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산달을 한참이나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아이는 사내였다. 만첩홍도는 아이의 몸에서 도깨비의 기운이 느껴지자 놀라서 하마터면 안고 있던 아이를 떨어트릴 뻔했다.
[얘, 미쳤니? 안 그래도 황천길 가기 직전인 애를 죽일 셈이야?]
다른 가지가 재빨리 뻗어 나와 아이를 안아 들었다.
[도깨비의 아이인 걸까?]
[하지만, 저 여자는 교맥국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도깨비들은 남녀 가리지 않고 술이 든 호리병을 허리춤에 달고 다녔다. 여자의 몸에는 호리병도 없고 술 냄새도 나지 않았다. 당연히 도깨비 기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 피 냄새가 진동해서 제대로 된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여자… 어디 사람이지?]
[여우도 아니고 늑대도 아니야. 그렇다고 그냥 인간도 아닌데.]
귀물이 이렇게 기진맥진해서 죽을 때에는 사람 형상을 유지하지 못하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다. 호족은 여우, 랑족은 늑대, 묘족은 토끼 등 짐승의 모습인 채로 죽는다.
하지만, 여자는 사람 모습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그렇다는 것은 귀물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귀계에 있는 것을 보면 절대 인간은 아니야.]
[선인일까?]
[선인이 귀계에 올 일이 뭐가 있겠니.]
[별천계로 가려고?]
가지 하나가 만첩홍도 군락 옆에 있는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그 의견은 바로 기각되었다.
[천계에도 별천계로 가는 입구는 있어. 그건 아니야.]
[인간도 아니고 귀물도 아니고 선인도 아니라……. 대체 뭐지?]
그렇게 한참을 의견이 분분한 사이 누군가 접근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악귀인가?]
[그런가 봐. 어서 숨겨.]
[누구를? 아기? 여자?]
[둘 다!]
둘 다란 외침에 꽃가지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여자의 시신은 군락지 제일 끝으로 끌고 갔다. 가장 깊게 박힌 뿌리가 있는 땅속에 묻었다. 억지로 맺은 열매들을 모아 여전히 울지 않는 아기의 몸에 즙을 짜냈다. 아기의 몸에 묻은 여자의 피를 씻어 내기 위함이었다. 단순히 물로 씻기면 피의 잔향이 남는다. 게다가 지금 아기에게선 도깨비 기운도 풍기고 있었기에 뭐든 진한 향기로 지워 낼 필요가 있었다.
[억지로 열매를 맺으려니 어지러운걸?]
꽃 하나가 앓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엄살은 아니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억지로 맺느라 생기를 쥐어 짜냈기 때문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싱그러웠던 꽃과 물기 올라 통통했던 가지들이 시들해진 것은 기분 탓이 아니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미 잃은 아기 앞에서 엄살 피울 힘은 있나 보네.]
[우리야 좀 고생하면 되지만 이 아기는 여기서 들키면 끝이야.]
앓는 소리는 타박에 묻혀 사라졌다. 서로 엇갈리는 의견을 내놓으니 만첩홍도가 독립적인 개체들이 모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모두 하나의 만첩홍도가 내는 소리였다.
의견이 갈라진다 한들 마지막 판단은 항상 일치한다. 열매를 맺는 게 힘들다고 하소연해도 만첩홍도는 여자에게서 부탁받은 순간, 무슨 일이 있어도 아기를 지킬 생각이었다.
[다 씻겼니?]
[응. 이제 우리 냄새밖에 안 나.]
[냄새가 뭐니. 향기라고 해야지.]
[지금 그거 가지고 싸울 때니? 아기나 안전한 곳으로 숨기자.]
[토끼굴 어때?]
[얼마 전에 우리 위에 새가 큰 둥지를 틀었던데. 둥지에 넣어 놓을까?]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다양한 의견이 나왔고 모두 기각되었다.
[내 속에 넣어.]
만첩홍도 중 하나가 자신의 기둥을 보이며 말했다. 기둥은 누가 양옆으로 잡아 벌린 것처럼 길쭉한 입구가 나 있었다. 안에는 아기가 간신히 몸을 누일 정도의 공간이 보였다.
[그래. 거기가 좋겠다. 어서 눕히고 꽃잎으로 덮어.]
[너 기둥에 흠집 났다고 슬퍼하더니만. 오늘 이러려고 그랬나 보다.]
만첩홍도들은 일사불란하게 아이를 기둥 틈에 눕히고 꽃잎으로 덮은 뒤 이리저리 몸을 틀어 갈라진 나무를 가렸다.
마지막으로 분 바람이 부자연스럽게 떨어진 꽃잎을 자연스럽게 흐트러트리며 아기 숨기기가 끝이 났다.
[왔니?]
[왔나?]
[쉬잇. 평소대로 해.]
평소대로 하란 말에 다들 느긋하게 흔들리거나 옆의 나무와 수다를 떠는 모습으로 돌아갔다. 땅 밑에 여인의 시신이, 기둥 속에 언제 숨넘어갈지 모를 아기가 있으리라고는 상상하라 수 없는 평화로움이었다.
그 평화로움 속으로 한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남자.
특징이랄 것은 전혀 보이지 않는 평범한 남자였다.
적당한 키, 적당한 덩치, 적당히 그을린 피부.
이목구비는 무엇 하나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얼굴 표정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표정인 것도 아니라 만약 남자를 여러 번 보았다 한들 몇 분만 지나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지 않을 만한 얼굴이었다.
“이상하다. 이쪽으로 간 것 같은데.”
목소리마저 어찌나 평범한지.
바로 옆에서 귓가에 속삭여도 뇌리에 남지 않고 그대로 흘러 사라질 듯한 목소리였다.
평소라면 지나가던 개미도 남자를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만첩홍도 군락지는 온 신경을 남자에게 집중하고 있었기에 그가 매우 ‘평범’하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남자는 자신이 공격한 여자를 찾는지 두리번거리다 하늘을 올려다봤다.
“흔적이 뚝 끊겼어. 분명 이쪽이 맞는데. 하늘로 솟았나?”
하지만, 하늘엔 하얀 구름과 이름 모를 작은 새 몇 마리가 날아가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아니면… 땅으로 꺼졌나.”
남자가 흐릿한 눈을 하고 바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땅으로 꺼졌냐는 말을 들은 만첩홍도는 남자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게 평소대로 노닥거렸다.
[어머. 어디 가세요? 나그네님?]
그러니까 평소대로.
지나가는 사람에게 같이 노닥거리자고 말을 거는 나무가 나타났다.
저, 저, 저게 미쳤나! -라고 사방에서 그 나무를 향해 외치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하지만, 어찌 생각하면 일제히 저 남자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이 더욱 수상해 보일 수도 있었다.
[별천계로 가시는 중?]
[아니면 우리 보러 오셨나?]
만첩도화의 질문에 적당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걷던 남자가 멈춰 섰다.
“당신이 말로만 듣던 만첩도화로군요.”
남자가 만첩도화에게 관심을 보였다. 상냥하게 웃는 눈인데 웃는 것 같지 않았다. 그냥 눈 모양만 잘 접어서 웃는 흉내를 내는 느낌이 들었다.
긴 세월을 산 만첩도화라 바로 알아챈 것이지, 평범한 자라면 지나가던 친절한 나그네라 생각할 연기였다.
“혹시… 여기로 어떤 여자가 오지 않았습니까?”
남자는 웃음을 지우지 않고 만첩홍도에게 물었다. ‘여자’에 대한 질문이 날아들자 만첩홍도는 죽은 여자가 말했던 악귀가 이 남자인 것을 직감했다.
‘그런데… 악귀가 이럴 수 있나?’
남자는 어딜 봐도 악귀처럼 보이지 않았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평범하고 감정도 연기하는 게 티가 났지만, 악귀라고 하기엔 악귀 특유의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강한 악념을 가졌다 해도 이렇게까지 깨끗하게 기운을 감출 순 없다. 어딘가 구릿한 기운이 풍기기 마련이다.
[오늘은 이상하게 별천계로 가는 분이 안 보이더군요. 날도 좋은데 놀러 갈 법도 하건만.]
만첩홍도의 대답에 남자는 살풋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자의 흔적을 찾는 듯했다.
하지만, 이미 만첩홍도가 깔끔하게 흔적을 지워 놓아서 남자는 작은 단서도 찾지 못했다. 만첩홍도가 얼마나 주도면밀했느냐면 피 묻은 흙과 여자의 시신을 땅속으로 묻느라 새로 드러난 흙까지 신경 썼다. 햇빛과 바람에 마른 흙에서 잡초까지 자라나게 하니 어딜 봐도 뒤집힌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흐음. 별천계로 간다 하더니 다른 곳으로 놀러 갔나 봅니다.”
[어머. 아쉬워라. 이맘때 즈음이면 별천계가 얼마나 요지경인데. 뭘 모르는 여인인가 보네요.]
“하하. 그러게나 말입니다. 나와 함께 가자고 했더니 싫다고 도망가더군요.”
[저런…….]
만첩도화의 호응에 남자는 쯧, 하고 혀를 차며 언짢은 반응을 보였다. 찰나였지만, 눈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며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스쳤다 사라졌다.
“사나이가 칼을 한번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하는데… 이렇게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갈 순 없지 않습니까?”
언제 언짢았냐는 듯이 남자는 다시 얼굴에 웃는 가면을 썼다. 한번 부자연스러움을 느끼니 가면을 쓰고 연기한다는 느낌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칼을 한번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한다는 말.
사내라면 한 번쯤은 하는 말이지만, 여인이 어찌 죽었는지 알기에 도저히 흘려듣기 어려웠다.
“정말… 보지 못했습니까? 이만한 키에 머리카락은 짧고 눈은 금색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아침 해가 뜬 이후로 여길 지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답니다.]
“흠… 그렇군요.”
남자는 그러냐는 대답과 달리 만첩홍도 군락지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저 안에 자신이 찾는 여자가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참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군락지 내부를 샅샅이 훑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는 만첩홍도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만첩홍도는 참았던 숨을 터트리고 싶었지만, 저 남자가 다시 돌아볼 것 같아서 꾹 참았다.
왔던 것처럼 남자는 조용히 사라졌다. 만첩홍도는 남자가 시야에 사라진 뒤로도 한참이나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해가 지고 노을이 깔리고 나서야 하나둘, 입을 열었다.
[아휴, 무서워라.]
[무슨 저런 악귀가 다 있담?]
[악귀가… 맞니? 나만 이상하게 느꼈나?]
분명 여자는 자신을 이리 만든 자가 악귀라고 했다. 그러나 만첩홍도가 본 남자는 악귀라기엔 너무 깨끗했다. 하지만, 깨끗하다고 해서 선하게 느껴졌냐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악귀가 아니라면 귀물이 아닐까?]
[저런 귀물은 본 적이 없어.]
[하지만, 아기 엄마는 악귀랬는걸?]
[아, 맞다!]
[?]
아기 엄마란 말에 가지 하나가 파르르 떨며 목소리를 높였다.
[죽기 전에 아기 이름이라도 물어볼걸.]
[어머.]
[그러네.]
아기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에 다들 조용해졌다.
아기 이름뿐 아니라 여자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
[그래도 부친이 도깨비인 건 확실해.]
[응. 여자는 도깨비가 아니었으니까. 아비가 도깨비겠지.]
[그러면 반은 도깨비라는 소리네?]
[도깨비 혼혈이라…….]
누군가 혼혈이란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꽃가지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히 아기가 숨어 있는 나무 기둥을 쳐다보았다.
도깨비 혼혈.
앞으로 아이가 겪을 험난한 미래를 알리는 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