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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134화 (135/146)

134화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합니까?”

현천에게만 들리게 대화를 하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의 눈에는 깊게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묵범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현무별저에서 여러 가지 일이 있어서 생각 좀 정리했어.”

“정말 휴가를 현무별저에서 지냈습니까?”

“어쩌다 보니…….”

“오늘 집에 가면 더 맛있는 밥을 해 드리겠습니다.”

“?”

도화는 묵범이 대체 왜 이 타이밍에 밥에 꽂힌 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밥 이야기는 그만하라고 거절하려는데.

“그래. 일주일간 고생했을 테니 파트너인 묵범, 자네가 좀 챙겨.”

“현무 식성이면 정말 고생했겠군. 한동안 잘 먹여야겠어.”

강림 도령에 청우까지 나서서 묵범의 말에 힘을 실어 주니 도화는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제가 어련히 알아서 잘 먹이고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왜 네가… 하, 아니다. 됐다. 말을 말아야지.”

괜히 여기서 한마디 했다가는 또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질 것 같아서 참았다. 어서 밥이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게 더 나을 듯했다.

“현무님의 배려로 현무별저에서 지내는 동안 미해결 사건 일지 정리를 마무리했습니다.”

“그래? 현무님에게 들은 바로는 그것 말고도 더 있었는데?”

“그것은…….”

도화는 강림 도령이 현무에게서 대강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했을 때부터 고민을 하던 중이었다.

자신의 기억에 오류가 있다는 것과 만첩으로부터 얻은 기억, 그리고 어머니를 죽인 범인까지.

이 세 가지 모두 도화의 개인적인 문제였다.

‘이걸 국장님께 보고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하지만, 현무는 도화의 개인적 일까지 강림 도령에게 전달했다. 귀찮은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현무가 일부러 강림 도령에게 연락해서 그 이야기를 전했다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닐까?

“왜? 개인적인 문제라 말하기 싫은가?”

강림 도령의 질문에 정곡이 찔린 도화가 움찔했다.

“현무께서 자네 일을 네게 일부러 알린 것을 보면 자네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란 의미인 것 같은데.”

“저도 그게 좀 의아해서 마음에 걸려서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 중이었습니다.”

“이야기해 봐. 여기 모인 사람 모두 믿을 만하니까.”

‘모두?’

도화가 묵범을 쳐다봤다.

“왜 그런 눈으로 절 쳐다봅니까?”

“아니, 뭐…….”

도화가 말을 얼버무리자 묵범이 눈썹을 찡그렸다.

“설마 저는 못 믿겠다, 이겁니까?”

“딱히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바쁜 와중에 당신을 위해 음식까지 만든 사람을 이렇게 취급해도 되는 겁니까?”

묵범은 서운하다고 거듭 말했다. 어깨까지 축 내려간 게 정말 서운해하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에 아니라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괜히 네 멋대로 생각하지 마.”

황급히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묵범을 달랜 도화는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 그냥 이야기하기로 결심했다. 정말이지 묵범, 이 자식은 도움이라고는 발톱의 때만큼도 안 되는 놈이구나.

으득, 이를 갈며 도화는 제게 있었던 일을 하나씩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제 기억에 손을 댄 자가 있습니다.”

도화의 이야기에 세 남자는 숨소리도 크게 내지 않고 집중했다.

* * *

아침 9시가 좀 넘어서 시작된 도화의 이야기는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끝이 났다. 만첩의 단편적인 기억까지 조금씩 덧붙여서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래서 만첩이 준 열매를 먹고 몸에서 향기가 났던 것입니다. 다행히 지금은 사라졌지만요.”

이 말을 끝으로 할 말은 다 한 도화는 세 남자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야기 초반에는 궁금한 것이 생길 때마다 질문을 했었으나, 가면 갈수록 질문 때문에 이야기에 진전이 없자 질문은 나중에 하기로 한 상태였다.

이야기가 끝났으니 질문이 쏟아질 것이라 예상한 것과 달리 셋 중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각자 도화의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복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냥 질문 없이 지나갔으면 좋으련만.’

너무 오래 이야기를 했더니 목이 칼칼하다. 마실 것을 찾던 도화는 술 창고 안에 자신이 마실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림 도령의 술 창고는 오로지 술만 있는 곳이었다.

“물 좀 가져오겠습니다.”

강림 도령이 어서 다녀오라고 손짓했다. 도화는 국장실로 나가 담마가 쓰던 텀블러에 물을 가득 받아 단번에 마셨다.

“후우.”

혼자 고민하고 해결해 보려던 문제들을 모두 털어놓고 나니 꽉 막혔던 속이 뻥 뚫린 기분이다. 거기에 냉수까지 쏟아 넣으니 위가 시릴 지경이다.

다시 물을 받고 있는데 지금껏 끼어들지 않고 관망하던 현철이 불쑥 말을 걸었다.

[속 시원하냐?]

[그럭저럭.]

[내가 저 치들을 오래 본 것은 아니지만, 강림 도령의 말대로 믿을 만한 자들인 건 맞는 것 같아. 그러니 너 혼자서 해결하려고 끙끙대지 말고 어려우면 도와 달라고 해.]

[도움을 받아서 해결이 된다면야 당연히 그럴 거야. 하지만, 나만 아는 기억이 온전치 않은데 저들이 과연 날 도울 수 있을까?]

[그거야 하다 보면 뭐라도 도움받을 수 있겠지. 그런데 도화 너, 아침에 보니까 코트 안주머니를 자꾸 확인하던데. 복권이라도 샀냐? 당첨이라도 된 거야?]

[아, 맞다! 그림!]

도화는 코트 안 주머니에 넣어 둔 종이봉투를 꺼냈다.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림? 갑자기 뭔 그림?]

[그런 게 있어. 들어가서 설명할게.]

어차피 개인적 문제를 다 털어놓은 판에 어머니를 죽인 범인의 몽타주를 숨겨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차라리 같이 보고 같이 찾는 게 낫겠지.’

물론, 몽타주를 봤다고 해서 같이 찾아 주리란 보장은 없다. 하지만, 언젠가 비슷한 사람을 보면 귀띔이라도 해 줄 사람들이니까.

술 창고로 돌아온 도화는 세 남자가 제게 질문을 하기 전, 먼저 만첩의 그림을 내밀며 선수 쳤다.

“이게 만첩이 그린 그 남자의 몽타주입니다.”

“그 남자라면… 자네의 어머니를 공격했다던 그 남자?”

“네.”

“어서 꺼내 봐.”

강림 도령이 재촉했다. 멀쩡히 살아 있는 자가 자신의 존재감을 흐릿하게 만든다?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건 처음 들어 봤다. 저승차사는 흑립을 써야 모습과 기척을 지울 수 있고 도깨비도 귀령면을 얼굴에 써야 그 효과가 발휘된다.

그런데 만첩의 기억 속 남자는 흑립도 귀령면도 쓰지 않은 상태로 그런 능력을 썼다. 당연히 저승차사일 린 없다. 그렇다고 도깨비도 아니었다. 도깨비였다면 만첩이 못 알아챌 리 없으니까.

“이겁니다.”

봉투를 꺼낸 도화는 떨리는 손으로 두 번 접힌 종이를 펼쳤다. 크지 않은 종이에 그려진 그림은 만첩의 솜씨가 수준급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얼굴이군.”

제일 먼저 반응한 사람은 청우였다. 이 남자를 안다, 모른다가 아닌 단순히 확인을 했다는 의미의 감상이었다.

“이것 참, 뭐라고 해야 하나.”

강림 도령은 난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림 속 남자를 모르는 눈치였다. 그래도 뭔가 생긴 것에 대한 감상을 말하고는 싶은 것 같은데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묵범은.

“생긴 게 참 맹숭맹숭하게 생겼군요.”

앞선 두 남자와 달리 간단명료한 감상을 남겼다.

“이건 다 마신 커피 컵 헹군 물에서 나는 커피 향보다도 못할 정도로 흐릿한 인상 같습니다.”

“오호라. 정말 찰떡같은 설명이구나.”

강림 도령이 묵범의 감상을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청우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보아 마찬가지인 듯했다.

도화 역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어떤 것에 비유해도 묵범의 비유 앞엔 명함도 내밀지 못할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만첩의 기억 속 남자의 얼굴은 흐릿한 안개가 낀 것처럼 보였다. 몽타주는 선명했지만, 선명한 만큼 타인의 기억에 남지 않는 자의 얼굴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아마 만첩도 흐릿한 기억을 비틀어 짜내어 그린 것이 분명했다.

청우는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흥미를 보였다. 강림 도령은 옆에서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가설을 세웠다.

“이런 얼굴이라면 하루에 열댓 번은 만나도 다음 날이면 완전히 잊어버리겠어.”

“어쩌면 자신을 보는 사람의 기억에 간섭해서 그런 게 아닐까?”

“기억 간섭? 실제로 그런 능력이 있는 자라면 능력에 제약을 걸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건 굉장히 위험한 영역이다.”

“맞아. 여길 건드리는 것이니 위험하기 짝이 없지.”

강림 도령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 손동작이 어쩐지 두통과 광증으로 죽은 피해자들도 가리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현무께서 왜 자네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내게 전했는지 이제야 알겠군.”

“그게 무슨 뜻입니까?”

강림 도령은 도화가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했다.

“사람의 머리는 큰 충격을 받아서 기억을 잃는 것이라면 모를까, 특정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일은 있을 수 없어. 흑립이나 귀령면은 기억에 간섭하는 게 아닌 착용자의 흔적을 지워 주는 것이니 결이 전혀 다르지.”

“하지만, 저승차사는 인간의 기억을 지우는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도화는 홍천강에서 묵범이 사람들의 기억을 지우고 스스로 휴대폰의 사진을 지우게 했던 것을 떠올렸다.

도화의 질문에 답을 한 사람은 강림 도령이 아닌 묵범이었다.

“저승차사의 그 능력은 인간에게만 효과가 있는 능력입니다. 지울 수 있는 기억도 매우 짧지요. 애초에 인간은 저승차사를 보면 안 되기에 천지왕께서도 허락하신 능력입니다.”

“그래도 기억을 건드린다는 점에서는 결이 같은 거 아닌가?”

“그건 아닙니다. 저승차사가 쓰는 기억 소거술은 인간이 본 저승차사만 지우는 겁니다. 이 흐리멍덩한 남자가 저승차사라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겠지만—.”

“차사국에 이런 밍밍한 놈은 없다.”

강림 도령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린 하지도 말라며 묵범의 가설을 바로 뭉개 버렸다.

“그러면 이놈은 대체 뭐 하는 놈이라는 겁니까?”

“그걸 알면 내가 이러고 있겠냐. 당장 홍 차사에게 복수하러 가라고 등 떠밀고 있겠지.”

“하긴. 그렇긴 하네요.”

만첩의 몽타주까지 공개했지만, 알아낸 것이라고는 남자가 미지의 능력으로 상대방의 기억을 조작한다는 것, 그 능력이 어쩌면 미해결 사건들의 범인의 능력과 동일할지도 모른다는 것.

위의 것도 확정이 아닌 가설일 뿐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작은 단서라도 있으면 구명줄처럼 잡고 이리저리 움직여 보련만. 작은 단서는커녕 오히려 남자에 대한 의문점만 늘어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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