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도화-123화 (124/146)

123화

[안녕?]

[잘 지냈니?]

[크게 아픈 적은 없고?]

[혼인은 했으려나?]

[아이는?]

뒤로 넘어간다고 생각한 순간, 사방에서 여러 목소리가 도화에게 말을 걸어왔다. 비슷한 목소리지만, 자세히 들어 보면 연령대가 다 다른 목소리였다.

[우리가 이름 지어 줬었는데. 기억 안 나는 거니?]

[이상하다. 머리가 나쁘진 않았었는데.]

[머리를 크게 다친 적이 있니?]

“이게 무슨…….”

도화는 사방에서 쉴 틈도 주지 않고 말을 거는 여자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이렇게 많은 질문을 받은 적이 처음이라 대답을 할 생각도 못 하고 쏟아지는 질문을 듣기만 했다.

[우리가 누군지 모르겠어?]

[너무 많아서 그러나?]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네. 하나로 뭉치는 수밖에.]

‘하나로 뭉쳐?’

강제로 눕혀진 몸을 일으키려고 힘을 주던 도화는 허공에 일렁이는 붉은 기운을 보고 멈칫했다. 사방에 가득 찬 만첩홍도와 똑같은 색이었다.

넓게 퍼져 있던 붉은 기운이 도화의 앞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색이 짙어질수록 기운은 사람의 형태로 변화했다. 이윽고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

[이러면 괜찮지?]

“만첩홍도……?”

도화가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물었다. 눈앞의 여인에게 한 질문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진짜로 만첩홍도인가?’라고 던진 질문이었다.

[만첩이라 불러. 너 어릴 때도 우릴 그렇게 불렀거든.]

자신을 만첩이라 소개한 여자는 눈을 초승달처럼 예쁘게 접어 웃었다.

[사람 모습은 오랜만이라 좀 어색하긴 한데… 그래도 도화와 제대로 이야기를 하려면 어쩔 수 없지. 움직이는 건 좀 불편하니까 앉아서 이야기하자.]

만첩은 도화의 옆으로 가 몸을 숙였다. 그러자 도화의 몸을 잡아 둔 가지들이 움직여 둘이 함께 앉을 수 있는 의자를 만들었다. 나무가 만든 의자였지만, 신기하게도 부드럽고 포근했다.

[너무 그렇게 내외하면 서운해.]

방금까지 도화가 일어나려고 힘을 썼던 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만첩이 고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만첩홍도의 꽃과 같은 색의 머리카락이 엉덩이 아래로 자유분방하게 구불거렸다.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많은 꽃이 만개했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머리카락은 무척 풍성했다.

꽃답다.

사람의 미모를 말하는 형용사는 수두룩하지만, 만첩에겐 꽃답다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렸다. 꽃이 사람으로 변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는 당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합니다.”

도화의 말에 만첩은 시든 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 표정을 본 순간, 도화는 현천이 보던 드라마에서 여자 주인공을 매몰차게 배신하는 그런 쓰레기 남자가 되어 버린 기분이 들었다.

“이유는… 모릅니다. 저도 왜 기억이 없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니 너무 속상해하지 마시고……..”

내 잘못도 아닌데 왜 이렇게 구구절절 해명을 해야 하는 걸까.

머리는 내 잘못이 아니라는데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이 여자가 슬퍼하는 것은 내가 기억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니 내 탓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여자에게 미안함이 들게 만들었다.

[속상하긴 하지만, 네 잘못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까 미안해하지 말렴.]

만첩은 도화의 기분이 어떤지 눈치채고는 괜찮다며 손을 마주 잡았다. 여자의 섬섬옥수 같은 손을 처음 잡아 본 도화의 몸이 살짝 굳었다.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을까요?”

[너와 우리 이야기?]

“네. 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제가 당신을 떠날 때까지. 그 이후에라도 저와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

[흐음. 하룻밤 가지고는 시간이 부족할 것 같은데. 괜찮았어?]

만첩의 질문에 도화는 남은 휴가 기간에 하기로 마음먹었던 계획을 떠올렸다.

사흘.

그동안 왜곡된 기억의 진실과 제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의문의 존재에 대해 알아내려고 했다.

그리고 지금, 후자가 해결되었으니 남은 것은 왜곡된 기억의 진실을 알아내는 것만 남았다. 당연히 이것만 알면 끝이라는 생각은 안 한다. 왜곡된 기억이 스승의 죽던 그 순간의 기억이 전부일 린 없을 테니까.

‘누가, 무슨 이유로, 왜 나의 기억을 왜곡시켰나.’

큰 줄기만 잡아도 세 가지나 나온다.

하지만, 세 가지 모두 사흘간 노력한다 해서 속 시원하게 밝힐 수 없는 의문점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선 알아낼 수 있는 것에 시간을 투자하는 게 낫겠지.’

괜히 이것저것 다 알아내겠다고 손을 뻗다 제대로 된 것 하나 잡지 못하느니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뭐든 이야기해 주십시오. 기억을 못 하는 만큼 절대 잊지 않게 경청하겠습니다.”

도화의 말을 들은 만첩이 눈가를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우리에게 온 날은 화창한 4월의 봄날이었단다. 그날도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는 똑같은 일상 중 하루였지.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야.]

이야기의 운을 띄우는 만첩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힘이 있었다. 도화는 침을 꿀꺽 삼키고 시작된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 * *

[얘, 얘. 저기 좀 봐.]

수많은 꽃 중 하나가 작게 속삭였다.

[뭔데. 뭔데 그래?]

[또 시답잖은 벌 한 마리 날아왔다고 호들갑 떠는 건 아니겠지?]

[그랬다간 확! 내 손에 꽃잎 다 뜯길 줄 알아.]

하나가 속삭였는데 대답은 여기저기에서 들렸다. 아름다운 꽃에는 벌과 나비가 쉼 없이 꼬인다더니. 만첩홍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뭇가지가 땅으로 휠 만큼 많은 꽃을 달고 있으니 꼬이는 정도가 아니라 시달린다는 말이 어울렸다.

[쉬잇. 다들 입 좀 다물어 봐.]

[아, 글쎄 뭐냐니까?]

[사람이야.]

하나가 말하면 다섯이 질문하고 둘이 말하면 열이 반박하니 1분 1초도 조용할 틈이 없는 만첩홍도 군락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스윽, 슥- 무언가 쓸리는 소리가 났다. 나무의 가지들이 일시에 소리가 나는 곳으로 몸을 기울였다.

[피다.]

[피 냄새…….]

[황천 냄새가 진동을 하는구나.]

저승에서나 나는 황천 냄새가 난다는 것은 죽음에 직면했다는 의미였다.

[어쩌면 좋아.]

[곧 죽겠어.]

꽃들의 안타까움을 받는 사람은 옆으로 누워 한쪽 팔로 바닥을 기고 있었다. 다른 팔은 배를 소중하게 감싸고 있었다.

“내… 아기…….”

달싹거리는 입술에서 신음과도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왜 배를 감싸고 있는 걸까? 궁금해하던 꽃들이 화들짝 놀랐다.

[아기?]

그제야 만첩홍도는 바닥을 기고 있는 사람이 여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쪽 팔로 배를 감싸 안고 있는 것도 아기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만첩홍도는 여자의 상태를 제대로 살폈다. 드러난 곳에 묻은 피만 보면 진동을 할 정도의 양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기어 온 자리는 눈이 아릴 정도로 붉은 피로 길을 낸 것처럼 되어 있었다.

피가 어찌나 선명한지, 저 먼 곳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당장 고꾸라져 목숨이 끊어져도 이상할 리 없는 상황인데. 여자는 입술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질끈 물고 앞으로 기어갔다.

누가 어딜 가냐고 묻지 않아도 그녀가 목표로 삼은 곳은 만첩홍도 군락지. 재잘재잘 쉴 새 없이 떠드는 꽃들의 낙향이었다.

[여자야. 아기가 아프니?]

“아기… 제 아기 좀 살려 주…세요.”

[어떻게? 우리가 뭘 할 수 있지?]

만첩홍도의 질문에 여자는 헐떡이느라 대답을 하기 힘들어했다. 검은색 일색인 옷을 입어서 어디가 어떻게 다쳤는지도 파악이 어려웠지만, 상처가 무척이나 심각한 것은 확실해 보였다.

“절… 숨겨 주세요.”

[누구에게서?]

“제 아기를 탐내는 악귀…….”

그 말을 끝으로 여자가 풀썩 쓰러졌다. 죽었냐고 난리가 난 꽃들은 이내 숨겨 달라는 여자의 말을 떠올리고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만첩홍도의 뿌리가 솟구쳐 여자의 피가 묻은 흙을 깊은 땅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만첩홍도의 향기를 실은 바람이 피 냄새를 지웠다. 그리고 혹시 모를 흔적을 없애기 위해 꽃가지를 일제히 흔들어 꽃잎을 마구 흩뿌렸다.

그렇게 여자의 흔적은 완벽하게 지워졌다.

[어디 보자. 세상에… 배가 엉망이잖아?]

꽃가지가 조심스럽게 여자의 상처를 살폈다. 아직 맺히려면 한참은 기다려야 하는 열매를 만들려고 여기저기서 끙끙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잠시 혼절했던 여자의 감긴 눈꺼풀 파르르 떨었다. 의식이 돌아오는 듯했다.

[조금만 참아 보렴. 우리 열매가 효능이 좀 좋거든? 그거라도 먹으면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 정신 차려.]

만첩홍도의 말에 간신히 눈을 뜬 여자는 힘겹게 고개를 흔들었다.

“전 괜찮으니… 아이만 어찌 좀…….”

[…….]

그녀의 말에 만첩홍도는 입을 다물었다. 둥그런 눈매는 참 순해 보이는데. 짙게 가라앉은 금색 눈동자는 그녀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아이를 빼앗겨선 안… 됩니다.”

[그래, 그래. 알았어. 무슨 사연인진 모르지만, 계속 그렇게 말하면서 힘 빼면 애한테도 안 좋아.]

아이한테 안 좋다는 말에 여자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신은 죽어 가지만, 아이만큼은 살리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용케도 살아서 여기까지 왔구나.]

여자의 배를 확인한 만첩홍도는 경이로움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탄식을 흘렸다.

여자가 배를 끌어안고 있던 것은 심각하게 벌어진 상처 때문이었다. 날카로운 것에 크고 깊게 베인 상처는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여자는 자신의 실낱같은 생명의 힘을 배 속의 아이에게 쏟아부었다. 태어나지도 못하고 어미의 배 속에서 죽게 할 순 없었다.

“제게 남은 시간이 없어서… 이것 하나만 약조해 주세요.”

[무얼 약조해 줄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선에서 들어주마.]

만첩홍도는 아이를 지키려는 여자의 의지에 감명해 여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가 스스로 당신의 품을 떠날 때까지 보호해 주십시오.”

[좋아. 그렇게 해 주마.]

“감사… 감사합니다…….”

만첩홍도가 흔쾌히 승낙하자 여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한 그녀의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이런. 이대로 내버려 두면 위험해.]

어느 쪽이 위험한지 말하지 않아도 가지들은 알아서 빠르게 행동했다.

여자를 똑바로 눕힌 꽃가지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에 젖은 옷을 걷어 내고 베인 상처를 조심히 벌렸다.

억지로 맺은 열매를 비틀어 즙을 상처 위로 뿌렸다. 아직 완전히 숨이 끊어지지 않은 여자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여자의 배는 임신을 했다고 말하지 않으면 모를 만큼 부르진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아이가 생긴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의미였다.

가느다란 가지 여러 개가 상처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아기를 끄집어냈다.

“…….”

죽음이 코앞에 온 긴박한 상황에서 세상의 빛을 본 아기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세상 근심 걱정 없이 어미의 태내에서 지내다 강제로 끌려 나왔으니 서러워서 울어야 하건만.

여기서 울면 어미를 저리 만든 악귀가 쫓아온다는 것을 아는지 눈만 데구루루 움직일 뿐 울지 않았다.

[불쌍해라. 무슨 사연인진 몰라도 이대로 내버려 둘 순 없으니 우리가 품자.]

제 아이를 품에 안아 보지도 못하고 절명해 버린 여자의 시신을 만첩홍도는 자신들의 군락지에 품어 주기로 결심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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