은 제발 닥쳐.”
“야, 내가 형이거든?!”
5년을 같이 사니 진짜 가족이라도 된 것인지 유성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단영에게서 떨어져 한별을 꼭 끌어안은 유성이 역시 내 동생이 최고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별은 슬쩍 고개를 돌려 단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곤 씨익, 웃었다.
사실 한별이 원하는 제품은 처음부터 명확했다. 문제는 생각보다 비싸다는 거였는데, 단영이 선수를 쳐서 최고급으로만 던져 준 덕에 한별이 원하는 장비를 갖기가 수월해졌다.
그렇게 한별과 단영의 계략에 넘어간 유성은 단영이 추천해 준 시공 업체까지 확인해 홀린 듯 일시불로 결제했다.
콘솔 데스크는 저렴한 걸로 하겠다는 한별의 말에도 유성은 극구 반대하며 좋은 걸로 구매했고, 중고로 사면 된다는 말에도 고개를 젓곤 신품을 사 주었다.
“진짜 너는 팔불출에 동생 바보 맞아.”
한편으론 경이롭기까지 하다는 양 중얼거리는 단영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한 유성의 업보는 놀랍게도 한 달 후에 몰아닥쳤다.
“반…… 납…… 해…….”
유성이 방음 시공을 위해 사람들이 드나드는 자신의 방. 아니, 이젠 한별의 작업실이 될 곳의 방문을 붙잡고 울분을 토하듯 중얼거렸다.
“낙장불입이다. 한 입으로 두말하지 말아라.”
“이건…… 사기야…….”
유성의 손이 덜덜 떨렸다.
집에 놀러 와, 한별의 작업실이 꾸며지는 것을 구경하고 있던 태하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찬 음료수를 꺼내 한별과 유성의 손에 하나씩 쥐여 줬다.
“저거, 중고로 산 거였지?”
“응. 단종돼서 요즘 안 나오는 오인페(*오디오 인터페이스)인데 잘됐다 싶어.”
한별과 함께 기뻐하는 태하와 달리, 유성의 표정은 여전히 퀭했다.
“형 진짜 성격 안 좋네. 동생한테 축하해 주지는 못할망정.”
“……한별이 너, 솔직하게 말해. 다 알았지.”
“그걸 어떻게 알아?”
“몰랐을 리가 없어!”
지금, 유성이 악을 쓰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한별이 대학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물론, 한 번에 합격하진 않았다. 추가 합격이긴 한데, 어쨌거나 합격은 합격이고 대학생이 된 것은 축하 받을 일이었다.
사실, 한별은 수능을 본 이후 조금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실기 고사가 끝난 후로도 회복되지 않았던 감정은, 합격 결과를 받았을 때부터 눈에 띄게 좋아졌다. 한동안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던 작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합격 예비 후보 1번. 처음 불합격을 봤을 땐 자신감이 바닥에 떨어졌지만, 예비 1번이라는 그 글자가 보였을 땐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어떻게 예비 1번이었으면서, 형한텐 말도 안 하고……. 떨어졌다고만 하고…….”
“솔직히 작년만 하더라도 예비 1번도 불합격이었어. 다른 학교도 아니고 K대인데 당연한 거 아냐? 거기, 정시 작곡 전공 겨우 두 명 뽑는 곳인데.”
“아니, 그래도…….”
“저, 유성이 형. 이번 K대 작곡 전공 정시 경쟁률 40:1 넘었대요.”
“…….”
유성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들으니 합격한 게 용하구나.
“나야 이번에 대학을 안 갔으니 잘 모르지…….”
“잠깐. 이번에?”
“…….”
한별이 흐린 눈으로 유성을 바라보았다.
“형. 혹시 수능 봤냐.”
“……아니, 그.”
“제대로 얘기해.”
“너도 보는데 얼마나 어려운지 좀 그, 확인하려고…….”
“당신이 무슨 공부의 신이야? 수능을 또 보게?!”
“물론, 다른 수험생들한테 지장 안 가게끔 9등급 나오게 답 피해서 마킹 했어…….”
“이 인간아, 당연히 그래야지!”
저 말인즉 답을 다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몸도 안 좋은 사람이 수능까지 봤었단 말이야? 한별은 유성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아니, 도대체가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그렇게 한동안 한별의 잔소리를 듣던 유성은 시공이 완료됐다는 업체 직원들의 말에 표정을 바꾸고 작업실 안으로 들어섰다.
다시 돌려놓으라느니, 대학 붙었으니 이건 사기라느니 하며 지었던 토라진 얼굴이 무색할 정도였다. 잘못된 곳은 없는지, 시공하며 녹음 기기에 이상을 준 것은 아닌지 확인하는 눈빛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방음이 잘되는 건 확인했습니다. 그래도 사용하실 고객님께서 음악 한번 틀어서 직접 확인해 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당연하지만 채널(Cha.N)의 최신 컴백 곡을 틀었다.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섹시한 1군 아이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별은 작업실 안에서 문을 닫고 노래를 잠시 듣다가, 밖으로 나와 문을 닫으며 방음 상태를 확인했다.
큰일이다.
이 정도면 형한테 사랑한다고 말해 줘도 될 것 같다. 집중하기 좋은 조명까지 시공이 끝난 작업실 전경에 흠뻑 빠진 한별을 본 태하가 못 말린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