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결국, 시리얼과 국수는 선택지에서 배제되었다. 오늘뿐 아니라 앞으로 최소 1년은 아예 눈길도 주지 않을 기세였다.
그래서 결국 식탁에 오른 것은 컵라면이었다.
후루룩-.
국물과 함께 면발이 빠르게 도화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담마와 현천은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컵라면 하나를 해치우는 도화에게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으나,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마지막 한 방울의 국물까지 마신 도화의 눈이 절반은 감겼기 때문이었다. 자면서 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였다.
“빨리 가서 자요.”
“응.”
결국, 도화는 담마에게 빈 컵라면 용기를 뺏기고 방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는 눈이 완전히 감겼는데도 착실하게 양치까지 하고 나서야 침대에 누웠다.
‘이제 잠들면 기억이 조금이라도 나려나.’
만첩의 기억이긴 하지만, 그것마저도 100%의 확신은 없다. 그래도 도화는 희망을 갖고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만첩이 준 몽타주 그림도 확인해야 했지만, 수마가 너무 강력해서 코트 안주머니에 넣어 둔 그림의 존재마저 지워졌다.
* * *
누가 깨운 것도 아닌데 눈이 떠졌다. 도화는 멍한 정신으로 천장을 쳐다보다 눈알만 굴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8시였다.
‘아침인가…? 아니면 저녁?’
누가 머릿속을 진탕으로 휘저은 것 같아서 도무지 또렷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뭔가 생각날 것 같은데 뿌옇기만 하고, 잡힐 것 같은데 손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그런 답답함이 도화의 속을 뒤집었다.
‘예전에 쓰던 내 컴퓨터 같네.’
용량이 가득 찬 하드 디스크에서 파일을 검색하는 기분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파일 검색에 진전이 없어서 결국 검색을 포기하고 하나하나 눈으로 확인해 가며 찾던 기억이 떠올랐다.
‘옛날 컴퓨터 기억은 나면서 왜 만첩의 기억은 엉망인 건데.’
머리에 가득 낀 안개가 조금씩 걷히고 있지만, 기억은 여전히 뒤죽박죽 엉망으로 얽혀 풀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이 있던 것 같은데. 그것도 영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 좀 더 있어 보면 생각나려나.
졸리진 않지만, 멍한 머리 때문에 가만히 누워 있는 도화의 귀에 작은 소란이 들렸다.
‘뭐지?’
귀를 기울여 보니 현관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누가 집에 왔나 보다, 생각한 도화가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상체를 일으켰다.
쿵, 쿵. 묵직한 발소리가 점점 도화의 방을 향해 다가오는 게 들렸다.
‘누군데 저렇게 조심성 없이 걸어. 담마는 아닐 테고. 누구—.’
“홍도화 씨!!!”
누군지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도화의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묵범이 들이닥쳤다. 어찌나 도화의 이름을 크게 외쳤는지 이미 깬 잠이지만, 내일 치 잠까지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남의 집에 연락도 없이 갑자기 쳐들어오는 것은 어디서 배운 예의지?”
도화가 잔뜩 인상을 쓰고 따졌지만, 묵범은 아랑곳하지 않고 도화의 침대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늘은 피곤하니까 이만 돌아ㄱ— 윽…!”
이번에는 하던 말을 끝맺지 못할 정도로 강하게 도화의 몸을 끌어안았다. 침대 헤드에 상체를 기대어 앉아 있던 도화는 갑작스레 끌어안겨 몸이 굳었다.
‘뭐지? 이 상황은?’
당황한 도화는 묵범에게 끌어안긴 채 두 눈만 껌뻑였다. 아직 머리가 멍해서 그런지 묵범의 품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안긴 상태에서 좀 더 편한 자세를 찾으려고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제가 그렇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언제 온다는 답장 하나를 못 보냅니까?”
“오늘 오는 거 뻔히 아는데 뭐 하러?”
“거참. 매정하군요.”
묵범의 어깨에 턱을 괸 도화의 표정이 점점 편안하게 바뀌었다. 묵범이 자신의 공간을 침입했다는 사실은 그의 품에 안기는 게 오래간만이란 사실에 밀려 저 멀리 사라졌다.
“웬일입니까? 얌전하게 품에 안겨 있고.”
“음… 좀 닥치고 가만히 있어 봐.”
“?”
묵범은 한 대 맞을 각오를 하고 도화에게 물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도화는 불퉁한 말을 내뱉을 뿐 묵범을 밀어내진 않았다.
‘무슨 일이지?’
묵범은 도화의 반응이 의아했지만, 당장 이유를 알아보기보단 지금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휴가를 어디로 가서 어떻게 지냈는지는 모르지만, 한 번 휴가를 갈 때마다 도화가 이렇게 변해 준다면 주기적으로 휴가를 보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이대로 안고 있는 것도 좋은데. 여기서 진도를 좀 더 나가도 좋겠어.’
묵범은 도화가 먼저 자신을 밀어낼 때까지 이대로 계속 안고 있기로 마음먹었다. 자다가 막 일어났는데 대체 왜 얼굴도 뽀송하고 몸에서 좋은 향기가 나는지. 같은 남자이지만,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향기가……?’
향수를 뿌리지 않는 도화는 목욕용품은 물론이고 유일하게 바르는 로션도 향이 없거나 있더라도 아주 흐릿하게 나는 제품을 썼다.
가끔 억지로 옆에 바짝 붙어 있을 때면 비누나 샴푸 향을 맡을 수 있었는데. 지금 묵범의 콧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향기는 도화라면 절대 쓰지 않을 법한 달콤한 향기였다.
‘…홍도화가 아닌가?’
묵범은 제 품에 안겨 있는 도화를 곁눈질로 확인했다. 방금까지는 도화가 순순히 품에 안겨서 기분이 좋았는데, 처음 맡아 보는 향기가 나자 좋았던 기분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의심이 자리 잡았다.
‘확실히… 이 사람이 내 품에 순순히 안겨 있을 리가 없긴 해. 닥치라고 하긴 했지만…….’
도화는 묵범이 이런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얌전히 그의 어깨에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있었다.
‘급하게 열매를 맺느라 기억이 정리되지 않아서 그런 걸까?’
묵범의 품에 편히 안겨 있자 멍했던 머리가 조금씩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다행히 만첩의 기억이 떠오르는 중이었다.
하지만, 난감하게도 그 기억은 온전히 하나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산산이 조각나 시간의 흐름이 완전히 뒤죽박죽이 된 기억이었다.
‘아예 기억을 받지 못한 것보다는 낫긴 한데… 이 조각들을 어떻게 맞춰야 할지가 문제네.’
퍼즐 맞추기도 해 본 적이 없는 도화는 또렷한 모양도 없는 기억의 조각을 어찌 맞출지 눈앞이 깜깜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퍼즐을 완벽하게 맞추지 않아도, 중요한 부분만 조금씩 맞추다 보면 큰 흐름은 볼 수 있겠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이제 잊어버린 중요한 것만 떠오르면 될 것 같은데…….
“귀물이면 물러가고 홍도화 씨면 내게 뽀뽀하세요.”
“……?”
갑자기 자신의 귓가에 속삭이는 묵범의 목소리에 편안히 기대고 있던 도화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지금… 뭐라고 했냐?”
“어라? 홍도화 씨가 맞나?”
“…뭐라고?”
지금 이 자식이 날 귀신이라고 여긴 건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는 결심은 확! 피어오른 분노에 밀렸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도화의 반응에 묵범은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는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도화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묵범과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 도화의 몸은 팔에 조금만 힘을 주어도 몸의 굴곡이 그대로 느껴졌다.
“풀어.”
“저, 그… 미안합니다.”
“헛소리한 걸 알면 풀라고.”
“음… 하지만, 이건 제 정당한 보상인걸요?”
“?”
풀라고 험악하게 경고를 하는데도 묵범은 팔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정당한 보상을 받는 중이라고 하니 도화는 기가 찼다.
“정당한 보상? 네가 나한테 뭘 해 줬다고?”
“기억 안 납니까? 홍도화 씨의 야근을 도와주는 대가로 하루 한 번, 10분씩 안아 주기로 했잖습니까.”
“…….”
듣고 보니 그런 대화를 주고받은 적이 있는 것 같다. 만첩의 조각나고 뒤섞인 기억 때문에 도화 본인의 기억에도 혼선이 오는지 정확하게 떠오른 것은 아니지만, 대화를 나눈 것은 확실했다.
그리고.
“내가 그 웃기지도 않은 조건을 수락했을 리가 없을 텐데?”
자신이 절대 묵범의 조건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 없단 것도 확실했다. 감사 표시로 커피나 식사를 사는 것이면 모를까. 포옹? 그것도 이쪽에서 먼저 이 자식을 안는다고?
하늘이 두 쪽 나도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도화는 묵범의 단단한 팔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비틀며 시계를 보았다.
8시 20분.
잠에서 깼을 때는 8시였는데 벌써 20분이나 지났다. 깨고 나서 5분 정도는 멍 때리고 있었으니 약 15분 정도 묵범에게 안겨 있었다.
“10분 지났어.”
“밀린 만큼 안고 있을 겁니다.”
좋게 말로 해결하려고 했으나 좋은 말로 해서 들어먹을 묵범이 아니었다.
“나는 네 제안을 수락한 적도 없고 네게 내 야근을 도와 달라고 한 적도 없어. 그러니까 네가 날 안고 있는 시간만큼 널 패도 된다는 말이지.”
“…어떻게 생각이 그쪽으로 튑니까? 생명의 은인을 패다니요.”
묵범은 도화에게 맞기 싫었는지 수귀 임무 때 도화를 구해 주었던 일까지 끄집어내서 방어했다.
“그때 내 입술을 훔쳤잖아.”
하지만, 묵범이 방어를 한다고 순순히 물러날 도화도 아니었다.
“그건 엄연히 인명 구조 행위였습니다. 당신이 숨을 제대로 못 쉬니 살리려고 한 것인데 그게 어떻게 키스가 됩니까?”
“키ㅅ…….”
냉정하게 묵범을 밀쳐 내려던 도화의 몸이 멈칫했다. 키스라니…?
“내가 언제 키스랬어?”
특정 단어를 말하는 도화의 목소리가 너무 티 나게 작았다. 물론, 바로 그 부분을 눈치챈 묵범은 일부러 도화의 귀에 말했다.
“입술을 훔쳤다는 게 키스 말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저는 인공호흡이었는데 당신은 그걸 인공호흡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니 키스라고 할 수밖에요.”
일부러 목소리를 낮춰 부드럽게 속삭이자 도화의 몸이 움찔 떨리는 게 끌어안은 팔과 가슴을 통해 묵범에게 전달되었다.
“아니, 그 키스란 말 좀 그만해.”
“흠. 키스란 단어가 싫으면 입맞춤이라고 할까요?”
“…….”
묵범은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고 말했다. 지금 그는 도화의 목덜미와 귀가 실시간으로 붉게 물드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솔직하게 반응하면 얼마나 좋아.
품안의 도화가 귀물이 둔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묵범은 도화에게서 나는 달콤한 향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이렇게 달콤할 수가…!’
그는 지금 무릉도원이 부럽지 않았다. 홍도화의 몸에서 입에 침이 고일 정도로 달콤한 향기가 나다니.
한 입 깨물어 보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침을 삼켰다. 하지만, 이내 참지 못하고 살짝 혀를 내밀어 도화의 목덜미를 슬쩍 핥았다.
“!!!”
뜨끈하고 물컹하며 축축한 느낌이 스치자 깜짝 놀란 도화가 거칠게 묵범을 밀쳐 냈다. 순간적이지만, 본능적으로 온 힘을 다해 밀어낸 덕분에 묵범의 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뭐, 뭐, 뭐야!?”
묵범은 자신이 한 짓에 대해 사과는커녕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실망했단 듯이 도화를 쳐다봤다.
“향기는 엄청 달았는데… 맛은 그냥 홍도화 씨네요.”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