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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141화 (142/146)

141화

[지독한 놈! 끔찍한 놈! 내 술 내놔!]

현천은 묵범이 흘린 경면주사 구슬이 떨어져 있었던 바닥을 푹푹 찔렀다.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이 두부처럼 저항 없이 헤집어졌다.

[네놈이 괴이한 동정귀만 아니었어도 내가 달제가주를 마실 수 있는 건데!]

귀하디귀한 술을 놓쳤다는 분노에 골목길 바닥은 엉망이 되었다.

“현천. 그거 다 물리 파손으로 보고서 올려야 해요. 보고서 현천이 쓸 거면 계속해도 됩니다.”

[……난 손이 없는데?]

“보고서가 아니더라도 다른 부서로 차출될 수도 있으니 적당히 하세요.”

[차출? 어디로?]

“현천을 필요로 하는 부서가 어디겠습니까? 무구부겠지요.”

[무구부? 거기가 왜?]

“저번에 홍도화 씨의 귀령면으로 이상한 머리 장식을 만들더니 최근엔 홍도화 씨의 무기인 당신을 연구해 보겠다고 벼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허어… 날 연구해서 무얼 하겠다고.]

현천이 몸을 부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도화의 귀령면으로 이상한 머리 장식을 만들었다는 게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지만, 그래서 그런지 묵범의 말이 불길하게 들렸다.

“묵범, 너… 일주일 내내 방금 그것 같은 것들을 혼자 처리한 거냐…?”

도화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이었다. 방금 막 소멸된 동정귀의 충격에서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일주일 내내 동정귀를 잡긴 했지만, 방금 것처럼 과하게 변이된 개체는 아니었습니다. 아무래도 단순한 동정귀 사건은 아닌 것 같군요.”

“양기 가득한 곳에서 원귀가 일주일씩이나 튀어나오는 것부터 단순 사건은 아니야.”

“다시 어린이집으로 가야겠습니다. 다시 확인해 봐야겠어요.”

묵범이 먼저 골목을 벗어나 어린이집을 향해 이동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묵범의 부용삭이 스르륵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어쩐지 묵범의 부용삭은 힘이 없어 보였다.

“어이. 너도 따라와.”

도화는 여전히 바닥에 늘어져 있는 자신의 부용삭을 불렀다. 하지만, 그의 부용삭은 묵범의 것과 달리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안 오면 버리고 간다.”

도화는 매정하게 몸을 돌려 골목을 벗어났다. 귓가에 동정귀의 찢어질 듯한 웃음이 들리는 것 같다.

‘정신 차려. 이럴 때가 아니야.’

아직 충격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진 않았지만, 소멸된 원귀에게 계속 정신을 팔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최대한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방금 같은 놈이 또 나타날지도 모른단 소리잖아.’

한 놈만으로도 이렇게 정신이 피폐해졌는데 그런 놈이 수두룩하게 생긴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도화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골목에서 벗어나려고 달렸다.

어느새 묵범은 어린이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뭐 있어? 왜 안 들어가고.”

도화까지 왔는데도 묵범은 팔짱을 낀 채 어린이집 입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 이상한 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뭐가?”

“건물 안… 아니, 밖에 있는 것 같은데. 대체 어디지?”

묵범은 도화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건물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좀 해. 너 혼자 일하냐?”

“너무 미미한 기운이라 홍도화 씨는 느끼지 못할 겁니다.”

“방금 이상한 게 느껴지지 않냐고 물어본 건 네놈이거든?”

“생각해 보니까 홍도화 씨는 이 기운을… 아니, 냄새를 맡지 못할 것 같아서요.”

“냄새?”

냄새란 말에 도화는 코를 움찔거리며 묵범이 말한 냄새를 맡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도화의 코로는 차가운 겨울바람 냄새만 맡아질 뿐 이상한 냄새는 전혀 맡을 수 없었다.

“무슨 냄샌데.”

“살잽이 꽃 냄새입니다.”

“살잽이? 그… 누구였더라. 바리공주가 서천 꽃밭에서 가져와 부모를 구했다던 그 꽃?”

“맞아요. 그 꽃입니다.”

“그 꽃 냄새가 왜 여기서 나는 거지?”

냄새는 맡을 수 없지만, 묵범이 난다고 하니 거짓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서천 꽃밭에 있어야 하는 살잽이 꽃은 하계, 그것도 인간들이 사는 곳에서는 절대 피어날 수 없는 꽃이었다.

“음… 진짜 살잽이 꽃 냄새는 아닌 것 같습니다.”

“진짜가 아니라면 가짜란 건가?”

“아마도요. 냄새가 비슷하긴 한데 다릅니다. 뭐랄까… 상큼한 향기 속에 온갖 오물이 썩은 냄새가 섞였다고 해야 하나…?”

뼈, 피, 살을 돋게 하고 숨통을 트여 죽은 자를 살려 내는 엄청난 꽃이니 냄새도 보통은 아니겠거니 싶었는데. 어쨌든 꽃이라고 상큼한 향기가 나는구나 싶었다.

오물 썩은 냄새도 대충 짐작이 간다. 한여름, 음식물 쓰레기를 제때 치우지 않고 방치하면 나는 냄새 정도려나.

하지만, 그 두 가지가 섞였다니. 극과 극, 완전히 정반대의 냄새가 섞였다는 묵범의 말에 도화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어디지?”

묵범은 어린이집 건물을 몇 번이고 돌고 또 돌았다. 아까 낮에 도화가 탐색하다 중단했던 놀이터도 꼼꼼하게 훑고 오물 썩은 냄새가 나니까 음식물 쓰레기를 내다 둔 곳도 확인했다.

그러다 묵범이 멈춰 선 곳은 어린이집 입구 옆에 아주 작게, 마련된 화단이었다. 화단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정말 구색만 맞춰 놓은 모양새라 묵범이 멈춰 서지 않았다면 이런 곳에 화단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지나칠 정도였다.

심지어 한겨울이라 아무것도 심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얼어붙은 흙은 시멘트 바닥이라 해도 될 정도로 딱딱했다.

“뭐 없는데?”

묵범이 화단에서 멈춰 서자 도화가 먼저 화단에 접근했다. 그리고 현천으로 단단하게 얼어붙은 흙을 헤집었다.

[너는 내가 삽으로 보이냐?]

“동정귀 상대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건 그렇다만.]

몸에 흙이 묻는 게 싫었던 현천이었지만, 동정귀 이야기가 나오자 얌전해졌다. 본격적으로 화단을 헤집으려는데 묵범이 도화의 손을 막았다.

“홍도화 씨. 거기까지만 하죠.”

“왜?”

“본디 살잽이 꽃도 우리가 함부로 만지면 안 되는 꽃입니다. 잘못 만졌다간 꽃감관이 잡으러 옵니다.”

“잡히면 어떻게 되는데?”

“평생 서천 꽃밭에서 일해야 할걸요?”

평생이란 말에 도화는 얼른 화단에서 손을 뗐다. 서천이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모르나 천계, 하계, 저승, 귀계, 별천계하고도 전혀 닿지 않는 동떨어진 세계에 있다는 것만 안다.

‘해야 할 일이 태산인데 그런 곳에서 평생을 보낼 순 없지.’

도화가 깔끔하게 물러나자 묵범은 손을 튕겨 근방에 주차된 차들의 블랙박스와 CCTV를 터트렸다.

파파팍! 전자기기 망가지는 소리가 나자 현천이 어이없단 눈으로 묵범을 쳐다보았다.

[아까 나한테는 복상부가 고쳐야 한다고 그러더니. 이런 짓은 괜찮은 거냐?]

“이건 임무에 필요한 행위니까 괜찮습니다.”

묵범은 도화를 뒤로 물러나게 하고 화단을 통째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길쭉한 나무 화단이 무 뽑히듯 쑥 들어 올려졌다. 안에 흙이 가득 차 있어서 무게가 상당할 텐데 묵범은 호흡 한 번 흐트러지지 않았다.

묵범이 부용삭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비실대던 부용삭이 다가와 나무 화단을 칭칭 감았다. 묵범 대신 부용삭이 화단을 들고 묵범의 차가 주차된 곳으로 이동했다.

[쟤는 왜 저렇게 힘이 없냐. 아까는 펄펄 날더만.]

현천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도화를 돕기 위해 동정귀에게 달려들던 기세는 어디 가고 피죽 한 그릇 못 먹은 것처럼 비실대는 꼴이 안쓰러워 보였다.

“동정귀 때문에 충격받았나 봅니다.”

“…동정귀 때문에?”

“네. 저도 놀랐을 정돈데 직접 그것과 접촉한 부용삭은 얼마나 끔찍했겠습니까?”

“맞다. 내 부용삭!”

뒤늦게 자신의 부용삭을 떠올린 도화가 아까 그 골목으로 뛰어갔다. 바닥에 늘어진 부용삭을 그대로 놓고 와 버렸다. 제 부용삭은 동정귀의 몸 전체를 꽁꽁 감고 있었으니 묵범의 부용삭보다 충격이 큰 게 당연했다.

급히 달려간 골목길 바닥에는 도화의 부용삭이 애처롭게 떨어져 있었다. 미동도 없는 것이 누가 보면 붉은색 뱀이 죽어 있다고 해도 믿을 광경이었다.

‘하긴. 뱀처럼 굴긴 하지. 날아다니긴 하지만.’

부용삭에게 가까이 다가간 도화는 부용삭에게 일어나라고 말했다. 차마 동정귀의 몸에 감겼던 것을 맨손으로 잡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역시 아직 동정귀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 철수할 거다.”

철수라는 말에 도화의 부용삭이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도화에게 스르륵 기어 왔다. 하늘로 날 기운도 없어 보였다. 불쌍한 모습에 하마터면 이리 오라고 손을 내밀 뻔했다.

“가서 씻자. 너나 나나 상태가 심각한 것 같으니까.”

씻자는 말에 힘을 얻었는지 바닥을 기다가 둥실 위로 떠올랐다. 더럽게도 말을 안 들어서 얄밉던 부용삭이었지만, 동정귀 때문에 전우애라도 생긴 것인지 도화는 결국 부용삭에게 도포를 열어 보였다.

“자, 이리로 들어와.”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부용삭이 도화의 도포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길쭉한 몸을 돌돌 만 부용삭이 도화의 허리춤에 대롱 매달렸다.

‘뭐, 손으로 잡는 것보다는 이제 나으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도화는 빠르게 묵범의 차가 있는 곳으로 뛰었다. 어서 집에 돌아가 씻고 싶었다.

묵범은 이미 차에 시동을 걸어 둔 상태였다. 조수석에 타고 뒤를 돌아보니 뒷좌석에 넣어 둔 나무 화단에는 안전벨트까지 매어 둔 게 보였다.

“이제 집으로—.”

“차사국으로 갑니다.”

“…차사국?”

당장 집에 가서 씻을 생각에 부용삭까지 허리에 감았는데 차사국으로 간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 떨어졌다.

“아무래도 저건 누가 인위적으로 만든 살잽이 꽃 같습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지금 당장 보고해야 해서요. 피곤하겠지만, 국장님께 보고는 하고 퇴근해야겠습니다.”

“그러면 집에 들러서 씻고 나오면 안 될까?”

도화의 흔치 않은 부탁이었지만, 묵범은 단호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저대로 내버려 두었다간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백미러로 뒷좌석을 확인하는 묵범의 굳은 표정을 본 도화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맨날 싱글싱글 웃던 놈이 저런 얼굴을 하는 걸 보면 지금 상황이 무척 위험한 건 확실했다.

‘하지만, 씻고 싶은데.’

땀을 흘리거나 먼지를 뒤집어쓴 건 아니지만, 현천의 손을 통해 느껴졌던 그 묘하게 단단하면서도 물컹한 감촉이 전신에 퍼진 느낌이라 당장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하지만, 묵범의 차는 한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찝찝한 상태로 몇 시간이나 더 있어야 할지 시간을 가늠해 보던 도화는 이내 창문에 머리를 쿵 소리 나게 기댔다.

굉장히 실망한 도화의 모습에 묵범이 피식 웃었다. 사실 그 역시 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럼에도 집이 아닌 차사국으로 향하는 이유는 화단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차사국에도 샤워실이 있으니 거기서 씻으시죠.”

“차사국에 샤워실이 있어?”

“그럼요. 야근하는 차사가 얼마나 많은데요. 차사국 안내서에 안 나와 있었습니까? 샤워실도 있고 수면실도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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