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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화-125화 (126/146)

125화

[그게 우리가 너와 처음 만났던 날의 기억이란다.]

[그 뒤는 별거 없었어. 너는 울지도 않고, 그렇다고 웃지도 않는 아주 조용한 아이로 자랐지.]

[아이를 키우는 건 네가 처음이었는데 딱히 놀아 주고 달래 주는 일 없이 혼자서 쑥쑥 크니 다른 아이도 이렇게 크는구나 싶었다니까?]

만첩은 자신들이 도화를 키운 대목에 이르자 심각함은 벗어 던지고 즐거이 재잘댔다. 하지만, 도화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 여자가… 내 어머니?’

도화는 여전히 이름도, 얼굴 생김새도 모르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모든 내용이 도화에겐 충격 그 자체였다.

‘날 버리고 어딘가에서 잘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죽었다. 아니, 돌아가셨다.

도화는 혼란스러웠다. 지금껏 반도깨비로 낳아 놓고는 버리고 도망갔다고 생각했던 부모였는데.

그게 아니었다.

부친이 도깨비라는 것 외엔 아무 단서도 얻지 못했다. 어머니가 배 속의 자신을 지키려고 도망쳤고 아버지는 도깨비란 것을 안 도화는 아버지가 혼혈로 태어날 자신을 없애기 위해 한 짓인가? 싶었다.

아버지란 자가 쓰레기라면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악귀의 소행이란 말에 범인이 아버지일 가능성은 지웠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 이미지가 좀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무슨 사정이 있었든 간에 제 아이를 가진 여자가 치명상을 입고 도망가는데 곁에 없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모친의 사정을 듣고 난 도화는 그만큼 부친을 향한 원망이 짙어졌다. 자신의 몸에 흐르는 도깨비의 피를 부정하고 싶은 도화에게 만첩이 물었다.

[그래서 말이야. 언제부터 변하게 된 거니?]

“……네? 무엇이요?”

한참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도화는 갑자기 날아든 질문에 당황했다. 무슨 질문이냐고 묻자니 만첩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있던 것이 들통나고, 그렇다고 아무 대답이나 할 수도 없고. 난감했다.

다행히 만첩은 너무 많은 옛이야기를 들은 도화가 혼란스러워하는 줄 알고 앞선 이야기를 하며 다시 물었다.

[네 눈 말이야. 엄마 눈을 똑 닮아서 예쁜 금빛이었는데. 언제 바뀐 거야?]

“제 눈이… 금색이었다고요?”

[어머. 그것도 잊은 걸 보면… 한참 오래전에 바뀌었나 보구나.]

[어쩌면 우리랑 헤어지자마자 바뀐 것일 수도 있어.]

내 눈이 금색이었다고?

전혀 생각지 못한 정보다. 당연히 제 눈은 검은색이라 여기고 살았는데 어머니를 닮아 금색이었다니.

도화는 손을 들어 제 눈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감은 눈꺼풀 아래에 단단하지만 부드러운 구체가 만져졌다.

이런다고 왜 눈동자 색이 바뀌었는지 알 순 없지만, 어머니와 같은 색이었단 사실만으로 기분이 이상해졌다.

[우리는 네 어머니가 죽고 난 뒤로도 한참 동안 네 이름을 짓지 않았단다.]

“아버지가 올 줄 알았군요.”

[그래. 미리 정해 둔 이름이 있을지도 모르니 나타나길 기다렸지. 하지만, 오지 않았어. 그래서 우리의 이름을 주기로 결정했지.]

[만첩홍도화. 만첩은 우리가 쓰고 홍도화는 네게 주었어. 참 마음에 들어 했는데.]

그제야 도화는 자신이 이름을 홍도화라 지었는지 깨달았다.

“기억이 없는데도 스스로 지은 이름이 홍도화였던 걸 보면… 정말 마음에 들었었나 봅니다.”

만첩도화 군락의 홍도나무들이 얼마나 많이 도화를 불렀을까. 기억을 잃은 상황에서도 무의식은 이름을 각인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제 어머니와 관련된 소식을 들은 적은 없습니까?”

[애석하게도.]

[금빛 눈이 예쁘긴 했지만, 그건 흔하니까.]

[그래도 누가 죽었다든가, 살해당했다든가, 아니면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문이라도 들리길 기다렸는데, 그 무엇도 들려오는 게 없더구나.]

“아이를 가진 여자를 찾는 소문도 못 들으셨겠고요.”

[…….]

도화의 질문에 만첩은 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무답에 도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그 남자. 어떻게 생겼는지 그림으로 그려 주실 수 있습니까?”

[음… 노력해 볼게. 그림… 그려 본 적이 없거든.]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도화의 부탁에 만첩은 생글생글 웃으며 맞잡은 도화의 손에 힘을 넣어 꼬옥 붙잡았다.

[당연하지. 누구 부탁인데.]

[우리들의 아이인걸.]

[걱정 말고 가서 좀 쉬렴. 휴가라며.]

만첩이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가지들이 움직여 도화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사람 손처럼 살짝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구겨진 옷도 정돈해 주었다.

[휴가 끝나는 날에 현무한테 맡겨 놓을게.]

“……?”

직접 만나서 받으면 될 텐데. 굳이 현무한테 맡긴다는 것인지 이해를 못 한 도화였지만, 이유가 있겠거니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 밤, 도화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한참이나 들어서인지 흥분한 뇌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기억을 지우개로 지웠다면 지운 자국이라도 남았을 텐데. 이건 지웠다기보다 가위로 싹둑 잘라 버렸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떠오르는 게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금껏 이상하다고 생각해 보지 못한 부분이 이번에도 튀어나왔다.

‘귀물인 내가 어머니의 태내에서 보낸 기억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

만첩홍도 군락지에서 지냈던 일은 오늘 알게 된 사실이니 누군가 기억을 지웠다고 치고.

도화가 이상하다고 여기는 점은 귀물이라면 당연히 기억하는 태내 기억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왔다는 점이었다.

도화는 소름 돋은 팔을 슥슥 문질렀다. 현무별저에 와서 알게 된 기억 오류가 대체 몇 가지인가. 게다가 이 경우는 당연히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그걸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것도 같은 놈의 짓이겠지?’

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내게 이런 짓을 한 것일까.

천장을 쳐다보던 도화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삭제된 기억은 태어나기 전, 어머니의 태내에서부터 만첩홍도 군락지에서 지내던 기간이다.

오류가 생긴 부분은 스승이 죽던 날 보았던 저승차사. 흑립을 쓴 저승사자를 귀물인 자신이 볼 수 있을 리 없다.

이 두 가지를 한 놈이 저질렀다는 가정하에 답을 도출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답이 아닌 의문만 증폭될 뿐이었다.

‘태내 기억이 있다면 어머니를 죽인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어. 그렇다면 기억을 지운 자는 어머니를 죽이고 날 납치하려 했던 놈이겠군. 만첩홍도와 있던 기억도 지운 걸 보면… 만첩홍도가 자신을 본 것을 내게 말했을 수도 있어서 그런가?’

도화는 감았던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치워 두었던 노트와 펜을 들고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 내 기억을 지운 놈 =어머니를 죽인 놈

▶ 어머니를 죽인 이유: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나를 납치하기 위해서

▶ 날 납치하려던 이유: 모름

▶ 내 기억을 지운 이유: 자신이 누군지 기억할 테니까

* * *

※스승님이 죽던 날의 기억을 왜곡한 놈

▶ 이유: 모름.

* 가설 1

→ 내 눈에 저승차사를 보여 줘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내가 저승차사를 미워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 * *

※어머니를 죽인 놈이 스승님이 죽던 날의 기억을 왜곡한 놈과 동일 인물일까?

“흠…….”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의문 때문에 깊게 생각할 틈이 없다.

“그런데 기억을 조작할 수 있는 악귀가 있나?”

그런 악귀가 있다는 소문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악귀뿐 아니라 귀물 중에서도 못 들어 봤다.

그나마 저승차사가 아주 짧게, 단편적인 기억만 소거하는 능력이 있다. 물론 남발하면 징계를 먹겠지만, 실수로 인간에게 모습을 보일 경우엔 어쩔 수 없이 기억을 지워야 해서 주어진 능력이었다.

‘저승차사도 쓸 수 있는 능력이면 신도 가능하지 않을까?’

의문을 품다 보니 범인이 악귀나 귀물이 아닌 신일 수도 있단 생각까지 번졌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신이 그럴 리가 없잖아.”

신은 남들보다 큰 힘을 가진 만큼 누구보다 강력한 규제에 얽매인 답답한 존재다. 잘못을 한 자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라면 모를까.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빼앗으려고 산모를 죽이고 기억에 손대는 짓을 신이 할 리 없다.

“아, 모르겠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아. 평생 쓸 머리를 요 며칠 다 써 버린 기분이다.

꼬르륵—.

도화의 배에서 위가 텅 비었다는 신호가 울렸다.

“아. 젠장.”

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나 했는데 오늘 먹은 게 국수 두 그릇이 전부라서 그랬다. 만첩의 이야기를 듣느라 점심은 건너뛰었으니 아침, 저녁으로만 국수를, 그것도 딱 한 그릇씩 먹은 것이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다.”

도화의 입에서 처음으로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이 나왔다. 뭔가 하고 싶어도 속으로만 생각했지 입 밖으로 소리 내는 일은 극히 드물었는데 지금, 그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담마와 같이 식사를 하고 현천의 수다를 받아 주고 스트레스 풀 겸 원귀와 악귀를 때려잡고 싶었다.

날짜를 확인하니 며칠 뒤면 월급날이다. ATM기에 가서 통장 입금 내역도 찍어 봐야 하고, 불래에 가서 여강진에게 현무별저에서 있었던 일도 이야기해야 했다.

‘휴가 끝나고도 한동안은 바쁘겠는걸?’

여강진에게 현무별저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 집에도 보내지 않고 질문 세례를 쏟을 게 뻔했다.

“여강진에게 맡긴 의뢰도 수정해야 하고…….”

호윤을 찾는 것은 잠시 중단해 달라고 해야 했다. 현천을 영원히… 데리고 있기로 한 대가로 현무가 직접 호윤의 행방을 알아봐 주기로 했었다.

대여섯 번은 윤회를 했을 테니 시간은 오래 걸릴 것이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기로 했다.

도화는 수정할 부분을 노트에 꼼꼼히 적고 잘 준비를 했다. 계속 깨어 있다간 나가서 주방을 찾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배고픔이 심해지기 전에 일찍 자는 게 나았다.

* * *

남은 휴가 기간은 이틀.

만첩에게선 아직 범인의 몽타주에 대해서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다.

현무는 요즘 머리를 너무 썼더니 피곤하다며 침실에서 나오질 않았고 영귀는 도화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를 듣더니 인심 써서 국수를 두 그릇이나 도화에게 가져왔다.

어제와 달리 어느 정도 배가 든든해진 도화는 만첩을 만나러 정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도화는 만첩을 만나기는커녕 정원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뭐지?”

정원으로 향하던 도화를 가로막은 것은 노란색 접근금지 표지판이었다. 현무별저와 어울리지 않는 표지판에 멈칫한 도화는 이걸 무시하고 넘어갈지 말지 고민에 빠졌다.

‘괜히 무시했다가 혼나긴 싫으니까.’

어차피 이걸 세워 둘 사람은 현무 아니면 영귀일 테니까. 무시하고 넘어간다면 둘 중 누구한테 걸리든 간에 결코 수월하게 넘어가진 않을 게 뻔했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는 도화의 코끝에 진한 복숭아 꽃향기가 스쳤다. 만첩홍도의 향기라기엔 너무 짙었다.

‘다른 꽃이 핀 정원이 있는 건가?’

호기심에 현무별저를 한참이나 돌아다녔지만, 만첩홍도 정원 이외의 곳은 찾지 못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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