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하루가 지났다고 도화의 몸에서 나던 달콤한 향기는 잔향도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사라졌다. 묵범이 매우 아쉬워했지만, 도화는 그저 다행일 뿐이었다.
담마의 흥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은 것 빼고는 출근길은 평소와 같았다. 도로는 출근 차량으로 여전히 밀렸으며, 묵범의 운전은 여유로웠고, 현천은 얌전히 도화의 목걸이에 매달려 있었다.
문제는 도화의 속내였다.
‘집에 남은 반찬들… 다 갖다 버려?’
그의 마음속에선 치열하게 [갖다 버린다 vs 그냥 먹자] 대결이 진행 중이었다.
‘그 음식들을 다 먹어 버린다면 그 자식이 나한테 더 달라붙지 않을까? 거절하려면 완벽하게 거절해야지. 앞에서만 싫다고 밀어내고 주는 건 군말 없이 받아먹으면 말하고 행동이 다르다고 할지도 모르잖아.’
도화는 자신이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줄도 모르고 깊은 생각에 잠긴 채로 걸었다. 얼마나 깊은 고민에 빠졌는지 담마가 추혼부에 가 보겠다며 인사를 하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음식은 잘못이 없어. 식재료들이 묵범의 요리에 사용되고 싶어서 자란 것도 아니고. 그리고 무엇보다 너무… 너무…….’
맛있다. 맛있어서 문제였다.
아침에 뜨끈하게 데워 먹은 오복탕의 맛이 떠오르자 도화의 미간에 팬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고기는 즐기지 않는 도화였지만, 오복탕 안에 들어 있는 닭고기, 돼지고기는 맛있게 잘만 먹었다. 고기만큼 손을 대지 않았던 게 해산물인데 해삼과 전복도 꼭꼭 씹어 맛을 음미하기까지 했다.
그런 엄청난 음식을 버려야 한다니. 도화의 양심이 절대 그래선 안 된다고 요동쳤다.
요즘 환경 오염이 얼마나 심한데. 도화는 먹을 것이 없어서 나무껍질과 풀뿌리를 씹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아니. 그 시절까지 갈 필요는 없지. 당장 저번 주까지만 해도 시리얼과 국수로 고통받았으니까.’
도화의 고민은 국장실이 있는 복도에 들어섰을 때 끝이 났다. 깊게 팬 미간의 주름도 결심을 한 뒤라 그런지 깔끔하게 펴졌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합니까? 혹시 제 생각을 한 겁니까?”
조용히 도화의 옆에서 걷던 묵범은 도화의 미간이 펴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다음부터 음식 같은 거 해 오지 마.”
“엇… 혹시 입맛에 맞지 않은 겁니까?”
“그건 아닌ㄷ…….”
“흠. 급하게 만들어서 조리가 엉망이었나 봅니다. 그 음식은 그냥 버리거나… 아니, 그냥 제가 수거하겠습니다.”
“뭐? 수거해 간다고? 가져가서 뭐 하게?”
이런 반응을 원한 게 아니었는데?
당황한 도화가 묵범에게 물었다. 도화가 먹던 음식을 다시 가져가서 묵범이 먹을 것 같진 않았다. 애초에 그 음식들은 묵범의 취향과는 완전히 딴판인 음식들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묵범의 대답은 도화가 예상한 대로였다.
“버려야지요. 제 입맛에 맞는 음식은 아니니까.”
“…됐어.”
“네?”
“됐다고. 그냥 먹을 테니까 버릴 생각은 하지 마.”
“맛없는 거 억지로 먹지 않아도 됩니다.”
“맛없진 ㅇ—.”
맛없진 않았다고 말하려던 도화는 황급히 다른 이유를 들어 방어했다.
“너는 지금 지구촌에 기아로 죽는 인간이 얼마나 많은지는 알고 그런 말을 하냐?”
“홍도화 씨…. 환경보호가만 하는 게 아니라 기아난민 구호 활동까지 하는 겁니까?”
“……그래.”
나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기아난민 구호 활동을 어떻게 하겠냐마는. 사실 네가 만든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절대 버릴 수 없다, 내가 다 먹어 버릴 거라고 말할 순 없기에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다음에는 더욱 신경 써서 잘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그런 거 할 시간에 원귀나 하나 더 때려잡아.”
“괜찮습니다. 요리해 보니까 은근 재미있더군요.”
“요리가 재미있다고?”
묵범과 요리. 전혀 어울리지 않건만, 묵범은 정말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먹을 사람이 당신이니까 재미있는 겁니다.”
“제발 그런 말은 좀 넣어 둬. 다른 사람 앞에서도 하지 말고.”
“당연하지요. 제 요리 솜씨가 궁금하다고 만들어 달라고 하면 곤란하니까요.”
누가 그딴 짓을 하겠냐고 말하려던 도화는 뇌리를 스치는 강림 도령과 몇 명의 추혼부 차사들이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빈말도 진담으로 알아먹는 사람들이었다.
“다른 사람은 밥을 먹든 바퀴벌레를 먹든 상관하지 않아요. 그저 홍도화 씨가 맛있는 것을 많이 먹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하는 것이니 사양하지 않아도 됩니다.”
“너는 먹는 이야기에 벌레 이야기를 꺼내야겠냐.”
아침에 먹은 송이버섯 향이 양치를 해도 입 안에 은은히 남아 있는 것 같은데 바퀴벌레 이야기를 꺼내자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하필 벌레 중에서도 그런 걸 고르다니. 정말이지 묵범다웠다.
그렇게 묵범의 요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국장실 앞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여기서 뭔 짓들이냐? 왔으면 들어올 것이지.”
소리도 없이 문을 열고 나온 강림 도령이 도화와 묵범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아주 가지가지 한다.’라는 표정이었다.
“진지하게 홍도화 씨의 식단에 대해 상의하고 있었습니다.”
“허이구.”
“…….”
어째서 부끄러움은 나 혼자만의 몫일까.
도화는 전혀 부끄러울 것 없다는 듯이 당당하기만 한 묵범을 쳐다보다 고개를 돌려 버렸다.
“청우는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부하 녀석들이 이렇게 늦어서야, 원. 어서 들어와!”
월요일 아침부터 강림 도령의 기분은 저조해 보였다. 평소 시간대로 출근했는데 버럭 하는 것을 보면 무슨 일이 터진 것 같았다.
도화는 묵범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자신이 없는 동안 무슨 일이 터졌냐는 질문이었다. 묵범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도 모르겠다고 답했다.
‘하긴. 메시지를 일기 쓰듯 보내던 놈인데. 뭔가 일이 생겼으면 그것도 알려 줬겠지.’
묵범도 모르는 일이라면 주말에 벌어졌다는 소리다. 청우까지 와 있다는 것을 보면 아마도 추혼부에 관련된 사안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할 이야기는 저번 야근의 연장이다.”
술 창고 문을 열며 강림 도령이 경고하듯 말했다.
“홍 차사. 자네한테 들을 이야기도 많고.”
“연락을 받으신 겁니까?”
혹시나 해서 현무에게 연락을 받았는지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강림 도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간략하게 요약된 내용으로 보내서 무슨 일인지 도통 알아먹을 수가 있어야지. 자네와 관련된 중요한 일이 생긴 것 같던데. 이건 맞지?”
강림 도령이 청우 옆에 털썩 앉으며 도화에게 물었다.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한 도화는 품 안에 고이 넣어 둔 만첩의 그림을 손으로 만져 잘 들어 있나 확인했다.
‘나도 정신이 나갔나 보군. 이렇게 중요한 것을 아직도 확인하지 못했어.’
현무별저에서 집으로 돌아온 내내 정신이 없었다. 만첩의 열매 때문에 졸음이 쏟아졌고 묵범 때문에 어지러웠으며 새벽에는 묵범의 음식인 줄 모르고 밥을 먹느라, 아침에는 묵범의 음식인 걸 알아 버려서.
‘죄다 이 자식 때문에 확인을 못 했네.’
도화는 옆에 앉은 묵범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묵범은 그런 도화의 시선도 좋다고 싱글싱글 웃었다.
도화는 강림 도령과 청우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묵범은 두말할 것 없이 도화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탁자 위에 온갖 종류의 술과 술잔이 늘어진 것을 보니 강림 도령과 청우, 둘은 이른 아침부터 술판을 벌이고 있던 듯했다.
무서운 점은 술 창고 안에 술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강림 도령과 청우는 아주 멀끔한 모습인 점이었다. 술을 쏟았나? 싶었지만, 술이라면 아주 애지중지하는 강림 도령의 성격상 그랬을 리는 없고. 탁자 밑에 온갖 종류의 빈 술병들이 술 냄새의 원인으로 보였다.
탁자 위에 있던 마지막 술병을 깔끔하게 비운 강림 도령이 도화와 묵범을 보며 입을 열었다.
“우선 우리 쪽 일부터 이야기하지. 주말에 있었던 일이다.”
역시 도화의 예상대로 주말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번 주 토요일에 하늘개를 포획했다.”
“아직도 못 잡았던 겁니까?”
도화의 질문에 강림 도령은 한심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쌓였던 짜증을 담아 울화를 터트렸다.
“천계 놈들은 말이야. 그래서 문제야. 아주 게을러 가지고. 느려 터졌어. 어엉? 내가 개털을 갖다준 지가 언젠데 이제 잡았다고 아주 의기양양하게 연락을 해서는!”
“여기 천계 출신이 있습니다만.”
묵범이 슬쩍 손을 들며 말했다.
“시끄러워! 너도 말이야, 업무 태도가 얼마나 불량한진 알고 그러냐? 너만 그런 줄 알았는데 그냥 천계 태생이 그런 거였어.”
“국장님. 그건 천계 혐오 발언입니다. 자연권위원회에 접수하기 전에 사과하시죠.”
“흠…. 아닌 선인도 있을 수 있겠지. 그들에겐 사과한다. 너는 빼고.”
“뭐, 그 정도면 됐습니다. 저의 업무 태도가 불량인 것은 사실이니까요.”
“…….”
도화는 할 말을 잃고 강림 도령과 묵범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대체 이게 무슨 대화의 흐름인지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도화도 천계의 일처 리가 답답하긴 했지만, 그래도 다짜고짜 급발진을 하는 것은 좀 당황스러웠다. 그런 강림 도령 앞에서 자기가 천계 출신이라고 어필하는 묵범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거기다 자신의 업무 태도 지적에 기분 나빠 하지도 않고. 심지어 쿨하게 인정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자연권위원회…? 그게 뭡니까?”
인권위원회는 많이 들어봤지만, 자연권위원회는 처음 듣는다.
“너는 저승차사씩이나 돼서는 그런 것도 모르냐?””
질문 하나 했다는 이유로 강림 도령의 짜증이 묵범에게서 도화에게 옮겨 왔다. 정말 궁금해서 질문했다가 느닷없이 화풀이 대상이 된 도화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러자 묵범이 움찔한 도화의 어깨에 팔을 둘러 슬쩍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런 묵범의 태도를 본 강림 도령의 눈이 세모꼴이 되었다.
“너네 지금 무슨 작태냐?”
“저승차사가 된 지 1년도 안 된 사람한테 그런 말은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그런가?”
“거기다 저승차사가 되기 전까지는 하계의 인간들 속에서 살던 사람입니다. 그런 걸 알 리가 없잖습니까.”
“그러긴 하군. 흠. 내가 말을 실수했어.”
“…괜찮습니다.”
도화는 제 어깨에 둘린 묵범의 손등을 거칠게 꼬집으며 말했다. 있는 힘껏 꼬집고 비틀었더니 묵범의 몸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중요한 회의를 하자고 불러 놓고는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청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꽤 참았던 모양인지 목소리에 살짝 노기가 실려 있었다.
“자연권위원회는 인간들이 만든 인권위원회와 같은 거다. 인간은 인권을 따지지만, 이쪽은 천계, 귀계, 별천계 모두 자연권으로 한데 묶어서 관리해. 모든 생명에게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천부권(天賦權)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있는 기구다.”
그래도 착실하게 도화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다. 청우 덕분에 강림 도령과 묵범의 엉망진창 대화가 끝이 나고 드디어 제대로 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