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한별도 유성처럼 나이에 비해 차분한 편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하지만 그런 한별에 비해서 태하는 더욱 차분하고 어른스러웠다.
홀로 서운하고 삐쳐서 먼저 고개를 돌린 한별이었다. 다른 친구들과 처음 이야기를 나눴다면 충분히 다툼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태하는 먼저 다가와 한별의 서운함을 어루만져 주었다.
어디에도 태하의 잘못은 없었다. 하지만 먼저 자신을 낮추며 다가와 사과하고, 자신이 어째서 함께하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전달까지 했다. 마치, 미안함에 대한 감정을 풀어 주듯 함께할 약속까지 엮었다.
친한 친구들과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서러운 한별의 마음을 알아차린 듯, 어른스러운 처사였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한별의 모습에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만은 또래 친구들과 같았지만, 한별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고 기뻤다.
그러다 어색하게 손을 뻗어 부모님이 자신이 울 때마다 해 주셨다는 듯, 태하는 한별을 끌어안고 가만가만 토닥여 주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우는 한별을 달래기 위해 어른을 부를 수도 있었지만, 태하는 그러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울렸으니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듯이 한별을 가리고 지켰다. 기실 태하의 잘못은 하나도 없음에도.
태하가 먼저 다가와 한별을 달랜 덕분에 다른 친구들과도 다투는 일 없이 자연스럽게 원래의 사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2박 3일의 일정 중 첫날은 그렇게 흘러갔지만, 이튿날은 다른 조였던 한별이 친구들이 있는 조로 옮겨졌다.
“제 친구가 저쪽 조에 혼자 있어요.”
서로 다른 학교에서 온 친구들이었다.
여러 학교의 아이들이 부딪치며 친해질 수 있도록 일부러 따로 배정한 거였지만, 낯가림이 있는 편인 한별이 첫날 같은 조원과 제대로 어울리지 못했던 것을 확인한 강사들은 태하의 요청대로 한별의 조를 이동해 주었다.
친구들과 같은 조에 속한 이후, 한별은 조금 더 편한 모습으로 캠프에 임할 수 있었다.
너무 커서 무섭다고 생각한 원어민 선생님이 말을 걸었을 때도 더듬더듬 대답할 수 있었고, 영어 쿠키를 만들었을 땐 친구들의 얼굴에 밀가루를 묻히며 크게 웃을 수 있었다.
친구들을 따라 캠프에 가고 싶다고 부모님께 말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같은 조의 다른 학교 친구들과 벌써 친해져 시끌시끌한 은한과 재휘는 딱히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계속 제 옆에서 함께 이동해 주는 태하는 캠프 내내 도움이 됐다.
“저기, 태하야~.”
어제 처음 봤고, 이제 이틀째인데 태하는 인기가 엄청났다. 당시엔 태하의 키가 친구들과 크게 차이 나지 않았고, 오히려 한별의 키가 조금 더 컸다.
그런데도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와 반짝이는 눈 때문에 비슷비슷한 아이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었다. 외국인들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태하의 모습에 다른 학교에서 온 친구들도 쉽게 태하를 찾았다.
‘태하는 내 친구인데.’
한별이 그런 생각을 할 때면 꼭 태하가 다가와 한별의 옆에 앉았다. 한별이 괜한 생각으로 토라지지 않도록 한별에게 다가와, 같이 가자며 손을 내밀었다.
태하와 가장 친한 건 나야.
치기 어린 생각이었지만, 태하의 평소 모습과 지금처럼 어른스러운 모습을 오래 보아 온 건 자신이라는, 은근한 자부심이 마음속에 자랐다.
“자, 그럼 한번 해 볼까요? 하고 싶은 사람은 Hands up~.”
상황은 둘째 날 밤에 일어났다.
무대라고 하기엔 거창했다. 조명도 제대로 되지 않은 강당. 바닥 쪽엔 불만 꺼졌고, 무대랍시고 두 단 정도 높게 되어 있는 곳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수련회가 아니니 부모님의 사랑이 어쩌고저쩌고하며 촛불 켜는 행사는 없었지만, 장기 자랑은 있었다.
영어 캠프이니만큼 아이들이 최대한 영어를 사용하도록 했지만, 집에 가기 전날 밤은 조금 풀어 주자는 생각이었는지 어디서 공수해 온 노래방 기계가 떡하니 자리를 잡았다.
처음엔 다 같이 노래를 불렀다. 유행하는 곡들이 아니라, 쉬운 영어 노래와 동요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했다.
한국 노래가 가능하다는 이야기에 학생들은 조금씩 분위기가 풀렸고, 나중엔 아예 선생님들이 자진하여 학생들이 즐겁게 무대에 오르도록 대결을 붙였다.
“조 별로 한 명씩 노래 불러서 가장 잘 부르는 조에 추가 점수!”
솔직히 레크리에이션이었다. 그놈의 점수, 받아 봐야 소용이 없는 것임에도 아이들은 악을 쓰고 점수를 받기 위해 손뼉을 치고 환호를 했다.
응원 점수도 있다는 이야기에 다른 조의 학생이 나와 노래를 불러도 커다랗게 손뼉을 치고, 함성을 질러 분위기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럼, 우리 조에선 태하가 나가자!”
“……내가?”
“응! 우리, 영어 동요 부를 때도 태하가 가장 잘했잖아!”
본인은 나가기 싫지만, 점수는 얻고 싶어 혈안이 된 초등학생들은 가장 영어를 잘하는 태하를 무대로 내보냈다.
아이들도 많이 보는 (부모님들은 나이가 안 된다며 말리지만) 인기 있는 드라마의 OST를 부른 직전 조의 학생 덕에 분위기가 엄청 오른 상태에서 태하는 무대에 올라 당시 유행하던 아이돌 노래를 선곡했다.
이에 어른들은 요즘 애들은 유행을 참 빨리 따라가는구나, 하고 신기해했으나 아이들 입장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어릴수록 친구들과의 관계에 예민하고, 자극과 유행에 빠르게 반응하는 법이었다.
통통 튀는 노래가 흘러나오자, 아이들이 손뼉을 치며 따라 불렀다. 다른 조의 아이들이 나와 노래를 부를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유행하는 노래이니만큼 가사를 아는 영향도 있겠으나, 한별이 보기엔 전혀 달랐다.
[그래, 네가 원한 나야.
내가 원한 너야.
나에겐 꽃이야, 나의 별과 나의 하늘아.]
조금은 촌스럽고 유치한 사랑 노래가 맑게 울렸다. 이렇다 할 조명도 없는 하얀 불빛 아래에서 태하는 웃고 있었고, 어두운 곳에 앉아 있던 한별은 순간 손뼉 치는 것을 잊었다.
모두가 노래를 따라 부르는, 무대 같지 않은 무대 위에서 태하는 한별이 본 누구보다도 빛이 났고, 한별은 처음으로 노래의 가사를 귀담아들었다.
[내가 가장 아끼는 너야.
네가 있어야 하는 나야.
이젠 너를 보는 것이 세상 가장 행복해.]
노래의 음계가 귀에 박혔다. 변성기가 오지 않은 고운 미성이 노래를 감싸고 있지만, 태하에게 저 곡은 너무도 높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와아―!
주변에서 박수가 터졌다.
함성을 내지르는 친구들과 달리, 한별은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저 무대는 태하에게 너무도 작다.
레크레이션이 끝난 후, 작은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정말 폭죽을 터뜨릴 순 없기에 손에 하나씩 스파클러만 들었을 뿐이지만,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손에 스파클러를 들고 더운 여름밤을 뛰어다녔다.
“한별아, 넌 꿈 뭐 적을 거야?”
한별은 아직 불을 붙이지 않은 태하의 스파클러에 자신의 스파클러 끝을 대고 불을 붙여 주고 있었다.
“꿈?”
“응. 장래 희망. 내일 집에 가기 전에 적는다고 했어.”
어린 시절 한별의 꿈은 언제나 바뀌었다. 학생들에게 언제나 친절하던 선생님이 사탕을 나눠 줄 땐 선생님이 되기도 했고, 텔레비전에서 어려운 단어로 인터뷰를 하는 엔지니어가 멋있어 보이면 엔지니어가 되고 싶기도 했다.
“태하, 너는?”
“글쎄…….”
“나, 작곡가라고 적을 거야.”
하지만, 어떤 직업도 지금처럼 한별을 뒤흔들지 못했다.
무대 위에 선 사람이 내가 만든 곡을 불러 주면, 그리고 아까처럼 아이들이 내 노래를 따라 불러 주면 얼마나 짜릿할까?
태하의 동그란 눈동자가 한별을 빤히 바라보았다. 반짝 튀는 스파클러가 하나에서 둘이 되었다. 한별이 가진 빛이 태하에게 나눠진 것이다.
“아까 태하, 너 되게 멋있었어. 무대에 있는 거. 난 노래를 못 해서 그렇게는 못 하니까, 그 멋있는 거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
“나, 멋있었어?”
“응.”
한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하야. 나중에 내가…… 노래를 잘 만들게 되면, 내 노래 불러 줄래?”
“난 가수가 아닌데?”
“그냥, 네가 불러 줬으면 좋겠어. 내가 만든 노래를 다른 가수가 부르더라도, 네가 내 노래를 불러 주면 되잖아.”
한별이 가볍게 이야기했다.
텔레비전에서 본 것처럼 화려한 조명이 있지 않은 곳에서도 태하는 반짝였으니까. 내가 만든 노래가 정말 좋다면, 태하는 어디에라도 반짝일 것이다.
“그럼 내가 가수를 할게.”
“……응?”
“그럼 네가 만든 노래를 내가 가장 먼저 부를 수 있잖아.”
“정말?”
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진짜로.
한별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가장 좋을 거야.
뮤즈라는 뜻조차 모르던, 어리던 어느 날. 태하는 한별에게 손을 내밀었다. 작고 앙증맞은 두 개의 새끼손가락이 걸렸다.
“내가 엄청 잘 만들어 볼게.”
“그럼 나도 엄청 잘 부르도록 노력할게.”
치기 어린 두 아이의 꿈은 그날 태동했다.
* * *
그래서 더욱 미안했다.
그날부로 태하의 꿈은 한별이 내뱉은 이야기로 시작됐으니까.
태하는 열심히 연습했고, 그걸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한별은 걱정스러웠다. 뜻밖에 유성이 아이돌이 되며 태하가 걷는 길이 얼마나 사람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길인지를 알게 되었으니까.
차마 태하에게 강요할 수 없었다. 과거의 기억은 여전히 반짝이는 스파클러와 함께 남아 있지만, 그간 태하가 갖은 고생을 하던 게 떠올라 목이 메었다.
오랜 연습생 기간, 여러 번의 데뷔 취소, 결국 해지한 연습생 계약. 이번 일로 인해 새로 연습생 계약 직전까지 갔지만, 태하는 미련을 가지지 않고 거절을 했다.
애초에 소속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이전에도 거절했다고 하지만, 유성과 한별도 만약 태하가 정말 하고 싶다고 얘기했으면 새로 데뷔할 것이라는 소속사의 데뷔 조가 엉키지 않게 조치했을 것이다.
태하는 괜찮다고 했으나, 한별은 가슴 한편이 무거웠다.
“한별아. 나 아직도 네가 만든 노래 부르고 싶다는 거 변함없어.”
낮은 목소리가 한별을 달랬다. 여전히 어른스럽고 다정했다. 태하는 한별이 자신 때문에 죄책감을 짊어지지 않도록 부드러이 어루만져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