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도화의 질문에 현무의 눈썹이 위로 휙 올라갔다.
‘뭐지? 내가 너무 어이없는 질문을 해서 그런가? 아니면 진짜라 놀라서?’
워낙 표정이 없는 사람이다 보니 이게 무슨 의미의 반응인지 짐작이 안 갔다.
“흠. 생각보다 심각한 둔탱이는 아닌가 보군.”
“……?”
“자네 말이 맞아. 쟤가 네 이름을 지어 주었다.”
현무의 대답을 들은 도화는 본인이 질문을 해 놓고도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 나무가 제 이름을 지어 줄 수 있습니까? 사람도 아니고. 그리도 저는 저 나무를 여기 와서 처음 봤습니다.”
“그래서 내가 네게 거짓 대답을 했다… 이건가?”
봄처럼 따뜻하던 정원의 온도가 순식간에 아래로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늘하늘 흔들리던 만첩홍도의 꽃가지가 얼어붙은 것처럼 하얗게 굳어 버렸다.
투두둑.
바람도 불지 않는데 꽃잎이 아닌 꽃송이 채로 떨어지는 것을 본 도화는 황급히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워낙 믿기 힘든 일이라 재차 여쭌 것뿐입니다.”
조금만 더 기온이 내려간다면 만첩홍도의 상태가 매우 나빠질 것 같아서 도화의 마음이 초조해졌다.
‘왜 초조하지? 저 나무가 뭐라고.’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아름답긴 하지만, 그저 나무일 뿐인데 왜 자신이 이렇게 초조한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제 마음이 이상한 것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제가 워낙 의심이 많아 그리 물은 것입니다.”
현무에게 집중하는 사이, 뒤에서 파삭-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얼어붙은 꽃송이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는 소리였다.
‘바람이라도 불면 꽃이란 꽃은 모두 사라지겠어.’
자신이 의심이 많아 그리 물은 것이니 노여움을 풀라는 도화의 간청을 들은 현무가 대답 대신 만첩홍도를 쳐다보았다.
“하… 가지가지 하는군. 쯧.”
누굴 향한 것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린 현무는 혀를 차며 노기를 누그러트렸다. 현무의 시선이 엉망이 되어 버린 만첩홍도에서 떠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노기를 누그러트린 것은 도화의 사과가 아닌 만첩홍도 때문인 듯했다.
“이 정도는 끄떡도 안 하는 녀석이, 널 건드렸다고 아주 대대적으로 시위를 하는구나.”
이쯤 되니 도화는 현무가 만첩홍도를 사람으로 대한다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저 나무가 자신의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것도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승님이 돌아가시던 날의 기억도 오류가 있었으니 이름을 짓던 기억도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있어.’
현무와의 대화를 수월하게 이어 나가려면 우선 그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만첩홍도와 자신과의 관계를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기억에 왜 오류가 생긴 것인지, 그때의 진짜 기억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도 중요했다.
“저 나무는 네가 아주 어릴 적,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너를 구해 주었던 나무다.”
“어릴 적,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그런 적이 한두 번이어야지.
도화는 그게 언제인지 고민하는 척 눈을 감았다. 시선이 마주치면 그때가 언제인지 전혀 감을 못 잡고 있다는 것을 들킬지도 모른다.
‘호윤이와 만나기 전에도 죽을 뻔한 적이 열댓 번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그보다 더 어릴 땐가?’
현무가 말한 아주 어릴 적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감았던 눈을 뜬 도화는 현무에게 그때가 언제인지 물었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안 듣느니 못한 내용이었다.
“네가 기어 다니던 시절이었다는데?”
“……?”
기어 다니던 시절이라니.
“귀물들은 태내에서부터 들은 것을 기억하잖아. 자네도 귀물인데 당연히 기억이 있을 것 아닌가.”
“없습니다.”
“음? 없다고?”
도화를 쳐다보는 현무의 시선에서 ‘이 녀석… 귀물이 아닌가?’란 속마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 부분은 도화 본인도 어찌 해명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기억이 안 난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기억에 없으니까.’
담마도 어미인 다온의 태내에 있을 때의 기억이 온전했기에 인간 아버지인 이선후에게 복수한답시고 원귀가 되어 버렸었다.
그러나 도화는 태어나기 전은 물론이고 태어난 이후로도 일정 기간 동안의 기억이 전혀 없었다. 이유는 당연히 몰랐다.
“아무리 봐도 자네는 귀물이 맞는데. 그런데 왜 기억이 없을까. 희한하군.”
“저도 왜 기억이 없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도화의 대답에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기억이 나지 않아 답답하단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귀물의 성장 속도가 빠르다 해도 갓 태어난 귀물은 인간의 갓난아이와 크게 다를 것은 없다. 그래서 어린 귀물에게 보호자의 유무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졌는데 부모는커녕 보호자가 곁에 있을 리가 있나.’
그래서 더욱 답답했다. 완벽하게 무방비 상태인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도화는 교맥국의 도깨비들이 쫓기 시작한 것은 자신이 어느 정도 크고 난 뒤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만약 태어나자마자 도화를 없애기 위해 쫓기 시작했다면 부모도 보호자도 없는 갓 태어난 귀물이 살아남기란 불가능일 테니까.
도화가 자신의 생존에 대해 의문을 품는 동안 현무는 현무대로 턱을 매만지다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자네 기억은 좀 수상해.”
“네…? 제 기억이요?”
뜬금없는 소리는 아니다. 평생 진실이라고 믿고 있던 스승의 사망에 큰 오류가 있다든가, 다른 귀물은 다 기억하는 어린 시절을 도화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니 말이다.
하지만, 도화의 모든 기억을 의심하는 것은 당사자가 듣기엔 충분히 기분 나빴다.
“아, 자네가 기억하는 모든 것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야.”
도화의 언짢음이 느껴졌는지 현무가 손을 흔들며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화를 내지 않는 것을 보면 자신이 한 말이 도화가 오해할 만했다고 인정하는 듯했다.
“그러니까 음… 네게 중요한 기억에 누가 손을 댄 것처럼 지워지거나 왜곡되거나, 아니면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는 것 같단 의미로 한 말이었다.”
“아…….”
도화가 이해했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현무는 머쓱함을 감추려는지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시선을 돌렸다.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은 아닐지도.’
도화가 이런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현무는 오해가 풀리자 머쓱함을 벗고 자신이 하려던 말을 이어 나갔다.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네가 태어났을 때 옆에 있던 건 저기 있는 만첩홍도다.”
“그걸 현무께서 어찌 아십니까?”
“어찌 알겠나. 저 나무가 말해 주어 알았지.”
“그러면 제가 여기서 태어났다는 겁니까?”
“그럴 리가.”
“제가 태어났을 때 옆에 저 만첩홍도가 있었다면서요? 그렇다면 여기서 태어난 것 아닙니까?”
현무의 말만 들으면 자연스럽게 현무별저에서 태어났다고밖에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아니라고 하니 당황한 도화의 질문 속도가 빨라졌다.
“그때는 내 정원에 만첩홍도가 없었을 때다. 저것을 내 정원에 들인 것은 얼마 되지 않았어. 저 많은 것을 다 옮기느라 얼마나 귀찮았던지. 쯧쯧.”
“그렇다면 만첩홍도는 원래 어디에 있던 겁니까?”
“귀계에서 별천계로 이어지는 입구. 그 근처에서 자라던 나무였다. 갓 태어난 너는 만첩홍도 군락 속에서 보호를 받으며 한동안 자라났고.”
현무의 설명을 들은 도화는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만첩홍도를 응시했다. 얼어붙은 꽃송이가 낙화해 앙상했던 가지는 거짓말처럼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꽃송이와 꽃잎은 그대로인 것을 보면 도화와 현무가 대화하는 사이 다시 꽃을 틔워 만개한 듯했다.
‘역시 보통 나무는 아니구나.’
도화의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만첩홍도 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머리를 쓰다듬듯 스치고 지나갔다.
“그 기간이 얼마인지는 모른다. 나무에게 세월이란 덧없는 것이니. 만첩홍도는 네가 스스로 판단하여 하계로 가 버렸다고 하더군. 네 이름은 만첩홍도가 너를 보살피며 네게 지어 준 이름. 함께 지낼 때는 그것이 네 이름이란 것을 인지했다 하던데… 이상하군. 너는 그때의 기억을 완벽하게 잊어버렸어.”
현무가 도화의 머리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네 머릿속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아주 심각한 문제.”
귀찮은 것은 질색이라더니. 호기심과는 별개인가 보다. 현무는 지금 당장 도화의 머릿속을 직접 들여다보고 싶은 눈치였다.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간 머리 한번 따 보자고 할 기세다.
“음… 그 문제는 다른 방법으로 해결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곧 차사국으로 돌아갈 테니 정화부나 치유부에서 확인하면 되겠군요.”
현무의 살벌한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자리에서 일어난 도화는 만첩홍도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런 도화의 뒤통수를 향해 현무가 말했다.
“예민한 녀석이긴 한데. 너라면 괜찮을 거다.”
“안 괜찮으면요?”
“녀석이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사람은 괜히 다가갔다가 썰리는 수가 있어.”
썰리다니…….
무엇에 썰리는지는 말해 주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도화는 어서 가까이 오라는 듯이 손 주변에서 살랑거리는 바람이 그런 흉기로 변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든 이 바람이 자신도 썰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에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대놓고 환영 인사를 하는구나.”
현무의 말대로 바람은 도화의 식은땀을 식히며 부드럽게 등을 밀었다. 얼마나 절묘하게 도화의 발걸음을 재촉하는지 발이 땅이 아닌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이 들었다.
그저 한 걸음 내디딘 것뿐인데 축지법이라도 쓴 것처럼 서너 걸음 지나온 듯 성큼 거리가 좁혀졌다.
그렇게 만첩홍도의 군락 속에 들어온 도화는 어정쩡하게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꽃, 꽃, 꽃.
사방이 온통 진분홍빛으로 가득 찼다. 현무와 함께 장의자에 앉아 있을 때는 은은했던 향기가 군락 속에 들어오니 향기 속에 풍덩 빠진 기분이 들었다.
“난 이만 가 볼 테니 넌 거기서 옛 기억이나 한번 떠올려 봐.”
“……!”
날 혼자 두고 가지 마세요!
라고 외칠 뻔했다. 하지만, 도화가 입을 열기도 전에 현무는 정원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평소에는 영귀를 닮아 행동도 느릿한 양반이 이럴 때는 전광석화다.
‘아, 영귀를 닮은 게 아니라 영귀가 현무를 닮은 것이 맞으려나.’
현무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쳐다보며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꽃가지가 흔들, 도화의 눈앞에서 살랑거렸다.
현무는 그만 신경 쓰고 이쪽을 봐 달라는 몸짓 같았다. 그제야 도화는 자신이 현무가 ‘사람’으로 대하는 만첩홍도의 군락 한가운데에 무방비한 상태로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괜히 다가갔다가 썰리는 수가 있어.]
아까 현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기서 조금만 만첩홍도의 심기를 거스르면 썰리는 건가.’
너라면 괜찮을 거란 말은 긴장에 묻혀 버렸다. 도화는 괜히 몸을 잘못 움직여 꽃가지에 닿을까 봐 차렷 자세를 유지했다.
그러자 잔뜩 꽃을 단 가지들이 일제히 도화를 향해 뻗어 왔다. 놀란 도화가 몸을 피할 틈도 없이 가지들은 도화를 뒤로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도화는 만첩홍도의 품에 안겨 누운 자세가 되어 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