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도화-121화 (122/146)

121화

흑립을 쓴 저승차사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같은 흑립을 쓴 저승차사, 차사국 국장, 저승 시왕, 그리고 신들.

물론 저승차사가 된 지금은 흑립을 쓴 차사를 보는 게 가능하지만, 스승이 죽던 그때의 어린 도화에겐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디서부터 내 기억이 잘못된 거지……?’

자신의 기억에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직후, 도화는 어째서 그런 왜곡된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내려고 머리를 쥐어짰다.

하지만, 스승의 원수라고 몇백 년을 하루도 잊지 않고 떠올렸던 도화다. 오류를 찾아냈다 한들, 지금 와서 이유를 밝히고 싶어도 아는 것이 없으니 답답하기만 할 뿐 작은 실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렇게 밤을 새우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창밖에 밝아 오는 것까지는 기억나는 것을 보면 잠든 지 한 시간도 안 된 것 같았다.

* * *

“두통은 없는 듯한데 어찌 안색이 그러십니까?”

아침 식사를 가져온 영귀가 목을 쭉 빼고 도화의 얼굴을 살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도화의 얼굴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의 것으로 변해 버렸다.

“흑제님의 시리얼 식사가 그리도 물리셨습니까? 다행히도 흑제께서 오늘부터 면식(麵食)을 하시겠다 하여 국수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얼 때문이 아니라…….”

사실 시리얼이 물리긴 했다. 하지만, 시리얼 때문은 아니니 사실대로 대답하려던 도화는 탁자에 차려진 김이 폴폴 나는 잔치국수를 보고 하던 말을 멈췄다.

“잔치국수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쌀쌀한 날에는 뜨끈한 국물이 최고라 준비한 것이온데.”

“아닙니다. 잘 먹겠습니다.”

“예. 그럼 저는 이만.”

꾸벅 인사한 영귀가 나가고 도화는 탁자에 차려진 아침상을 착잡한 눈으로 쳐다봤다.

“시리얼에서 탈출한 것은 좋은데… 잔치국수라니.”

이쪽은 해결 방법이 안 보이는 문제에 막혀서 깜깜한데 잔치 날에 먹는 음식이 눈앞에 있으니 사람 놀라는 건가 싶은 마음이다. 당연히 영귀는 도화의 이런 상황을 알 리 없으니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뭐, 음식은 잘못 없으니까.”

금강산도 식후경이랬다고. 기억 오류 문제는 우선 뒤로 밀어 두고 식사부터 하기로 했다. 머리를 쓰는 일도 몸 쓰는 일만큼 체력 소모가 크다는 것을 최근 들어 절실하게 느끼는 중이었다.

후루룩.

뜨끈한 국물을 머금은 국수가 부드럽게 삼켜졌다. 영귀의 말대로 쌀쌀한 날씨에 먹기엔 잔치국수만 한 음식이 없는 것 같다.

이게 얼마 만에 먹는 제대로 된 음식인지.

시리얼이 제대로 된 음식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지만, 주식으로 삼기에는 무리 있는 음식이었다.

곁 반찬으로 나온 김치까지 같이 먹으니 젓가락 몇 번 안 움직인 것 같은데 건져 올릴 국수가 사라졌다.

“…….”

혹시 더 넣어 먹을 수 있게 리필용 소면을 가져오지 않았을까 싶어서 쟁반을 살폈으나 그런 것은 없었다.

정말이지 딱 잔치국수 한 그릇, 작은 접시에 김치, 물 한 컵. 이게 전부였다.

“내가 아무리 소식한다지만…….”

도화는 탁자 위에 있는 영귀의 등껍질을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영귀의 살벌한 핍박을 감내하면서까지 한 그릇 더 먹고 싶을 정도로 간절하진 않았다.

“이제 휴가가 사흘 남은 건가.”

사흘 내로 왜곡된 기억의 진실과 제게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의문의 존재를 알아내야 한다. 전자는 지금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떠오르는 게 없으니 후자부터 먼저 알아내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릇을 한데 모아 정리한 도화는 정원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현무는 귀찮은 것은 극도로 싫어하면서 만나러 가면 항상 방에 없었다.

그리고 우연인지 일부러인지는 모르지만, 정원에 있다 보면 나타났다. 이번에도 그럴 것을 예상한 도화는 현무의 방이 아닌 정원으로 향했다.

* * *

‘이게 현무의 능력인 건가. 가드닝하는 사람들이 보면 되게 부러워하겠네.’

정원에 도착한 도화는 만첩홍도를 구경하며 실없는 생각을 했다.

오방대제 중 한 명인 현무는 사방신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현무의 능력이 무엇인지까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리고 그 별로 없는 사람 중 한 명이 도화였다.

게다가 지금은 영귀의 TMI 덕분에 누구보다 현무를 잘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수준이 되어 버렸다.

‘북방을 수호하니 항상 겨울인 곳에서 지내는 것은 알겠고. 사령으로 영귀를 부리며 다섯 가지 속성 중 물을 다루니까 식물도 잘 키우는 건가?’

저 크고 많은 만첩홍도를 관리할 사람이 현무별저에 누가 있겠는가. 영귀가 그 덩치에 그 속도로 관리가 가능할 리 없다. 귀찮은 것은 질색인 현무가 할 리도 만무하고.

‘이곳이 현무의 영역이라 숨 쉬듯이 관리가 되는 건가 보네.’

도화는 이쪽으로 오라며 유혹하듯 살랑이는 붉은 꽃가지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인데 왜 사람처럼 느껴지는 걸까.

“음…….”

왜 그렇게 느껴지는지 생각에 빠진 도화는 그 답을 현무에게서 찾았다.

[쟤가 저래 보여도 외로움을 많이 타거든. 그러니까 조금만 더 있다 가.]

어제 정원에서 만났을 때 현무가 한 말이 도화가 나무를 사람처럼 느끼게 만든 이유였다. 현무의 말은 어딜 봐도 사람을 대하는 어투였다.

‘진짜… 사람인가?’

반대로 고개를 갸웃하며 만첩홍도를 관찰했다. 하지만, 어딜 봐도 저건 나무였다.

그냥 뻘소리로 외로움을 많이 탄다고 했을 수도 있으니까. 도화는 자신이 괜한 고민을 했다며 의자에 등을 기대어 편히 앉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다 사라진 느낌이다. 여름 하늘처럼 구름 한 점 없이 쨍한데 가을 하늘처럼 높디높다. 봄 하늘처럼 은은한 꽃내음도 나는 것이 이곳은 현무의 겨울과는 전혀 연관 없는 곳인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이 정원에는 겨울이 없었다.

저승차사가 된 뒤로 생전 해 보지도 않은, 하리라 예상도 못 한 고생을 수두룩하게 했다. 저승차사가 되기 전에는 몸만 고생하면 됐었는데 지금은 머리가 고생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꽉 막힌 적은 처음이다. 출구 없는 미궁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한 가지 답을 찾으면 두 가지 문제가 주어지니 점점 지치는 게 느껴졌다.

“후우…….”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다. 긴 한숨과 함께 저도 모르게 속마음이 나와 버렸다. 아차 싶어서 손으로 입을 막았다.

‘미쳤구나.’

이런 적은 처음이다. 지친 적은 많았어도 포기하고 싶단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스승님, 죄송합니다. 호윤아, 미안.’

도화는 손을 올려 눈을 가렸다. 차마 이런 마음으로 하늘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스승님이라면 분명 윤회하여 신선이 되어 있을 텐데. 하늘에 계실 스승님을 이런 마음으로 올려다볼 순 없다고 생각했다.

강림 도령이 도화의 이런 생각을 알았다면 ‘윤회가 무슨 구멍가게냐? 아무나 선적(仙籍)에 올리게?’라며 비웃었을 것이다.

아무리 덕을 쌓고 쌓아도 인간이 선적에 오르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 최소 세 명의 신이 보증을 서고 탄생, 운명, 죽음을 관장하는 삼신, 가믄장아기, 대별왕의 허가가 떨어져야 가능하다.

무슨 연유인진 몰라도 칼을 맞고 죽을 정도의 인간이라면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도 그다지 평탄한 운명을 받지 못할 확률이 높다.

이런 걸 알 리 없는 도화는 그저 자신의 상냥한 스승은 신선이 되어 하늘에 있을 것이라 철석같이 믿었다.

스승에게 죄송하다고 연신 중얼거리던 도화는 옆에 누가 앉는 느낌에 눈을 가린 손을 내렸다.

“큰 죄라도 지었나? 뭐가 그렇게 죄송해?”

현무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길게 설명할 생각이 없던 도화는 아무 일도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그런 도화의 태도에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현무는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다 보면 사죄해야 할 일이 끊임없이 생기긴 해.”

현무는 본인도 그런 경험이 있던 것처럼 말했다.

“…현무께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많진 않지만, 있긴 하지. 그렇다고 자네처럼 하늘을 쳐다보며 의미 없이 사과하진 않아. 내 마음 편하자고 그럴 순 없잖아?”

“…….”

현무의 조용한 타박에 도화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의 말대로 방금 자신의 사과는 찰나였지만, 스승의 원수를 갚는 걸 포기하려 했던 자신을 채찍질하는 사과였다. 그렇게 해서 죄책감을 덜려고, 사과하면 조금이나마 편해지니까.

현무의 말이 맞았다.

“각자 사과하는 방법이 다를 테니까 내가 더는 뭐라 할 입장은 아닌 것 같군. 그런데 자네는 왜 자꾸 정원에 오나?”

현무는 자신이 가져다 둔 장의자와 도화를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현무께 여쭐 것이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항상 방에 안 계셔서요.”

“아… 맞아. 요즘 밤낮으로 수다를 받아 줘야 하는 상대가 있어서 말이야.”

“영귀 님 말입니까?”

도화의 질문에 현무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질문이었나 보다.

“그 녀석은 내 앞에선 수다 금지다.”

도화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현무가 부러웠다. 영귀의 TMI와 말 트집을 잡아 과대 확장해서 힐책하는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니. 그런데. 그렇다면.

“영귀 님이 아니라면 밤낮으로 수다를 받아 줘야 하는 상대가 누구입니까?”

“누구겠나.”

“?”

누군지 몰라서 물었는데 되려 누구겠냐고 반문을 받은 도화는 어찌 대답할지 몰라 물음표만 띄웠다.

“저기 앞에 있잖아.”

“네? 저기 누가…… 만첩홍도밖에 없는데요?”

“잘 봤네.”

“?”

현무의 대답에 도화의 눈이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혹시 만첩홍도들 사이에 누가 서 있기라도 한 걸까? 안력을 높여 나무 사이사이를 관찰했으나 사람으로 보이는 형체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오로지 바닥에 뿌리내린 나무들 뿐이었다.

“네가 온 뒤로 어찌나 시끄럽던지. 영귀가 한 마리 늘어난 줄 알았다니까.”

현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람이 쌔앵 불어와 그의 입을 쳤다. 바람 따라 날아온 꽃잎들이 현무의 입과 그 주변에 다닥다닥 붙어서 말을 못 하게 만들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당황한 도화가 괜찮냐고 물으며 현무의 입에서 꽃잎을 떼어 냈다. 다행히 바람결에 와 붙은 것이라 떼어 내는 것은 수월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다 떼어 낸 도화는 설마, 혹시 하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현무님. 아까 저기에 있다는 사람이… 혹시 만첩홍도인 겁니까?”

도화의 질문을 받은 현무가 고개를 한쪽으로 갸웃하더니 대답했다.

“그걸 이제 깨달았냐. 둔탱아.”

“……!!”

설마, 혹시 했던 게 진짜였다니!

크게 벌어진 눈으로 만첩홍도를 쳐다보던 도화가 다시 현무에게 시선을 돌렸다.

꿀꺽. 긴장했는지 침까지 삼킨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사람이… 혹시 만첩홍도인… 겁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홍도화

중년바나나 장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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