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우당탕!
시각적 충격에 힘이 빠진 도화가 샤워 부스에서 떨어졌다. 키가 워낙 커서 크게 부딪히진 않았지만, 엉덩방아를 찧어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홍도화 씨? 괜찮습니까?”
묵범이 샤워 부스를 두들기며 도화의 상태를 확인했다.
“신경 쓰지 마!”
벌떡 일어난 도화는 재빨리 물을 틀어 몸에 남은 거품을 씻어 냈다. 바닥에 떨어진 샤워기에서는 뜨거운 물이, 벽에 고정된 샤워기에서는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젠장!’
다급해진 도화에게는 다시 따뜻한 물을 틀 정신이 없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로 거품을 닦아냈다.
“제가 그리 가겠습니다.”
“오지 말라고!”
묵범이 샤워 부스에서 나오려는 실루엣이 보이자 도화는 수건으로 몸의 물기를 닦는 대신 허리에 둘렀다. 그리고 묵범보다 더 빨리 샤워 부스에서 튀어나왔다. 말 그대로 총알처럼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
바닥이 다 씻겨 내려가지 않은 거품으로 엉망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살면서 씻다가 이런 상황을 겪는 게 처음인지라 바닥에 씻고 나올 때는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히 걸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바닥이 미끄럽다는 생각이 든 순간, 도화의 시야가 갑자기 뒤바뀌었다.
‘왜 천장이 보이지?’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균형을 잡을 수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무언갈 잡으려고 손을 뻗었으나 허공만 허우적댈 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묵범의 외침을 듣는 게 전부였다.
“홍도화 씨!”
도화가 뒤로 휘청이는 것을 본 묵범이 샤워 부스에서 튀어나왔다. 쩍! 소리가 나며 부스 문이 반쪽이 나 버렸다.
[뭐냐, 무슨 일이냐? 어? 도화야?]
묵범의 외침에 부용삭과 같이 열탕에 푹 잠겨 있던 현천이 튀어나왔다. 부용삭은 머리만 빼꼼 물 밖으로 내밀었다가 다시 탕 속으로 잠수했다.
‘부딪힌다!’
몸의 균형이 완전히 뒤로 넘어감을 느낀 도화는 곧 강타할 충격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인간처럼 머리가 깨지거나 어디 한 군데 부러지는 일은 없겠지만, 통증마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
도화의 몸을 강타한 것은 샤워실 바닥이 아닌 묵범의 단단한 근육이었다.
“윽…….”
샤워실 바닥보다는 부드럽고 말랑했지만, 그건 샤워실 바닥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말이었다. 넘어가는 도화를 안기 위해 힘이 들어간 묵범의 팔과 허벅지는 돌덩이 못지않게 단단했다.
“괜찮습니까?”
[괜찮냐?]
어느새 날아온 현천이 둘의 주변을 맴돌며 물었다.
[이게 괜찮아 보이는 것으로 보여……?]
도화는 현천에게만 들리게 중얼거렸다. 낮은 중얼거림이었지만, 그 안에 도화의 복잡한 심경이 짙게 묻어났다.
[하, 하하. 어디 안 다쳤으니 됐다. 난 먼저 나가 보마.]
도화와 산 세월이 일이백 년은 아닌 현천은 지금 그가 어떤 심정인지 바로 파악하고 줄행랑을 쳤다. 딱 봐도 저기에 계속 있다간 어떤 불똥이 튈지 몰랐다.
[어휴. 칠칠맞게. 수건이라도 잘 두르고 나올 것이지.]
후다닥 샤워실을 나서던 현천은 자신이 본 도화의 모습을 떠올리고 멈칫했다.
[지금이라도 가서 수건… 덮어 주고 올까?]
슬쩍 뒤를 돌아본 현천은 이내 좀 더 빠른 속도로 샤워실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니야. 괜히 갔다가 묵범과 세트로 묶여서 험한 꼴 당하느니 그냥 자리를 뜨는 게 나아.]
복도로 나오니 뜨끈하게 달아올랐던 검신이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탕 속에 좀 더 있고 싶었는데. 아쉬워하던 현천은 뒤늦게 꾸물거리며 나오는 부용삭을 발견했다.
[네 녀석도 눈치 하나는 빠르군.]
현천의 말에 부용삭은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몸을 배배 꼬아 물기를 쭉 짰다. 바닥에 물이 흥건한 것을 본 현천은 쯧쯧, 혀를 찼다.
전부터 느낀 것이지만, 이 녀석은 참 제멋대로인 성향이 강해도 너무 강했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도화의 명령을 그럭저럭 수행하고 있지만, 언제 전처럼 성깔을 부릴지는 미지수다.
[이봐. 네 주인 말 좀 잘 들어.]
현천의 뜬금없는 말에 부르르 떨며 마지막 수분까지 털어 내던 부용삭이 멈칫했다.
[무뚝뚝해 보여도 자기 것은 잘 챙기는 놈이니까. 오늘 경험했지? 그 끔찍한 동정귀를 칭칭 감았던 너를 버리지 않고 챙겼잖아?]
처음에는 골목길 바닥에 버리고 가 버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데리러 왔다. 약한 모습을 보이니 허리춤까지 내어 주지 않았던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 허공에서 느릿하게 일렁거리던 부용삭이 동그라미를 그렸다. 알았다는 표시였다.
* * *
“…….”
“…….”
강림 도령은 새벽 1시가 넘은 시간에 난데없이 보고를 하겠다며 나타난 묵범과 도화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샤워실에서 씻고 왔는지 둘 다 머리가 촉촉하다 못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묵범과 도화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이유가 있어서 저러는 것이겠거니. 기다리던 강림 도령은 침묵이 20분이 넘게 이어지자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너희… 사고 쳤냐?”
‘사고’라는 말에 도화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본 강림 도령은 둘이 역대급 사고를 쳤다고 오해를 했다.
홍도화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던 강림 도령은 도화의 얼굴을 보고는 살짝 불안해졌다.
‘한동안 추혼부가 잠잠하더라니. 한꺼번에 몰아서 사고를 치려고 조용했던 건가.’
도화의 얼굴은 빨갰다 파랬다, 하얗게 질렸다가 노랗게 뜨기도 했다. 그러다 삽시간에 안색이 어두워지는 꼴이 마치 오방색 같았다.
아무래도 홍도화에게는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 것 같아서 하는 수 없이 묵범에게 물었다.
“무슨 사고를 쳤길래 홍 차사 얼굴이 저러냐?”
“사고요? 아닙니다. 사고는 무슨.”
“그런데 너는 왜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냐?”
묵범의 얼굴은 홍도화와 정반대였다. 도화는 초상집 분위기인데 묵범은 축제 분위기였다. 강림 도령의 말대로 입꼬리가 한껏 올라가 씰룩거리고 있었고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눈도 커졌다 작아지길 반복했다.
자꾸만 끅끅거리는 소리를 내기도 했다. 억지로 웃음을 참다 새어 나오는 것을 꿀꺽 삼키며 나는 소리였다.
“둘 다… 정신 나갔냐? 어디서 저딴 이상한 화단을 뽑아 오질 않나.”
“아, 맞다. 화단.”
화단이란 말에 제정신이 돌아온 묵범이 탁자에 올려 둔 나무 화단을 강림 도령 앞으로 끌고 왔다.
“국장님. 여기서 수상한 냄새 안 납니까?”
“나지. 나니까 지금 네놈들한테 물어보는 거 아니냐. 대체 무슨 사고를 쳤길래 여기서 살잽이 꽃 냄새가 나는 건데?”
강림 도령이 잔뜩 인상을 쓰고 재차 물었다.
살잽이 꽃은 지계의 대지에선 절대 꽃을 피울 수 없다.
하지만, 지금 강림 도령이 궁금해하는 점은 지계의 흙 속에서 나는 살잽이 꽃 냄새 때문이 아니었다.
묵범과 홍도화가 뭘 어떻게 해서 서천 꽃밭에 있어야 할 살잽이 꽃을 지계의 흙 속에 담아왔는지가 궁금했다. 애초에 서천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묵범과 홍도화가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고, 강림 도령조차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서천이었다.
“어서 말하지 못할까?”
묵범이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성질 급한 강림 도령이 묵범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었다.
지금 강림 도령은 서천 꽃밭 꽃감관 안락국이 눈에 불을 켜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모습이 상상되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너, 꽃감관이 얼마나 무서운 놈인지는 알고 살잽이 꽃씨를 훔친 거냐?”
“아, 제가 훔친 게 아니라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저기 떡하니 상한 살잽이 꽃씨가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는데! 악취가 진동을 하잖아!”
강림 도령의 외침에 얼굴을 알록달록하게 물들이고 있던 도화의 코끝이 움찔댔다. 악취가 진동을 한다더니 진짜 냄새가 났다.
“윽… 이게 무슨 냄새야.”
어린이집에서는 맡지 못했던 냄새가 갑자기 확 맡아졌다. 갑자기 강타한 충격적인 악취에 도화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아이고. 내 술 창고에서 이런 끔찍한 악취를 맡게 될 줄이야.”
냄새가 심해지자 강림 도령은 짤짤 흔들고 있던 묵범의 멱살을 놓고 황급히 공기를 정화하기 시작했다. 술 창고를 돌아다니며 곳곳에 놓여 있는 공기청정기의 청정 단계를 최대치로 높이고 돌아왔다.
그 모습을 본 묵범이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물었다.
“공기청정기가 저런 것도 정화합니까?”
황사나 미세먼지도 아니고, 느낌상 사악한 기운이 섞인 것 같은 냄새인데 공기청정기를 튼다고 해서 정화가 될 리가 없었다.
그래서 물어본 것인데 의외로 강림 도령은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구부에서 만들어 준 것이다. 아주 미세한 사기(邪氣)도 감지해서 정화하니까 이제 곧 숨쉬기 편해질 거다.”
강림 도령의 말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숨쉬기가 편해질 정도로 공기가 정화된 게 체감되었다. 도화는 가끔 담마에게서 새어 나오는 아주 극소량의 사기가 생각났다. 가능하면 자신도 몇 대 얻고 싶다고 생각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정신 차려야지. 그깟 몸 좀 보이고 놈의 품에 안겼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니까.’
단지, 엄청나게 부끄러울 뿐이다. 다시 아까 샤워실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 도화는 머리를 마구 흔들어 생각을 날렸다.
“나는 저 흙, 못 파낸다. 괜히 잘못 만졌다가 꽃감관한테 끌려갈라.”
강림 도령은 냄새의 범인인 살잽이 꽃씨가 심긴 화단을 세상에서 가장 징그러운 것을 보는 것처럼 쳐다보았다.
“설명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저도 이게 어찌 된 일인지는 모릅니다.”
묵범은 일주일 전부터 동정귀를 처리하고 있던 일을 시작으로 오늘 있었던 일까지 모조리 설명했다.
다리가 셋인 끔찍한 돌연변이 동정귀에 대해 설명하자 강림 도령이 힐끔 화단을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그거 아무래도… 저 살잽이 꽃 영향인 것 같은데?”
“살잽이 꽃에 그런 기능이 있었습니까?”
“그야 살잽이 꽃 안에 뼈살이 꽃, 살살이 꽃, 피살이 꽃, 숨살이 꽃, 혼살이 꽃이 모두 들어가 있으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저 흙 안에 들어 있는 살잽이 꽃은 상한 것뿐만 아니라 다섯 가지 꽃이 제대로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군.”
“보지도 않고 그걸 어찌 아십니까?”
묵범이 신기해하며 물었다. 묵범으로서는 그저 살잽이 꽃이라는 것과 악취가 심하니 가짜라는 것까지는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림 도령처럼 다섯 가지 꽃 중 무언가가 빠졌다는 것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동정귀가 그곳만 기괴할 정도로 비대해졌다 했지?”
“네.”
질문은 묵범이 받았는데 도화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홍 차사는 여기가 추운가?”
“아, 아닙니다. 그냥 무서운 게 생각나서요.”
“……?”
도화의 입에서 무섭다는 말이 나오자 강림 도령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무섭다는 말이 나온 걸까. 아까 오방색으로 물들었던 게 동정귀 때문이었구나.
강림 도령은 나름대로 도화의 반응을 해석하고는 다시 설명을 이어 나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