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미쳤다.
저 새끼는 미친 게 틀림없다.
도화는 아쉬워하는 묵범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그래 봤자 침대 위였지만.
‘잠깐. 침대? 이게 더 위험한 거 아니야?’
뒤늦게 자신과 묵범이 있는 곳이 침대 위라는 것을 깨달은 도화는 미련 없이 침대를 벗어났다. 무엇이 어떻게 위험한지까지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그냥 본능이 침대를 벗어나라고 시켰다.
“뭘 그리 예민하게 그럽니까? 그냥 궁금해서 그런 것뿐입니다.”
“너는 궁금하면 사람을 핥냐?”
“에이. 그럴 리가요.”
“그런데 나한테 왜 그래?”
도화는 이제 화보다는 대체 제게 왜 이러는지 궁금한 마음이 더 커졌다. 궁금하면 말로 물어봐야지. 내가 사탕도 아니고. 왜 핥는지 도저히 이해 불가였다.
하지만, 묵범은 도화의 질문에 대답 대신 볼을 쭉 내밀었다.
“귀물이면 물러가고 홍도화 씨면 뽀뽀하라고 했는데. 홍도화 씨가 맞죠?”
“뭐야. 너 지금…….”
도화가 입을 말을 하다 말았다. 할 말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기가 차서 잃어버렸다는 말이 정확했다.
묵범은 그런 도화를 향해 손가락으로 제 볼을 톡톡 건드리며 다시 말했다.
“여기 뽀뽀.”
“……”
도화가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입술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뽀뽀가 싫으면 키스?”
키스란 말에 도화가 움찔했다. 그리고 탁자로 손을 뻗어 아무거나 잡히는 것을 묵범에게 집어 던졌다.
로드샵에서 1+1할 때 산 로션 병이 묵범에게 날아갔다.
“읏차.”
물론 묵범이 순순히 맞아 줄 리 없었다. 그는 가뿐하게 받아 낸 로션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았다.
“이상하네. 이 향기가 아닌데.”
“뭐. 무슨 향기.”
“홍도화 씨 몸에서 나는 향기요. 꽃향기인데, 굉장히 달아서 먹고 싶을 정도거든요.”
“……내 몸에서?”
제 몸에서 향기가 난다는 말에 도화는 팔에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러자 은은하게 만첩도화의 향기가 맡아졌다.
‘만첩 열매를 먹어서 그런가?’
은은하지만, 다디단 향기가 났다.
‘저 자식이 왜 핥았는지 알겠군.’
단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놈이니 눈이 돌아갈 만했다.
“홍도화 씨.”
묵범은 들고 있던 로션을 다시 도화에게 던지며 말했다. 도화가 손을 뻗어 날아온 로션을 받는 사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묵범이 도화의 허리에 팔을 감아 잡아당겼다.
“뭐야. 안 풀어?”
묵범에게서 벗어났더니 다시 그의 팔에 갇혀 버린 도화가 잔뜩 인상을 쓰고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묵범은 기다렸다는 듯이 코가 맞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말했다.
“집에 왔는데 제가 없어서 삐졌습니까?”
“…미쳤군.”
묵범을 쳐다보던 도화가 고개를 홱 돌렸다. 묵범이 집에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왜 자신의 기분이 나빴는지, 지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미쳤다는 말은 묵범에게 한 말이지만, 도화 본인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홍도화 씨. 솔직하게 말해 봐요.”
“뭘?”
“오래간만에 저 만난다고 향수 뿌렸죠?”
“아니야.”
“에이~ 아닌데.”
“뭐가 아닌데?”
“향기가 너무 제 취향인데요? 내가 이렇게 달콤한 향기를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고.”
도화는 어디서부터 아니라고 반박해야 할지 고르지 못해서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묵범은 그런 도화의 태도를 보고 자신의 생각에 더욱 큰 확신을 가졌다.
“역시. 아닌 척하지만, 홍도화 씨는 저를—.”
“다 아니야.”
“…예?”
“내가 집에 온 것과 네가 집에 없는 것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야. 내 몸에서 나는 향기는 향수가 아니야. 그리고 차사국 사람들한테 네 향수 취향에 대해 물어보면 백이면 백 다 똑같은 정답을 말할 거다.”
“음? 그게 왜요? 어쨌든 지금 당신의 몸에서 나는 향기가 제 취향에 딱 들어맞는 건 사실이잖습니까.”
“…그러니까 널 위해서 나는 향기가 아니라고!”
참다못한 도화가 결국 묵범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 저주받은 주둥이를 계속 나불댈 게 뻔했다.
도화의 허리에서 팔을 풀고 뒤로 물러선 묵범은 주먹이 살짝 스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향기 너무 좋은데.”
“아.”
살다 살다 혈압 오르는 느낌을 생생하게 느낄 줄이야. 모두 다 묵범 탓이다. 뻐근한 뒷목을 손으로 주물렀다. 고혈압으로 급사한 최초의 귀물이 되긴 싫다.
‘어지러워.’
안 그래도 만첩의 조각난 기억 때문에 정신없는데 묵범까지 합세하니 이제 어지럽기까지 했다.
“나가.”
축객령을 내렸으나 묵범은 품에 안기라는 듯이 양팔을 벌리며 말했다.
“아직 밀린 포옹 많이 남았습니다.”
“난 그딴 거 하겠다고 말한 적 없어.”
“하지만, 전 당신의 야근을 도왔으니 제가 원하는 대가를 받아야 합니다.”
“하아…….”
도화는 너무 어지러운 나머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니까 제발 좀 나가.”
“하루 10분. 총 열흘. 총 100분. 1시간 40분. 오늘 20분 정도 했으니까 1시간 20분이 남았습니다.”
“알았다고. 그러니까 가라, 좀.”
그렇게 도화는 간절히 빌듯 말하며 묵범의 등을 떠밀었다. 도화의 손에 밀려 방에서 나온 묵범은 방문 앞에 나란히 서 있는 담마와 현천을 맞닥트렸다.
[흠, 흠. 분위기 좋더구먼.]
현천이 먼저 운을 뗐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본 안의 상황은 담마가 보기에도 분위기가 묘했다. 도화는 거친 말과 태도를 보이면서도 목덜미나 귀 끝을 붉게 물들이더니 싫다고 하면서도 밀린 포옹을 허락하는 말까지 하고 말았다.
“삼촌, 너무 괴롭히지 마세요.”
“음? 나는 사실대로 말한 것뿐인데?”
담마는 방 안의 도화가 들을세라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그래도요. 사실이어도 너무 그렇게 들이대면 오히려 역효과만 날 뿐이라고요. 삼촌 성격을 그렇게도 몰라요?”
묵범은 제 귀에 속삭이는 담마의 귀에 똑같이 속삭여 주었다.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야.”
“……네?”
당황한 담마가 반문했다. 일부러? 일부러어?
당황이 어이없음을 지나 기가 차서 묵범을 흘겨보았다.
[호오… 정말 보기 드문 미친놈일세.]
현천의 혼잣말에 담마도 동의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고 만나 본 사람도 한정적이지만, 묵범의 행동이 정상은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담마는 묵범의 팔을 붙들고 자신의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계속 도화의 방 앞에서 이야기했다간 목소리를 낮춰도 들릴 것 같아서였다.
“자, 여기 앉아요.”
묵범을 자신의 의자에 앉힌 담마는 그의 앞에서 팔짱을 끼고 답답하단 듯이 물었다.
“좋아하면 잘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홍도화 씨를 좋아한다?”
담마의 질문에 묵범이 깊은 고민에 빠진 사람처럼 턱을 매만지며 반문했다. 담마에게 하는 반문이 아닌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이었다.
“아니에요?”
“흐음.”
묵범이 대답을 회피하자 담마는 방향을 바꿔서 질문했다.
“그러면 싫어해요?”
“아니. 그럴 리가.”
이번에는 회피나 고민 없이 즉답했다. 이에 담마는 가볍게 손뼉을 치며 결론을 냈다.
“그러면 좋아하는 거네.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요?”
“…그렇게 되나?”
너무나 쉬운 문제를 왜 어려워하냐는 질문에 묵범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흔들었다.
“하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상대로 이런저런 짓을 하고 싶단 생각을 할 리가 없지.”
“이런저런 짓……?”
[그거 굉장히 위험하게 들리는데… 나만 그런 거냐?]
현천이 슬쩍 담마에게 물었다. 담마도 ‘설마, 아니겠지.’라는 표정으로 묵범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저도 좀… 아니, 많이 위험하게 들리긴 하네요.”
“이런. 나처럼 무해한 진선이 어디 있다고.”
“아, 예…….”
“그래. 담마, 네 덕분에 내가 지금까지 왜 그랬는지 이제야 이해가 가는구나.”
“지금까지? 뭘 어쨌는데요?”
“비밀.”
“엑.”
비밀이라 말 한 묵범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난 이제 가 봐야겠다.”
“어딜요.”
“네 삼촌이 돌아온 걸 확인했으니 하던 일 마무리하러 가야지.”
“아… 그 동정귀요? 다 잡은 거 아니었어요?”
담마의 질문을 받은 묵범은 지긋지긋하단 듯이 한탄 섞인 긴 한숨을 내쉬었다.
“새끼들이 총각 딱지도 못 떼고 죽었으면 다음 생에서 기약해 볼 것이지. 고작 동정으로 죽은 것 가지고 원한을 품고 사람한테 해를 끼치고 다니는 놈들이야. 거기다 무슨 바퀴벌레도 아니고, 한 놈 없애면 세 놈이 튀어나오니 원.”
“으…….”
“그러니 다른 원귀들도 동정귀라면 비웃지.”
“빨리 가서 다 잡아 주세요. 듣기만 해도 끔찍하네.”
묵범은 내일 아침에 보자며 손을 흔드는 담마에게 같이 손을 흔들고 방에서 나왔다.
“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려던 묵범은 굳게 닫혀 있는 도화의 방문을 보고 멈춰 섰다.
‘휴가지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건 분명한데……. 무슨 일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단 말이야.’
마음 같아서는 다시 저 방으로 들어가 궁금한 것을 꼬치꼬치 캐묻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정말 제대로 한 대 맞을 것 같아서 참았다.
‘어차피 내일 다 알게 될 테니까.’
그냥 놀라고 준 휴가가 아니니 내일 출근하자마자 국장실로 가야 할 것이다. 저 향기의 정체가 무엇인진 몰라도 자신이 맡은 향기를 강림 도령이 맡지 못할 리가 없었다.
분명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터.
‘사지 멀쩡하게 돌아왔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내일 들어도 상관없겠지.’
도화의 안위를 확인한 묵범은 바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어서 남은 동정귀들을 몰살해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사실 동정귀 임무는 도화의 휴가가 끝난 뒤에 함께 처리할 일이었다. 그런데도 일하기 싫어하는 묵범이 자신의 주말까지 반납하며 고군분투하는 이유는 동정귀와 도화를 만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굳이 더러운 새끼들과 마주치게 할 필요는 없지.’
손각시보다 더 귀찮은 귀신이 동정귀다. 손각시는 원한이 너무 심하지 않으면 말로 타이르기가 가능했지만, 동정귀는 목적이 동정 탈출이기에 별 희한한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희한한 상황이라 함은 99.9% 부정적인 상황으로, 지금 묵범은 일주일 내내 아주 상식 이하의 놈들을 처리하는 중이었다.
‘거기다 손각시까지 합세하다니.’
집으로 돌아온 묵범은 다시 나갈 준비를 했다. 준비는 별것 없었다. 도화가 돌아오면 주려고 만든 반찬이었다.
휴가를 어디서 지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은근 입맛 까다로운 홍도화가 제대로 식사를 했을 리가 없다. 어디 산속 깊숙한 절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템플 스테이를 하러 갔을 수도 있겠군. 요즘 절들은 그런 것도 많이 하니까.’
하지만, 홍도화의 성격상 식사까지 생각해서 휴가지를 정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집에 오면 티는 안 내더라도 배가 고파 할 것 같아서 도화가 좋아할 만한 것들로 음식을 만들어 둔 상태였다.
그것도 이른 아침부터 말이다. 도포가 아닌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부산스럽게 시간을 보낸 묵범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