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도화는 창문에 박았던 머리를 똑바로 들고 고개를 흔들었다. 몸이 지저분해서가 아니라 정신적 피로를 풀고 싶은 것이니까 갈아입을 옷은 필요 없다. 그저 뜨거운 물만 나오면 괜찮았다.
“담마는 국장님이 집까지 바래다줬다고 합니다.”
“아, 맞다.”
묵범이 말하기 전까지 담마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늦어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도화는 담마에게 오늘은 늦게 들어갈 것 같으니 먼저 자라고 문자를 보냈다.
전 걱정 말고 묵범 아저씨랑 같이 조심히 마무리하고 오세요.
빠르게 온 답장을 확인한 도화는 어느새 한강 다리 가운데에 우뚝 솟아오른 천하대장군을 올려다보았다.
‘진짜 크네.’
도화는 천하대장군의 입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차가 통과하던 중 천하대장군이 입을 닫아 버리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댕강 잘리려나?’
푸흡.
“……?”
멍하니 천하대장군을 쳐다보던 도화는 옆에서 들린 참았던 웃음이 터지는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웃음의 범인이 누구인지 뻔했다.
“왜 웃지?”
왜 웃냐는 질문에 묵범은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천하대장군의 기운 감지 능력은 굉장히 예민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변수에도 분별력이 뛰어나지요. 그러니 우리가 통과 중에 천하대장군에게 씹힐 일은 없습니다.”
“귀신이냐?”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내가 속으로만 궁금해하던 것을 알아차린 것이지?
휘둥그레진 도화의 두 눈을 본 묵범은 참던 웃음을 크게 터트렸다.
어찌나 소리가 쩌렁쩌렁한지 차 안이 울릴 정도였다. 누가 호랑이 아니랄까 봐 커다란 웃음 속에 거대한 육식 동물이 그르릉 목을 울리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저 귀신 아닙니다. 누구든 방금 당신의 모습을 봤다면 저와 같은 대답을 했을 겁니다.”
“내가 무슨 모습이었는데?”
‘누구든’이란 말에 기분이 상한 도화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따지듯 물었다.
“목이 꺾이는 줄도 모르고 창문에 바짝 달라붙어서 천하대장군을 올려다봤습니다. 입까지 벌리고 있던데요? 몇 번 딱, 딱,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부딪치기도 했고요.”
도화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내가 입을 벌리다 못해서 이를 부딪쳤다고? 천하대장군을 무아지경으로 쳐다보느라 전혀 깨닫지 못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뻔하죠. 우리가 탄 차가 천하대장군을 통과하다가 천하대장군이 입을 다물어 버리면 어쩌나— 뭐, 그런 생각을 했겠구나, 했습니다.”
“…….”
도화는 아니라고 반박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어느새 묵범의 차는 천하대장군을 통화가 차사국 주차장에 도착했다.
“추혼부를 지나서 좀 더 들어가면 샤워실이 있습니다.”
묵범이 샤워실 위치를 알려 줬는데도 도화는 입을 꾹 다물고 걸었다. 추혼부로 가는 내내 묵범은 입가에 웃음기를 지우지 못하고 입꼬리가 실룩댔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 귀엽단 말이야.’
덩치는 자신과 큰 차이 없으면서 하는 생각이나 행동 모두 귀엽기 짝이 없다.
‘몸은 야해 빠져 가지고.’
거기다 얼굴은 얼마나 금욕적인지. 얼굴과 몸의 갭 차이만으로도 참기 힘든데 사람을 대하는 행동은 서툴고 생각은 아이 같은 점이 묵범의 핀트를 툭하면 후려치곤 했다.
도화는 자신의 생각을 무섭도록 정확하게 맞춘 묵범과 가까이 있기 싫어서 저 멀리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그런 도화의 뒤를 느긋하게 따라가는 묵범의 얼굴은 즐겁기 짝이 없었다. 그는 도화가 곁에 있는 것 자체가 너무나 재미있었다.
도화가 휴가를 간 일주일 동안 얼마나 기분이 저조했는지 모른다. 도화가 곁에서 사라지자 한동안 해소되었던 갈증이 다시 찾아왔다. 세상만사가 귀찮았고 하필 맡은 임무가 잡귀 중에서도 최악이라는 동정귀였다.
심지어 동정귀는 일주일 내내 묵범을 짜증 나게 했다. 거기에 일면식도 없는 손각시가 나타나 도화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하니, 짜증이 치밀다 못해 당장 그 자리에서 손각시를 흔적도 없이 없애 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들었다.
묵범이란 남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충동적인 상황이란 대부분 새로운 디저트 가게를 발견했을 때, 갑자기 달콤한 음료를 마시고 싶을 때였다.
그때는 아무리 임무 중이라 할지라도 다 팽개치고 충동대로 움직여야 직성이 풀렸다. 긴 시간을 살아온 묵범이 유일하게 가진 취미이기도 했다.
그런 묵범 앞에 홍도화란 반도깨비가 나타났다. 겉과 속이 다리고 얼굴과 몸이 다른, 정말 이상한 나라의 도깨비였다.
얼굴, 몸, 성격, 유능함까지. 무엇 하나 빠질 것 없이 모든 것이 묵범의 오감을 자극했다.
유일하게 검소함만이 부적합했지만, 그가 살아온 세월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기에 그것 가지고 뭐라 할 생각은 없다.
어쨌든, 묵범은 도화가 마음에 들었다. 단순히 마음에 든 것이 다가 아니었다. 얼마 전, 담마와 주고받았던 질답이 떠올랐다.
[좋아하면 잘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홍도화 씨를 좋아한다?]
[그러면 싫어해요?]
[아니, 그럴 리가.]
[그러면 좋아하는 거네.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요?]
그 대화를 끝으로 묵범은 자신이 도화를 좋아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사실, 훨씬 전부터 이상스럽게 홍도화가 신경 쓰인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불유쾌한 쪽으로 신경이 쓰였다면 가차 없이 눈앞에서 치웠을 텐데. 홍도화에겐 애석한 일이지만, 살면서 이렇게까지 즐거움을 선사하는 사람은 없다고 호언장담을 할 정도로 중요 인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담마의 정확한 지적이 없었다면 몰랐을 것이다. 보고만 있어도 자신의 흥미를 충족시켜 주고, 없으면 갈증이 나고, 허전해서 옆에 꽁꽁 묶어 두고 싶고, 야해 빠진 몸도 만지고 싶고.
얼굴은 성욕은커녕 야한 생각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을 것같이 생겼으면서 조금씩 비틀리는 입술이나 눈매는 경국지색 저리 가라 할 정도다.
특히 길게 내려온 앞머리 사이로 살짝 보이는 짜증 어린 눈으로 노려볼 때면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진정하고 싶어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역시. 지금껏 저 남자를 보고 느꼈던 감정은… 단순한 호감이 아니라 좋아해서 그런 것이었어.’
복잡한 것은 질색인 묵범은 그의 성격대로 일말의 고민도 없이 간단명료하게 결론을 내 버렸다.
사실, 좋아한다는 말 하나면 그간 묵범이 도화에게 느꼈던 모든 것들이 시원하게 해결되는 것인데 인정을 안 할 이유도 없었다.
“뭐야. 넌 국장실로 안 가?”
묵범이 계속 따라오자 도화가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히고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아, 저도 볼일이 있어서요.”
“볼일?”
“네.”
도화는 자꾸 따라오는 묵범이 거슬렸다. 그래서 씻을 동안 너는 국장실에 가서 먼저 보고나 하라는 의미로 물어본 것인데 볼일이 있다 하니 더는 할 말이 없다.
결국, 도화는 뒤에 묵범을 매달고 추혼부까지 도착했다.
“잘 씻어요.”
“씻으면 씻는 거지. 잘은 무슨.”
말을 참 이상하게 한다고 꿍얼댄 도화는 묵범이 추혼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좀 더 걸어 샤워실에 도착했다.
남성 표시가 된 곳으로 들어가니 바로 로커 룸이 나왔다. 어서 씻고 싶은 마음에 재빨리 옷을 벗어 넣고 수건을 챙겼다.
[오우. 이거 본격적인데? 샤워실이 아니라 목욕탕이라고 해도 되겠는걸?]
샤워실에 들어가자마자 현천이 신이 나 내부를 둘러보았다. 부용삭은 누구보다 빠르게 뜨거운 탕 속으로 들어갔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이리저리 헤엄치는 것이 아까 골목길 바닥을 비실비실 기어 다니던 녀석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샤워실은 현천의 말대로 대중목욕탕이나 다름없었다. 도화도 뜨거운 탕 속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밖에서 묵범이 기다릴지도 모른단 생각에 샤워만 하고 나가기로 했다.
샤워실의 한쪽 벽면에는 불투명한 유리로 가려진 샤워부스가 쭉 늘어져 있었다. 도화는 가장 끝에 있는 부스로 들어가 뜨거운 물을 틀었다.
벽에 설치된 샤워기에서 김이 날 정도로 뜨거운 물이 바로 쏟아졌다. 선반에 비치된 바디 워시를 손에 짜내 거품을 내어 몸을 닦았다.
‘레몬 향인가?’
어디서 상큼한 레몬 향이 은은하게 났다. 바디 워시 냄새인가 싶었지만, 냄새를 확인해 보니 아니었다.
도화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몸을 씻는 데 집중했다. 뜨거운 물을 틀어 몸에 잔뜩 묻은 거품을 씻어 내니 찜찜했던 기분이 단번에 씻겨 내려가는 느낌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씻으면서 쉬 하는 거 아니죠?”
“……?!”
내가 잘못 들었나?
들려서는 안 되는 목소리가 너무 가까운 데서 들렸다. 그것도 웃기지도 않는 질문까지 더해서.
불길한 기운에 고개를 드니 바로 옆 부스에서 묵범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
너무 놀라서 미쳤다는 말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도화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잡힌 것을 냅다 묵범에게 집어던졌다.
“어이쿠!”
작은 샴푸 통이 묵범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명중했으면 좋으련만. 묵범은 고개를 살짝 꺾는 것으로 여유롭게 피했다.
“추혼부에 볼일이 있다는 놈이 여긴 무슨 일이지?”
“네? 제가 언제 추혼부에 볼 일이 있다고 그랬습니까?”
“볼일이 있다면서 추혼부로 들어갔잖아?”
“아, 그거요. 이거 가지러 갔던 거였습니다.”
묵범이 입에 물고 있던 막대 사탕을 빼내 흔들었다. 묵범의 입 안에서 녹아 작아진 노란 사탕이 조명에 반짝거렸다.
‘어쩐지. 어디서 레몬 향기가 나더라니. 묵범의 사탕에서 나는 냄새구나.’
멍하니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다시 묵범의 입으로 들어가는 사탕을 쳐다보던 도화는 휘파람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물론 휘파람을 분 사람은 묵범이었다.
“홍도화 씨. 진짜 몸 좋네요? 정말 상체 운동 따로 하는 거 없어요? 가슴 근육이 너무 예쁘게 올라왔는데? 허리 사이즈는 몇이에요?”
“…….”
“나는 좀 더 두툼해도 좋은데. 그래야 이렇게 양손으로 꽉! 잡는 맛이 있잖아요?”
도화는 말없이 몸을 돌렸다. 우선 묵범에게서 자신의 중요 부위를 가리는 게 가장 급했다. 당장 저 자식의 주둥이를 현천으로 꿰매 버리고 싶었으나, 그보다도 지금 이 상황을 현천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그래서 최대한 조용하게 해결하기로 했다. 빼서 쓸 수 있는 샤워기를 잡고 수온을 빨간색 최대치로 돌렸다.
“힙업 운동도 따로 하는 겁니까? 어떻게 저렇게 동그랗지? 되게 복숭아 같군요. 향기도 좋으… 읍, 푸푸! 윽!”
도화의 엉덩이 감상을 하던 묵범이 엄청난 수압으로 쏟아지는 뜨거운 물을 맞고 매달려 있던 샤워 부스 벽에서 사라졌다.
우선 묵범을 부스 벽에서 떨어트린 도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본인도 부스 벽에 매달려 묵범을 향해 계속 뜨거운 물을 조준했다.
“아, 잠깐만요. 홍도화 씨? 읍, 물 좀 그만. 홍, 도화 씨?”
신나게 샤워기로 묵범을 공격하던 도화의 눈에 뒤늦게 묵범의 나체가 들어왔다. 수귀를 잡으러 간 홍천강에서 수영복을 입은 묵범을 보긴 했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탈의를 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