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떨리는 손으로 붉은 열매를 집어 든 도화는 열매를 입으로 가져갔다. 커다란 나무에서 맺힌 것치고 열매는 살구보다도 작았다.
‘먹으면 부작용은 없겠지?’
그 큰 군락에서 기운을 모아 4개의 열매를 맺었다. 그렇다는 것은 열매 하나에 만첩의 농축된 기운이 들어 있다는 의미였다.
약도 약효가 너무 강하면 오히려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처럼 만첩의 열매도 그러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섣불리 입에 넣고 씹질 못했다.
“부작용은 없으니까 걱정 말아. 푹 자고 내일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가면 되겠군.”
몇 날 며칠 잠드는 일은 벌어지지 않나 보다. 도화는 안심하고 열매를 입에 넣고 조심스럽게 씹었다. 열매의 껍질이 도화의 이를 밀어내나 싶더니 이내 과육이 뭉그러졌다.
상큼하고 달콤한 과즙이 도화의 혀와 입 안을 가득 채웠다. 단것을 싫어하는 도화였지만, 이상하게도 만첩의 열매는 먹고 있는데도 먹고 싶은 욕구가 일 정도였다.
신기한 점은 열매 안에 씨앗이 없다는 것이었다. 씨앗까지 오독오독 씹어먹을 생각이었던 도화는 이에 걸리는 것 없이 씹히는 열매에 살짝 놀랐다.
꿀꺽.
도화가 마지막 과육까지 꿀꺽 삼키는 것을 확인한 현무는 쌍합에 남아 있는 열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100년마다 열리는 만첩홍도의 열매는 그녀가 열매를 맺을 때 무슨 의도를 갖고 맺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참으로 신기한 능력이었다. 만약 병을 낫게 해 주고 싶단 생각을 하며 맺은 열매는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걸까? 불로불사도 가능하려나?
“물론 신의 영역을 넘어서는 효능은 가질 수 없어. 만병통치약이나 불로불사는 불가능하다.”
“!!!”
도화의 속에 들어갔다 나왔는지, 현무는 도화가 속으로 생각한 것에 대해 답변했다. 도화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현무가 피식 웃었다.
“뻔하지. 만첩홍도의 능력을 알면 백이면 백 다 똑같은 생각을 하거든. 그리고 사람이라면 당연히 궁금해할 만도 해.”
현무는 소파에 눕듯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머쓱해하는 도화에게 말했다.
“이번 열매는 네가 자신을 기억해 주길 바라며 맺은 열매였으니 아마도 머리에 관련된 효능이 아닐까 싶군.”
“머리… 말입니까?”
도화가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치며 물었다.
“나도 만첩홍도 열매의 효능은 다 알지 못해. 그걸 맺는 것은 내가 아니니까. 하지만, 누군가 네 기억을 인위적으로 지우고 왜곡시켰으니 만첩홍도는 그걸 되돌리고 싶은 마음으로 열매를 맺었을 것이다. 그러니 머리, 기억, 정신과 관련된 효능을 보이지 않을까 추측 중이지.”
“음… 그렇군요.”
“그러니까 짧게 말하면 너처럼 기억에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 말이다.”
설명을 마친 현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무의 말을 곱씹던 도화도 같이 일어났다. 현무가 가기 전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만첩은… 계속 현무별저에 있는 겁니까?”
“그건 모르겠군. 만첩홍도가 내 정원에 온 이유는 이동 가능한 내 별장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널 찾기 위해서였으니까. 널 만나고 회포까지 풀었으니 다시 귀계로 돌아갈지도 모르겠군.”
“아…….”
도화의 입에서 안타까운 탄식이 흘렀다. 고작 이틀 만났는데 헤어져야 한다니. 동면에 들기 전에 한 번 더 만나러 갈걸.
후회했지만, 이미 만첩은 동면에 들어갔—.
“지금쯤이면 잠들기 직전이겠군.”
“…예?”
현무가 턱으로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가면 인사 정도는 나눌 수 있을 거다. 어서 가 봐.”
“!!!”
어서 가 보라는 말에 도화가 문을 박차고 정원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 * *
도화가 현무별저에서 나온 시간은 오전 9시였다. 영귀가 아침 식사를 차리겠다고 했지만, 거절하고 현무별저에서 나왔다. 배가 출출했지만, 어차피 시리얼 아니면 국수일 테니까. 차라리 편의점에서 라면에 삼각김밥을 먹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화악산 꼭대기에서부터 하산할 생각이었던 도화의 계획을 비웃기라도 하듯 솟을대문에서 나오자마자 눈에 들어온 광경은 지하철 입구였다.
“…?”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방금 통과했던 솟을대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디에서나 있는 휴대폰 판매 대리점 유리문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도화가 매장 출입문 앞에 떡하니 서 있자 안에 있던 직원이 나왔다.
“휴대폰 바꾸시려고요?”
“아닙니다.”
도화는 지하철 노선을 보려고 휴대폰을 꺼냈다. 최신기종인 것을 확인한 직원은 작게 투덜대며 매장으로 돌아갔다.
본의 아니게 영업 방해를 해 버린 것 같아서 도화는 지하철을 타러 빠르게 자리를 피했다.
지하철을 탄 도화는 자리가 몇 군데 비었는데도 앉지 않고 문 쪽 손잡이에 기대어 섰다. 앉고는 싶었지만, 자신의 덩치로는 한 자리 가지곤 어림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의자에 앉고 싶었다. 만첩의 열매를 먹은 뒤로 계속 잠이 쏟아지는 중이라 지하철에 사람이 많이 없었다면 눈치 보지 않고 앉았을 것이다.
‘집에 가면 묵범이 들이닥칠 텐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푹 자고 싶다. 배에서 아주 작게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계획대로라면 지하철을 타기 전, 역 근처 편의점에서 뭐라도 사 먹으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사람 형상을 만들지 못할 정도로 약해진 만첩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기 때문이었다.
[모습이 이래서 놀랐지?]
뿌리 끝의 기운까지 모두 끌어모아 무리하게 열매를 맺었다더니. 만첩도화의 나무 기둥은 앙상하게 말라 있었다. 시야를 가득 채우던 붉은 도화꽃은 모조리 낙화하여 아무것도 달리지 않은 가느다란 가지가 애처롭게 흔들렸다.
[그림은 잘 받았니? 이런 모습 보이기 싫었는데… 그래도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불렀단다.]
사람 형상은 아니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상상이 되었다. 도화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자 만첩은 앙상한 가지로 도화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워낙 가늘어서 스치는 느낌도 나지 않았지만, 도화는 어깨가 천근만근 무거운 것 같았다.
‘나 때문에…….’
도화는 만첩이 이렇게 된 것은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좀 더 따지고 들자면 도화가 아닌 도화의 어머니를 죽이고 도화의 기억에 손을 댄 범인이 그 원인지만, 어쨌든 만첩이 열매를 맺은 것은 도화를 위한 것이니까. 도화는 자신을 탓했다.
[네 탓이 아니야. 내 열매가 네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 말을 끝으로 살랑거리던 만첩의 가지가 점점 움직임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바람을 일으킬 힘도 없는 듯했다.
[좀 자고 올 테니까. 그때는 네가 날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도화가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만첩은 아주 작게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그때까지 잘 지내렴. 홍도화.]
그 말을 끝으로 만첩의 움직임은 완전히 멈췄다. 도화가 그녀를 몇 번이나 불렀지만, 동면에 든 것인지 대답은 없었다.
그렇게 만첩도화와의 만남은 끝이 났다.
덜컹.
지하철이 정차하며 흔들리는 통에 만첩과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어제의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정차역을 확인한 도화는 한숨을 내쉬며 코트 안쪽 주머니에 넣어 둔 종이가 안전하게 잘 있는지 확인했다.
[집에 가서 확인해. 아직 휴가가 끝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머리 터지게 고민할 필욘 없잖아.]
현무는 만첩이 준 종이를 확인하려는 도화를 만류했다.
‘이미 휴가 내내 터진 머리라 여기서 더 터질 것도 없긴 하지만.’
만첩의 열매를 먹은 뒤 밀려오는 졸음 때문에 현무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손잡이 기둥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다 하마터면 환승역을 놓칠 뻔했다. 도화는 그렇게 졸다 깨길 반복하며 간신히 집에 도착했다.
* * *
“삼촌!”
“도화야!”
집에 도착하자마자 담마와 현천이 현관으로 튀어나왔다. 도화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쉿’ 하고 작게 소리 냈다.
“삼촌? 무슨 일이에요?”
목소리를 낮추라는 도화의 행동에 환히 웃던 담마의 얼굴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누구한테 쫓기기라도 하는 거예요?”
“뭐냐. 누구냐? 누가 감히 우리 도화를 쫓아와?”
그저 ‘쉿’ 한마디만 했을 뿐인데. 담마와 현천은 도화가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위협을 당하고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옆집에서 듣잖아.”
“아……!”
담마와 현천이 뒤늦게 도화의 행동을 이해했다. 하지만, 도화가 원하는 대로 입을 다물진 않았다.
“괜찮아. 괜찮아. 옆집 거머리는 집에 없으니까.”
“주말인데?”
도화의 얼굴에 기분 나쁜 기색이 스쳤다. 홍도화 씨가 없어서 외롭다느니 보고 싶다느니 징징대는 메시지를 +999개가 될 때까지 보내 놓고는, 정작 휴가에서 복귀하는 날에 어딜 나갔다고?
도화는 방금까지만 해도 묵범에게 들키지 않게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려 놓고선 묵범이 없다는 이유로 화를 냈다.
그런 도화의 모습을 보고 있던 담마는 제 삼촌이 묘하게 묵범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일주일 정도 떨어져 있다 보니 많이 보고 싶으셨나 보네.’
도화가 들으면 아니라고 펄쩍 뛰며 화를 낼 생각을 한 담마는 도화의 손에서 캐리어를 빼내고는 그의 방으로 밀어 넣었다.
“식사 준비는 할 테니까 어서 옷 갈아입고 씻으세요.”
“기다려. 금방 씻고 나올게.”
“됐어요. 삼촌, 지금 엄청 졸린 얼굴인 거 알아요?”
“아… 그래?”
담마의 말에 도화는 눈을 비볐다. 그래도 지하철에서 기둥에 기대어 잠깐 눈을 붙였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나 보다.
“괜찮으면 자고 일어나서 식사해도—.”
“아니. 먹고 잘래.”
“……?”
예상치 못한 도화의 칼답에 담마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휴가지에서 식사를 엉망으로 줬나?’
다른 건 몰라도 식탐은 전혀 없는 도화다. 어릴 적, 엄청 배를 곯았다고 들었는데 식탐이 없는 도화가 신기하기까지 했었다.
그런데 그런 도화가 나중에 먹자는 말을 끊고 당장이라도 냉장고 문을 열 기세로 대답했다.
‘금방 드실 수 있는 것으로 차려야겠다.’
도화를 위해 장을 봐 두었던 담마는 계획을 변경했다. 재료 손질은 해 두었지만, 끓이거나 굽는 데엔 시간이 꽤 걸린다. 그러니 간단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것. 그러니까.
“그러면 간단하게 시리얼 드실래요?”
“아니. 시리얼은 별로. 절대 안 먹어.”
“어… 시리얼은 별로예요?”
담마는 시리얼이란 말에 너무 예민하게 거부 반응을 보이는 도화가 낯설게 느껴졌다. 즐겨 먹진 않지만, 아침에 종종 먹곤 했었는데… 일주일 사이에 시리얼 혐오자라도 된 것처럼 구는 도화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봐, 도화. 시리얼이 그렇게 싫으면 국수는 어때? 요즘은 육수도 다 만들어서 팔더라. 국수만 삶아서 넣으면—.]
“국수도 싫어. 잔치국수, 비빔국수, 열무국수, 멸치국수, 바지락 칼국수, 닭 칼국수… 그냥 국수는 다 싫어.”
[어. 그래.]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