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아이고. 저승사자님… 우리 아이, 아직 죽을 때가 안 되었습니다. 데려가시면 안 됩니다요. 예? 초등학교도 보내고 대학도 보내고 결혼해서 자식도 봐야 하는데 어찌 이렇게 일찍 데려가려고 하십니까?
이른 아침부터 거실이 시끄럽다 했더니 현천이 틀어 놓은 드라마 때문이었다.
고작 두어 시간 잔 게 전부였지만, 편안한 집, 푹신한 침대에서 잔 덕분에 피로가 사라진 도화의 얼굴은 생기 있어 보였다.
도화가 자는 사이 담마는 출근을 했는지 현천 혼자 TV를 보고 있었다.
“괜찮아?”
현천이 기대어 있는 소파에 다가간 도화가 현천에게 물었다.
[안 괜찮을 건 뭐가 있겠어.]
일어나자마자 다짜고짜 괜찮냐고 묻는 도화나, 그걸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현천이나.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현무가 윤회를 했어도 현무가 된 것은 내겐 나쁜 일은 아니니까. 그가 내가 아닌 영귀를 선택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겠지.]
“서운하진 않고?”
묵범이 속도위반을 하면서까지 달렸으나 새벽 3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도착한 도화와 현천이었다. 샤워실에서의 사고 때문인지 묵범은 괜히 도화의 눈치를 보다 집으로 들어갔다.
묵범은 그 뒤로 편히 쉬었을지 몰라도 도화는 현천에게 지난 휴가 기간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해명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어쩌다 현무별저에 가게 되었는지.
그곳에서 만난 현무와 영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잠은 고작 두어 시간밖에 자지 못했지만, 다행스럽게도 현천은 크게 화를 내거나 상심을 하지 않았다.
당장 현무를 만나러 화악산으로 가겠다고 날뛸 줄 알았는데 이상할 정도로 담담했다. 오히려 윤회의 굴레에 오르는 길을 선택한 현무가 생판 모르는 남이 되어 버린 게 아니라 북방흑제 현무 그대로라는 사실에 기뻐하기까지 했다.
[물론 영귀 그놈이 좋다는 뜻은 아니야. 느리고 고집불통에 괴팍한 게 그대로라면 영원히 만나지 않는 게 좋겠군.]
도화는 말없이 현천의 옆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현무가 했던 말을 모두 현천에게 전해 준 도화였다.
영원히 현천을 자신이 데리고 있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는 분명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덤덤했다.
만약 현천이 검이 아닌 사람 모습이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현천의 목소리에서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현무… 만나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
평소에는 자신의 옛 주인인 현천상제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연설처럼 읊었으면서 이제 와 이런 반응을 보이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때가 되면 만나게 되겠지. 옛 주인이 날 싫어해서 그런 건 아니라는 것 정돈 알아. 그러니까 괜히 나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난, 괜찮아.]
괜찮다는 말이 어째 반대로 들린다.
[넌 가서 더 자. 어제 보니까 아주 난리도 아니더만.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이잖아?]
“…….”
너덜너덜이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파악한 도화의 얼굴이 굳었다. 평소라면 헛소리 말라고 한 대 쥐어박았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화를 내지 못했다.
[음? 뭐야? 안 때리냐?]
“됐어.”
소파에서 일어선 도화는 목이 마르다며 주방으로 향했다. 냉수 한 잔을 들고 식탁에 앉은 그는 물을 마시는 대신 휴대폰을 잡았다.
그리고 어디론가 문자를 잡았다.
잠시 후.
딩동- 딩동-.
딩동- 딩동-.
익숙한 박자감의 벨 소리가 도화의 집안을 울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두 번씩 누르는 것만으로도 찾아온 이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저치는 잠도 없다냐? 이른 아침부터 남의 집 벨을 누르고 난리야. 시끄럽게. 드라마 소리가 안 들리잖아.]
잘만 들렸지만, 현천은 괜히 투덜댔다. 괜찮다고 했어도 현무 때문에 마음이 상하긴 한 듯했다.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현관으로 간 도화는 한쪽 면이 너덜거리는 삼선 슬리퍼를 신었다.
[어디 나가냐? 그 차림으로?]
“내 차림이 어때서?”
[거지가 친구 하자고 몰려와도 이상하지 않을… 아니, 됐다. 외출용 옷은 아닌 건 알지?]
노려보는 도화의 눈빛에 찔린 현천은 황급히 말을 바꿨다. 외출용은 아니니 그 차림으로 아파트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의미였다.
“잠깐 편의점 다녀올 거야.”
그 꼴로? 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오늘은 도화와 말씨름을 할 기운이 없던 현천은 말없이 TV 볼륨을 높였다.
현천이 드라마에 집중하는 것을 확인한 도화는 현관 밖으로 나왔다. 말이 밖이지 옆집과 공용으로 사용하는 외부 현관이기에 여기도 집 안이라 할 수 있었다.
“홍도화 씨.”
공용 현관에 비치되어 있는 카우치에 앉아 있던 묵범이 불투명한 하얀 병을 흔들며 도화를 불렀다.
“이게 그거냐?”
“네. 달제가주입니다.”
“한 병이 다야?”
“이런. 이거 한 병 구하는 것도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살잽이 꽃 정도는 아니지만, 이것도 난득지물 중 하나랍니다.”
묵범에게 다가간 도화는 그가 흔들고 있던 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에 병이 닿으려는 순간, 병이 뒤로 물러났다. 들고 있던 묵범의 짓이었다.
“뭐 하는 짓이야.”
“뭐 하는 짓이란 말은 제가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약속이 다르잖습니까?”
“아, 그거.”
약속이란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도화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묵범의 옆자리에 앉았다. 물론 적당한 거리를 두고서.
“자, 해.”
도화는 정신 수양이라도 하듯 정자세로 앉아 앞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묵범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는 모양새였다.
“벌 받으러 왔습니까? 전 선물 받으러 나온 건데.”
‘선물……?’
도화는 자신이 묵범에게 뭔가 주기로 했는지 기억을 되짚었다. 하지만, 고작 5분 전에 주고받은 문자를 자신이 잊어버렸을 리 없었다.
현천한테 주기로 한 술. 줄 수 있냐?
그거 되게 비싼 건데요.
얼만데?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귀한 겁니다. 하지만, 오늘 하루 같이 있어 준다면 드리죠. 밀린 포옹도 해야 하니까요.
나와.
오늘 하루쯤이야. 하루 밀린 포옹은 거절할까 했지만, 계속 거부하고 피했다간 죽을 때까지 따라와서 밀린 포옹 하자고 할 것 같아서 그냥 해치울 수 있을 때 하기로 했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래서 공용 현관으로 불러낸 것이었다. 집으로 들이는 건 위험하다. 담마는 출근했어도 현천이 있다. 아무리 대가라지만, 덩치가 산만 한 남자가 좀 더 산만 한 남자한테 안겨 있는 모습은… 절대 보이고 싶지 않다.
서재나 자신의 방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해도 되겠지만, 그건 그거대로 위험했다. 정확하게 뭐가 어떤 식으로 위험한지는 확정할 순 없지만,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확률이 높다고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자, 그러면 하겠습니다.”
하겠다는 말에 도화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속으로 초를 셀 생각이었다. 묵범의 단단한 팔이 몸에 닿는 게 느껴졌다.
‘한 번 포옹에 10분이니까 600만 세면 되겠… 어?’
이제 가슴에 안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몸이 갑자기 위로 번쩍 들렸다. 놀라서 감았던 눈을 뜨니 예상치 못한 자세가 되어 있었다.
“이건 무슨 짓이지……?”
“이렇게 안는 게 편할 것 같아서요. 어때요?”
“…….”
방금까지 푹신한 쿠션을 뭉개고 있던 엉덩이였는데. 난데없이 푹신함을 잃고 딱딱한 묵범의 허벅지 위에 안착했다.
“너와 내가 이러고 있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안 될 건 뭡니까? 저기 공원 나가 보면 서로 따뜻하게 해 주겠다고 끌어안고 꽁냥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우리라고 못 할 건 없습니다.”
“?”
순간, 도화는 공원, 서로 따뜻하게, 끌어안고, 꽁냥, 우리라고- 중 우선 어느 부분에서 화를 낼지 갈피를 잡지 못해서 입만 벙긋거렸다.
“왜 이렇게 몸이 굳었어요? 춥습니까? 에휴, 아무리 환경보호를 하고 싶어도 한겨울에 이렇게만 입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묵범은 잠시 사고 회로가 멈춘 도화를 추워서 몸이 굳은 것으로 오해하고 도화의 등을 커다란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도화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무릎에 도화를 앉힌 묵범이 등을 소파의 경사진 등 받침에 기대자 자연스럽게 도화의 몸도 묵범을 따라 기울어졌다.
‘이러면 완전히 이 자식한테 기대는 자세가 되겠는데?’
당황한 도화는 우선 이 자세에서 벗어나야겠단 생각에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품에서 벗어나려는 도화를 가만히 내버려 둘 묵범이 아니었다.
따뜻해지라고 등을 쓸어내리던 손이 단번에 도화의 상체를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
“잠깐만. 야, 놔 봐.”
“아직 3분도 안 지났습니다.”
“아니, 이 자세 말고—.”
“전 이게 좋은데요?”
“아, 진짜!!”
“쉿. 그렇게 소리 지르다 현천이 나오면 어쩌려고요.”
“……!!”
묵범의 협박인지 충고인지 모를 말에 버둥거리던 도화의 몸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온 청각을 자신의 집 현관문에 집중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현천이 무슨 일 있냐며 문을 열고 나올 것 같았다. 손도 발도 없는 검 모양의 현천이지만, 현관문 여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도화가 숨까지 죽이며 현천을 신경 쓰는 동안 묵범은 느긋하게 제 품에 얌전히 있는 도화를 감상했다. 처음에는 도화가 원하는 대로 나란히 앉아서 상체만 끌어안는 정도로 끝내려고 했는데.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 그럴 순 없지.’
도화가 안다면 미쳤다고 펄쩍 뛸 일이지만, 지금 묵범은 ‘이미 볼 거 다 본 사이인데 이 정도는 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볼 거 다 본 사이가 된 건 어제부터였다. 샤워실에서 넘어지는 도화를 붙잡았을 때. 허술하게 허리에 둘린 수건이 타일 바닥에 툭 떨어진 순간, 묵범은 이보다 더 제 옆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란 직감이 들었다.
‘현무별저에서 제대로 먹질 못했다더니. 살이 꽤 빠져서 그런가…….’
묵범의 손이 도화의 허리로 스르륵 내려갔다. 도화를 고쳐 안는 척하면서 자연스럽게 허리를 만졌다.
‘역시. 내 눈은 정확해.’
안 그래도 어깨와 가슴에 비해 가느다란 허리였는데 더 가늘어졌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가슴은 그대로였다.
‘여자들은 살이 빠지면 가슴부터 빠진다는데. 홍도화 씨는 여자가 아니라 그런가?’
홍도화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었으나 실낱같이 남은 한 줄기 예의가 묵범을 말렸다.
‘뭐, 찌워 보면 알겠지.’
그리고 어차피 찌울 생각이기도 했다. 덩치에 비해 가느다란 허리가 취향이긴 해도 양손 그득히 잡히는 감촉이 더 중요하다.
‘좀 더 말랑하면 좋겠는데.’
묵범은 옷 위로 잡은 도화의 허리를 가늠하며 어제 일을 떠올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