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도대체 회사를 얼마나 조지려고 나를 이렇게 고생시켜? 한별이 으득 이를 물자, 살벌한 분위기를 눈치챈 유성이 머쓱하게 입을 열었다.
“글쎄, 나도 잘 몰라. 추측으로는 그 전날 본 영화 때문에 그런 거 아닌가 싶어.”
“영화?”
“좀 무서운 영화를 봤었거든. 나도 새벽에 깨서 한별이 붙잡고 울고 그랬으니까.”
그날 영화를 봤던가? 너무 어려서인지 한별에겐 기억이 나지 않는 일이었다.
“무슨 영화였는지 정확하진 않은데, 좀 잔인하다고 해야 하나? 그때 충격이 좀 커서 나도 새벽에 계속 한별이 찾았거든.”
한별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한쪽 입꼬리를 올리곤 유성에게 한번 당해 보라는 듯 입을 열었다.
“형이 중2병이 좀 세게 와서요.”
“저기, 한별아……?”
“갑자기 한밤에 제 손 잡고 살아 있는 증거를 보여 달라고 그랬었거든요.”
“이야아…….”
“살아 있다는 증거…….”
유성이 숨을 잘못 삼킨 듯 콜록거렸다.
“그게 그날이었네. 기억 안 났는데 이제 기억났다.”
“……잠깐만, 한별아.”
“머리 쓰다듬으면서 막 사랑하는 내 동생, 예쁜 내 동생, 이러고.”
“……뭐지.”
“진짜 중2병인가?”
“맞는 것 같은데.”
“전 형이 이중인격이면 어쩌나 싶어서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풉.”
“근데, 그건 지금도 그런 거 같은데? 한별이 건들면 당장 화내고도 남을 것 같잖아.”
“뭐야. 한별이가 유성이 네 분신이야?”
“한별아, 그간 이런 형 밑에 있었어……? 어떻게 견딘 거야.”
“아, 아냐! 그런 소리 안 했다? 안 했다고!”
“혹시 마법진은 안 그리디?”
형의 흑역사를 멤버들 앞에 꺼낸 한별이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방송에 나가게 되면 꼭 유성의 동생한테 직접 들은 일화라고 알려 주세요.”
“오케이.”
“어차피 지금 라디오 녹음 가는 거니까 잘됐다.”
자신이 직접 이 일화를 퍼뜨릴 순 없으니 멤버들의 입에서 퍼지도록 해야겠다. 한별은 소소한 복수를 하곤 짧은 시간이지만 잠을 청했다.
* * *
처음엔 그냥 체험으로 따라다니는 것이었지만, 방송국을 드나드는 덴 여러 절차가 필요했다.
처음 며칠은 유성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통과가 됐다. 찰나였긴 하나, 한별은 인터넷에 한동안 화제가 되었던 인물이기도 했고.
얼굴을 밝히지 않고 유성과 함께하는 조건으로 인터뷰 요청까지 수락했기에 방송국 출입이 가능했다.
‘채널 멤버분들에게 듣기로, 동생분께서 형의 흑역사를 알려 줬다고 하시던데요~.’
‘아, 네. 그보다 더 많이 알고 있지만, 형 팬분들을 위해서 비밀로 하겠습니다. 저, 더 말하면 형하고 싸워야 해요.’
‘아~ 아쉽네요.’
‘뭐야~ 동생이랑 막 싸우는 형이야?’
‘아니에요. 제가 동생한테 얼마나 잘해 주는데요.’
‘형, 가슴에 손을 얹고…….’
‘푸하하하하―!’
‘나중에 형이 없는 자리에서라면 후환을 생각하지 않고 말씀드릴게요.’
‘동생분을 따로 불러야겠군요!’
‘안 돼요~! 제가 꼭 온 힘을 다해 막도록 하겠습니다!’
당시 한별은 나름 재밌다고 느꼈다.
어차피 저는 이미지 챙겨야 하는 연예인도 아니고, 진짜 데뷔할 생각도 없기 때문에 적당히 어울리기만 하면 됐으니까.
짧은 통화 연결이니만큼 매니저 옆에서 통화할 수 있었고, 유성이 있을 때라는 게 조건이 달렸기에 말실수가 나올 것 같으면 바로 막아 주겠지, 하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방송국 통과가 지속되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방송국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한별은 채널(Cha.N)의 스케줄이 진행되는 동안 차에 혼자 남아 있어야 하기도 했다.
‘아, 일부러 그런 건가.’
그쯤 되었을 때, 회사에선 한별을 공식적인 연습생 명단에 올리고 싶어 했다.
한별이 채널(Cha.N)의 스케줄에 따라다니다가 끝없는 대기에 지치기를 원한 것이다. 소속 연습생이면 밀어주는 연습생이라는 핑계로 음악 및 예능 방송 견학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질 테니까.
회사의 목표를 눈치챈 유성이 먼저 선수를 쳐, 한별을 StarV의 스태프 명단에 등록시켰다.
아직 연습생으로 진로를 바꾸는 건 고민된다는 한별의 이야기와 미성년자기에 부모님의 승인이 필요한 점, 더불어 회사에서 가장 수입이 좋은 유성의 적극적인 입김까지 닿으니 회사도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일당은 없었다. 금전적으로 엮이고 싶지 않았기에 유성은 만약 한별이 StarV 연습생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때 연습생 비용을 정산해 달라는 희망적인 이야기로 회사의 시선을 돌렸다.
“근데, 형은 회사에서 나 연습생으로 들이려던 건 어떻게 알았어?”
“요즘 회사가 하는 행동 보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지.”
하긴, 너무 뻔하긴 했다. 확정된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별과 관련된 기사가 다시 알음알음 나오고 있으니까.
한별이 부담스럽다고 말하면 금세 내려갔지만, SNS를 통해 한별이 StarV의 연습생이 된 것 같다는 이야기가 슬쩍 흐르기도 했다.
물밑 작업 같긴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런다고 해서 한별이 신경을 쓰고 눈치를 보는 타입은 아니니까. 애초에 그런 타입이었다면 유성이 자신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가서 얘기하고 온 거야?”
“응. 자, 여기. 여기에 서명하면 돼. 내용 이상한 거 있는지 확인은 다 해 봤어.”
유성이 가져온 계약서엔 임시 매니저와 관련된 이야기와 한별이 연습생 계약을 거절할 경우, 깔끔하게 손을 떼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호칭만 임시 매니저고, 실제론 채널 너튜브랑 W앱 콘텐츠 촬영 보조야. 작은 촬영이라 평소에도 계약직으로 들어오시는 분들 꽤 계시거든.”
기간은 2개월. 연장은 1개월 단위로 가능. 학원 가는 날짜는 뺐고, 일주일 1~2회 출근.
체험 학습을 위한 공문 처리도 회사에서 하기로 되어 있었다. 도대체 회사를 어떻게 구워삶은 것인진 모르겠으나 한별의 입장에선 나쁠 것이 전혀 없었다.
“형이 이렇게 너를 생각해.”
한별의 사인이 적힌 계약서를 든 유성이 뿌듯한 목소리로 이야기하자, 한별이 미소를 지었다.
“안 들키겠다는 발악이시겠지.”
“아, 한별아…….”
“잘 들어……. 내가 일주일에 세 번 이상 나오게 만들면, 형의 모든 흑역사를 인터넷에 폭로해 버리겠어…….”
최유성 친동생발 내용이라고 인증까지 해서 보내고 말 것이다.
그러니 형 너는 약을 꼭 제때제때 먹어, 상황이 꼬이지 않게 만들어라. 광기가 서린 한별의 눈빛에 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회사에서도 연습생도 아닌, 아직 졸업도 안 한 학생에게 과한 일정 참여 요구를 할 수 없었다.
이미 계약서 단계에서 전부 거절 가능한 조항을 적어 놓았기에 한별은 본인과 채널(Cha.N)이 바쁘지 않은 선에서 채널(Cha.N)의 대기실 모습과 연습실, 숙소 촬영을 도울 수 있는 권한을 받게 된 것이다.
물론 유성이 없을 때 채널(Cha.N)과 관련된 곳에 방문할 생각은 죽어도 없었지만, 상황이 본격적으로 꼬이자 한별의 표정은 흐려졌다.
“팬들이 알면 날 죽이겠지?”
“왜?”
“왜긴 왜야. 외부인이니까 그렇지.”
심지어 오메가이기까지 하다.
한별의 말에 유성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을 생각하긴 개뿔. 알면서도 동생을 곤란에 빠뜨리는 아주아주 나쁜 형이었다.
“어차피 공식적인 일정에만 참여하니까 괜찮아. 스케줄 없는 날엔 절대 안 부를게.”
이따금 형은 당연한 소리를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하는 버릇이 있었다.
“아, 근데 친구 데려와도 돼?”
“친구?”
“어.”
“음…… 외부인은 안 되는데. 누구?”
“형 어차피 내 소문 본격적으로 터뜨리고 싶어 하는 거 아니었어?”
“어, 어……?”
한별을 보는 유성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그런 유성을 보며 한별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면 멍청이지.
회사와 무슨 거래를 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유성은 지금 일부러 한별이 유명해지게 만들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무언가를 계산하는 듯한 모습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다. 그에 발을 맞추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별은 형을 믿었다. 어차피 돕기로 했던 일이니까.
“태하 데리고 올 거야.”
“……한별아. 태하는 알파잖아.”
당황한 척 웃던 유성의 표정이 굳었다. 단 하나, 유성이 대비하지 못한 것은 태하의 존재였다.
“태하, 이미 다 알아. 예민해서.”
혹시 듣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길게 설명할 순 없었다. 하지만, 주요 단어가 빠진 한별의 말에도 이해한 듯 유성은 멈칫했다.
“……뭐?”
“오해는 하지 말고. 원해서 들킨 건 아냐.”
‘한별이 네 페로몬이랑은 확실히 다른 향이니까.’
다시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의 예민함이었다. 태하가 한별의 페로몬을 아는 상황이었으니, 유성의 페로몬을 비교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을 믿을 순 없는데.”
유성의 눈빛이 가라앉는 것을 본 한별이 고개를 저었다.
“태하는 내가 보장할게.”
“한별아. 타인은 언제 변해서 전부 터뜨릴지 모르는 거야.”
“그럼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녀석을 지금껏 친구 삼은 거겠지. 태하는 우리에 대한 선의로 입을 다물고 있는 거야. 정확히는 형보단 친구인 내 쪽일 거고.”
“……한별아.”
“그리고, 이건 애초에 형의 잘못이잖아.”
한별의 목소리 역시 단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