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이전에 오메가 페로몬 묻혀 왔을 때는…… 난 한별이 네가 혹시 그, 오메가를 좋아하는 오메가…… 인가 해서 응원해 줘야 하나, 하고 생각을…….”
네가 모든 사랑의 형태를 응원하는 사람이라는 건 잘 알겠지만…… 아무튼, 난 아닌데요.
한별은 제 착한 친구의 생각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놈의 형 페로몬 때문에 온갖 이야기를 다 듣는구나.
“일단, 그런 건 아니라고 했으니까…… 더 묻지는 않을게. 그럼 그 오메가 페로몬도 너 아는 사람이라는 거지?”
“응……. 그냥 사정이 있을 뿐이야.”
“그럼, 유성이 형이겠네?”
“……!”
아, 그냥 파고들게 하지 말 걸 그랬나.
한별은 태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눈이 흔들렸다. 아니라고 하기엔 태하가 이미 확신을 가진 상태였다.
“전에 형 만났을 때 맡았거든. 너한테서 나는 그 페로몬이랑, 형한테서 나는 네 페로몬이랑.”
태하의 낯빛이 아까보다 더 어두워졌다.
“그…… 한별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친형제끼리도…… 결혼 못 해.”
“아냐!”
그런 거 아니라고!
유성이 오메가라는 것을 들킨 것도 당황스러운데, 엉뚱한 오해까지 겹쳤다.
한별은 주먹을 들어 답답한 가슴을 쳤다.
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아니, 어디부터 해결해야 하는 거지? 형이랑 내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오해부터 풀어야 하나?
한별은 여전히 심각한 태하를 보곤 급히 손을 흔들었다.
“일단, 형이랑 그런 건 오해야!”
“……어?”
“형이 불안이 좀 심해서 그래…….”
어쩔 수 없이 말한 것이지만, 사실이었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의 일이다. 오밤중에 어떤 손길에 깨어난 한별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유성의 모습에 귀신이라도 본 양 기겁했다.
‘……형? 지금 뭐 해?’
‘…….’
‘왜 그러냐구.’
‘내 동생…….’
‘뭐야, 형 어디 아파?’
그 전날까지만 해도 유성과 평범하게 컴퓨터로 싸웠던 한별이기에, 갑작스러운 유성의 태도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간 세 살 많다는 이유만으로 한별의 앞에서만큼은 기죽지 않던 유성이, 그날 밤 이후로 마치 양보의 미덕이라도 깨우친 양 어딘가 유해진 것이다.
덕분에 한별의 입장에선 꽤 편해지긴 했다. 동생들의 환상에만 존재한다던 ‘내게 다정하고 착한 형’이 실제가 됐으니까.
물론, 단점이라면 브라콤이 됐다는 거지만.
‘우리 예쁜 동생.’
그러니만큼 한별은 아무리 생각해도 유성에게 사춘기가 좀 세게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동생에 대한 사랑이 각별해졌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니까.
하여, 한별은 혹시나 유성이 ‘사실 지금 내 인격은 나의 또 다른 분신이며, 그런 나를 공격하는 것은……’ 어쩌고저쩌고하는 건 아닐까 두려워 유성을 감시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유성의 성격이 아주 다정해졌다는 것 외엔 평소 행실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파악했다.
물론, 과거의 그 일이 지금 페로몬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연기를 못 하는 거지, 거짓말을 못 하는 것은 아니니까.
한별은 남을 완벽하게 속이기 위해선 조금의 진실을 섞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기 스킬을 시전했다.
“페로몬이 그래서 그, 묻은 것뿐이거든? 나를 막 심각한 브라콤으로 생각하지 말아 줘…….”
“아…….”
“페로몬은 살아 있다는 증거라 그러잖아. 솔직히, 난 그게 아직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긴 해.”
“응?”
태하의 주변에 물음표가 가득 생겼다. 한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멍한 얼굴이었다.
“기억나? 전에 내가 우리 형 아무리 봐도 중2병 세게 온 거 아닌가 싶다고 말했었잖아.”
“어, 응.”
태하와 재휘, 은한과 친해져 간식도 사 먹고 학원도 같이 다니던 어느 날. 한별이 저들에게 심각한 얼굴로 형에게 그 유명한 중2병이 찾아온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랬거든. 진짜 진지하게 헛소리를 하더라고. 살아 있는 증거가 어쩌고 하는데, 무슨 이상한 영상 보고 악몽 꾼 것 같았어.”
한별이 흐린 눈으로 과거를 떠올리곤 머리를 감싸 쥐었다. 거짓을 들키지 않기 위해 묻어 둔, 과거의 진실이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유성은 굉장히 멋있고, 그만큼 잘난 엄친아 스타일이라 절대 형의 팬들인 시그널에겐 들키지 말아야 하는 과거의 일이기도 했다.
미안, 형. 아직 그 중2병 남은 걸로 하자. 형 동생이 말도 안 되는 오해 받는 것보다야 훨씬 낫잖아.
물론, 중2병이어도 살아 있는 증거가 어쩌고 하는 것만 제외하면 착한 형이었으니 한별은 잘만 이용해 먹었다.
동생인 나한테 약한, 다정하고 친절하고 착한 형이면 중2병이어도 괜찮아. 지금 한별은 그런 심정이었다.
“살아 있는…… 증거?”
태하의 물음에 한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좀 특이한 형이지만, 뭐…….
“나도 그 이야기, 들어 본 적 있어.”
“어떤 거? 페로몬이 살아 있다는 증거라는 말?”
“응.”
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야 하겠지. 죽은 사람이 페로몬을 풍길 순 없을 테니.
“아무튼, 그래서 형 페로몬이 나한테 조금 묻은 것 같긴 한데…….”
한별이 입을 슬슬 다무는 모습에 태하가 한별의 표정을 확인했다.
확실히 곤란했다. 한별의 부모님은 베타였다. 베타와 베타 사이에서 알파, 오메가 형질의 자식이 생기는 확률은 굉장히 드물었다. 심지어 극악의 확률을 뚫고, 두 형제가 모두 오메가로 발현한 케이스였다.
부모님이 반대를 이겨 내고 결혼을 하셨다던 상황인 탓에, 친척들 역시 유성이 오메가인 것을 몰랐다.
초등학교 5학년에 형질을 발현한 한별과는 달리, 유성의 형질 발현은 상대적으로 늦은 중학교 이후였다.
형질 차별은 많이 사라졌다곤 하나 잔재한 인식이 남아 있기도 하고, 이는 보호받아야 마땅한 부분이었기에 초중고 교사들은 모두 학생의 형질을 비상시를 대비해 확인만 할 뿐 어디에도 언급해선 안 됐다. 만약 이를 누설할 경우, 교직 박탈은 물론이거니와 벌금도 만만치 않았다.
하여 교사들은 학생들의 형질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고, 그들을 제외하곤 환자의 인적 사항을 세세히 기입해야 하는 병원 관계자 몇몇이 진료 받는 환자의 형질을 알긴 알았다.
그러니 언제까지 숨길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느 곳을 가도 법적으로는 열성 오메가 표시가 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형의 선택이라면…….
한별이 태하의 눈치를 살짝 보다, 비장한 표정으로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 별아?”
“부탁할게!”
“뭐, 뭐를…….”
“도와줘!”
제발 어디에도 형의 형질과 관련한 이야기는 얘기하지 말아 주십시오. 한별은 태하에게 간곡하게 고개 숙였다.
“아, 아니, 아무리 형 때문이라지만 막 이렇게 무릎 꿇을 수 있는 거야……?”
“응. 한 자릿수까지만.”
형 새끼의 아이돌 생활을 유지시킬 수만 있다면 이까짓 무릎, 몇 번이라도 더 꿇을 수 있었다. 물론, 한 자릿수까지만. 그 이상 꿇을 순 없었다.
“그럼…… 아홉 번이 한계야?”
“당연하지. 그 이상 꿇어야 하면 그냥 아이돌 때려치우라지. 내가 먼저 신문사에 제보로 터뜨려서 은퇴시킬 거야.”
“…….”
태하는 한별의 단호한 답에 말을 잃었다.
농담 같지만 틀린 말도 아닌 게, 비밀은 쌓이면 쌓일수록 지키기 힘들다. 그쯤 되면 비밀을 지키는 것보다 대놓고 밝히는 편이 나았다.
한별의 모습에 태하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알았어. 나도 도울게.”
역시, 은한이나 재휘랑은 달리 태하는 의리가 있었다. 그 둘이었으면 벌써 그럼 넌 뭘 해 줄 거냐며 온갖 간식과 저녁 식사 메뉴를 뜯겼을 것이다.
한별이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가까이 몸을 숙인 태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조건은 있어.”
“어떤 거?”
제가 해 줄 수 있는 선이라면 할 수 있다. 뭐, 아이돌 데뷔를 원한다면 그 뜻을 전달해 줄 수도 있었다.
물론 연습생으로 바로 꼽아 줄 순 없어도 실력 있는 친구가 있다고 말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연예인 만남? 형 찬스라도 빌려서 방송국 견학시켜 달라고 하지, 뭐!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한별에게 태하가 단호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나한테 연락해 줄 수 있어?”
“어? 무슨 일?”
“그냥, 어떤 일이든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돕고 싶어. 형의 일도 마찬가지야. 비밀이라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난 한별이 네가 너무 혼자 힘들어하진 않았으면 해.”
부탁이 아니라 한별에게만 좋은 상황이었다. 한별에겐 언제나 순수하고 무해하기만 한 태하가 걱정되었다.
“태하야. 밖에서 모르는 어르신이 봉고차에 짐 올려 달라고 하면 나를 꼭 불러. 알겠지?”
“응?”
“내가 없으면, 차 운전하시는 분이 올려 주실 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나와도 돼.”
“……한별아. 너 나를 너무 순진하게 보는 것 같은데.”
“대답.”
한별의 단호한 말에 태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 알겠어. 너야말로 아는 어르신이라고 따라가면 안 돼, 알았지?”
“아는 어르신인데 왜? 난 모르는 사람 따라가지 말라고 한 거잖아.”
“…….”
한별의 말에 잠시 당황한 표정이던 태하는, 이내 다정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