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전날, 묵범 때문에 어지러움을 느낀 도화는 만첩의 그림은 확인도 못 해 보고 다시 잠이 들었다. 딸랑 컵라면 하나만 먹고 하루를 버틴 도화가 새벽에 잠이 깬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먹을 것을 찾으러 주방으로 온 도화는 냉장실 구석에 가지런히 쌓여 있는 반찬통을 발견했다.
‘산월관에서 보낸 반찬인가?’
산월관이라는 이름만으로도 도화의 입 안에 침이 고였다. 그는 산월관 음식을 먹어 보기 전까지는 자신의 식성이 까다롭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고기를 사 먹느니 그 돈으로 두고 먹을 수 있는 반찬을 많이 만들어 두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절약을 위해 먹기 시작한 반찬이 채소 반찬이었다. 나물 무침부터 시작해서 밥 먹을 시간조차 없을 때면 그냥 생오이만 씹어 삼키는 경우도 허다했다.
‘나무껍질이나 뿌리를 먹던 것에 비하면 진수성찬이니까.’
항상 최악이었던 옛 시절과 비교하며 살다 보니, 남들 눈엔 궁상일지 몰라도 도화 본인은 이만하면 살 만하다고 생각했다.
도화가 정말 제대로 조리된 기름진 음식을 먹게 된 것은 묵범에 의해 저승차사가 된 이후였다. 별천계에 있는 산월관에서 처음으로 최고급 소고기를 구경했다. 구이부터 찜, 육회 등등 다양한 방법으로 조리된 음식은 무엇부터 먹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그러나 결국 도화의 젓가락은 나물 반찬으로 향했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을 줄 안다는 말이 있지만, 도화는 그런 경우가 아니었다.
먹었지만 취향이 아니었다. 맛이 없는 것은 아니나 고기보다는 채소가 좋았다. 다른 차사들이 고기 요리 때문에 산월관이 최고라고 할 때, 도화는 나물 요리 때문에 산월관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도화의 식성은 그러했다. 그리고 냉장고 안에서 꺼낸 반찬통 안에는 모두 도화가 좋아할 만한 반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시간에 밥 먹는 것은 좀 그렇고… 맛만 봐야지.’
도화는 식탁 의자에 앉아 반찬통 뚜껑을 하나씩 열었다. 제일 큰 통에는 오복탕이 들어 있었다. 도라지, 닭고기, 돼지고기, 해삼, 전복이 듬뿍 들어 있는 것이 냉장고에서 차갑게 식었어도 맛있어 보였다.
대접에 먹을 만큼만 덜어 낸 도화는 나머지 반찬통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고사리무침, 월과채, 잡채, 초나물, 그리고 붉은 양념을 얹은 민어찜까지.
보기만 해도 손이 굉장히 많이 간 음식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꿀꺽.
도화는 저도 모르게 고인 침을 삼켰다. 이 시간에 밥을 먹는다는 것은 몸에 매우 미안한 일이었지만, 이런 진수성찬을 코앞에 두고 구경만 하는 것 역시 음식에게 미안한 일이었다.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밥솥을 열었다. 평소처럼 하얀 쌀밥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도화는 밥 위에 올려진 버섯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송이버섯?’
밥 위에 올려진 것은 얇게 저며 올린 송이버섯이었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하얀 김은 밥과 송이버섯 냄새가 섞여 도화의 식욕을 자극했다.
못 참겠다.
도화는 밥주걱 대신 숟가락을 들어 밥을 펐다. 조금만, 맛만 봐야지 했던 것은 잊어버렸는지 밥그릇에 봉긋하니 하얀 언덕이 생겨났다.
나머지 반찬들도 먹을 만큼만 접시에 덜어 낸 도화는 그렇게 성대한 야식을 먹기 시작했다.
* * *
“삼촌. 새벽에 식사했어요?”
출근 전, 아침 식사를 하려던 담마는 밥솥의 밥이 살짝 줄어든 것을 보고 도화에게 물었다.
“잠깐 거실에 나왔다가 살짝 출출해서.”
“아하.”
담마는 도화의 말에서 거짓과 진실을 바로 파악했다. ‘살짝 출출해서’는 진실이고 ‘잠깐 거실에 나온 것’은 진실이지만, ‘잠깐 거실에 나왔다가’는 거짓이 분명했다.
도화의 방엔 마실 물도 있고 화장실도 있었으니까. 새벽에 TV를 보러 나올 사람도 아니고 자기 전 읽을 책도 항상 한 권씩은 골라서 방에 가져다 두는 사람이니 거실에 나온 것은 배가 고파서가 뻔했다.
‘컵라면 하나만 먹고 종일 잠들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야식을 먹은 게 죄도 아닌데. 삼촌에게는 부끄러운 일인가 보구나 싶은 담마는 그러냐고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펐다.
식탁에는 새벽에 도화가 조금씩 맛을 보았던 반찬이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차갑게 맛보았던 오복탕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을 본 도화는 참지 못하고 숟가락을 들었다.
“그 자식이 오기 전에 어서 먹자.”
“아, 맞다. 그 자식… 아니, 이게 아니지.”
“음?
밥 한술을 입에 넣고 오복탕을 뜨려던 도화는 무슨 일이냐는 눈빛을 보냈다.
“이거 묵범 아저씨가 다 만들어 온 거예요.”
“……?”
열심히 밥을 씹던 도화의 턱이 우뚝 멈췄다.
“국에 반찬에… 밥까지 잔뜩 해 오셨더라고요.”
“므… 뭐라고?”
간신히 입에 있는 것을 삼킨 도화는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하냐며 머리를 흔들었다.
“진짜요. 어제 삼촌이 다시 잠든 사이에 범 아저씨가 삼촌이랑 같이 먹으라고 주고 갔어요.
“산월관 음식이… 아니었어?”
“저도 처음에는 산월관 음식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산월관에서 보내 줄 땐 이런 통에 담겨 있지 않잖아요?”
“…….”
맞는 말이다. 산월관에서 음식을 보낼 때는 산월관에서만 쓰는 용기에 담아서 보냈다. 애초에 산월관이 도화에게 보낼 택배를 묵범에게 보낼 리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진짜 그 자식이 만든 거라고?’
도화는 씹던 밥을 급히 삼키고 젓가락을 든 채 유심히 식탁 위 음식을 관찰했다. 혹시 음식에 이상한 것을 넣었나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면 새벽에 먹었을 때 탈이 났어야 했다.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삼촌, 빨리 먹고 일어나야 해요. 묵범 아저씨 오겠어요.”
“벌써?”
놀란 도화는 부지런히 숟가락을 놀렸다. 사람이 문제지 음식엔 죄가 없으니까-라고 생각하며 빠르게 아침 식사를 끝냈다.
* * *
“아침, 맛있게 먹었습니까?”
‘젠장.’
공기청정기까지 풀로 틀어서 환기를 했건만. 묵범의 코는 개코인지 현관문만 열었는데도 음식 냄새를 맡고 웃으며 물었다.
“시간이 없어서 간도 제대로 못 봤는데. 짜거나 싱겁진 않았죠?”
“…정말 네가 만든 거냐?”
도화의 질문에 묵범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당연하지요. 제가 홍도화 씨를 얼마나 생각하는데요.”
“대체… 무슨 이유로 내가 먹는 것까지 네가 신경 쓰는 건데?”
“그야 당신이 휴가지에서 식사를 제대로 했을 것 같지 않아서요.”
“…….”
도화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 반응에 묵범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홍도화 씨가 휴가를 절에서 보내지 않는 이상 당신 입맛에 맞는 음식이 나올 리 없으니까요. 그리고 너무 풀만 먹는 것도 몸에 좋지 않습니다. 그러다 쓰러져요.”
“소는 풀만 먹어도 논일, 밭일 다 하거든?”
“그거야 소니까요. 홍도화 씨는 소가 아니잖습니까?”
“…출근이나 하자.”
더는 반박할 거리가 없어졌는지 도화는 출근으로 화제를 돌렸다. 묵범의 어깨를 밀치고 밖으로 나온 도화는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먼저 올라탔다.
그리고 닫힘 버튼을 눌러 버렸다.
“어? 홍도화 씨?”
“삼촌?”
[뭐 하냐? 니?]
이제 막 현관에서 나온 묵범과 담마, 현천이 당황한 목소리로 도화를 불렀다. 엘리베이터를 탈 사람이 여기 셋이나 남았는데 문을 닫아 버리다니. 당황할 수밖에.
현천이 빠르게 날아와 열림 버튼을 눌렀지만, 그보다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히는 게 더 빨랐다. 닫히기 직전 문틈으로 본 묵범의 얼굴에는 당황함은 사라지고 재미있다는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홀로 엘리베이터에 탄 도화는 참았던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손으로 가리지 못한 도화의 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목덜미도 붉은 기가 서서히 올라왔다.
‘미쳤지. 거기서 왜 심장이 나대냐고.’
쿵쿵 뒤는 심장 소리를 묵범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재빨리 그에게서 멀어져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또한 밀폐된 공간이니 들킬 것 같아서 현천과 담마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냅다 닫힘 버튼을 눌러 버렸다.
“하아…….”
한숨을 쉰 도화는 엘리베이터 벽에 이마를 박고 중얼거렸다.
“진짜 직접 만든 음식이었다니…. 거기다 내 입맛은 어떻게 잘 알고 만든 거지? 직접 장을 본 건가? 주방에서 칼질을 했다고? 저 묵범이?”
중얼거릴수록 도화의 얼굴이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도화는 주먹으로 심장이 있는 가슴을 쿵쿵 치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사실 제정신으로 이러는 중이지만, 인정하기 싫었다.
“보고 싶다고 메시지로 그 난리를 쳐 놓고 정작 내가 왔을 때 자리를 비운 게 미안해서 그런 것이겠지.”
하지만, 이것 역시 묵범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차라리 산월에게 부탁해서 도화가 좋아할 만한 음식을 보내 달라고 했으면 했지, 본인이 직접 음식을 만들 이유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는 직접 죽을 만들어 가져왔었잖아.’
이쯤 되니 ‘얘가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지?’란 생각이 들었다.
‘전생에 나한테 크게 빚진 게 있나?’
물론 묵범이 전생을 기억할 린 없겠지만, 만약 전생의 인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제게 잘 대해 주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묵범이 제게 하는 언행을 그저 ‘잘 대해 준다.’라는 말로 설명하기에는 많이… 아주 많이 부족했다.
허락도 없이 허리나 엉덩이를 만지고, 인공호흡이란 명목하에 입술을 부볐다. 어제는 야근을 도와준 대가가 밀렸다며 20분이 넘도록 끌어안겨 있기까지 했다.
‘거기다 목덜미도 핥았지.’
어제 당했던 일을 떠올린 도화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추운 것도 아니면서 괜히 ‘춥나?’라고 혼잣말을 하며 코트 깃을 세웠다.
잠시 후 중력을 거스르는 묘한 감각이 사라지며 엘리베이터가 부드럽게 멈췄다.
-1층입니다.-
1층에 도착했다는 안내음을 들은 도화는 괜히 움찔했다. 어차피 자신이 먼저 엘리베이터를 탔으니 문이 열려 봤자 주차장엔 아무도 없겠지만-.
“생각보다 엘리베이터 속도가 늦군요.”
“……?”
없어야 했는데.
엘리베이터 문 앞을 묵범이 가로막고 있었다.
“뭐야. 어떻게…?”
“삼촌! 묵범 아저씨 엄청 빨라요!”
“빨라? 뭐가?”
묵범의 옆에서 담마가 발을 구르며 도화에게 설명했다. 흔치 않은… 아니, 처음 보는 흥분한 모습이었다.
“삼촌이 엘리베이터 타고 혼자 내려가니까 저를 한 팔로 이렇게 들고.”
‘이렇게’라고 말하자 묵범이 재연이라도 하듯 팔을 뻗어 담마의 허리를 둘러 휙 들었다. 그러자 담마는 마른 빨래를 걷어 팔에 걸어 둔 것처럼 묵범의 팔에 걸려 대롱거리는 모습이 되어 버렸다.
“위로 휙 던져졌는데, 떨어지니까 호랑이 등이었어요. 묵범 아저씨가 시커먼 호랑이로 변해서 절 태우고 계단을 나는 것처럼 뛰어 내려갔는데 1층에 도착하니까 삼촌이 탄 엘리베이터는 30층을 지나고 있더라구요.”
[흠흠. 진짜 빠르긴 해. 자네 덕분에 오늘은 아침부터 재미있었다네.]
“허…….”
묵범은 엘리베이터보다 빨리 내려온 자신을 칭찬해 달라는 것처럼 두 눈을 반짝이며 도화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도화는 그런 묵범의 시선을 외면하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출근이나 하자.”
계속 묵범의 시선을 마주했다간 그의 기대에 부응해 버릴 것 같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